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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Nov 24. 2023

부부에게 필요한 '따로, 또 같이'

한국 친정에서 보낸 달콤한 3주가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오던 날.

비행기에서 질질 짤 겨를도 없이, 어깨가 떡 벌어진 청년과 짝꿍이 되어 창가에 구깃구깃 구겨져 왔다. 그렇게 구겨져 있는 동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있고, 강아지가 있고, 나는 그저 부모님 그늘 아래 숨어서 매일매일 즐겁기만 하면 되었던- 을 떠올렸다. 이번 한국행과 많이 닮아있어 하늘 위에서도 마음이 먹먹해져 왔다.


곧 나리타 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흐르고, 고도를 낮춘 비행기 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나는 지난 3주간의 시간을 마음속 '과거' 폴더에 밀어 넣고 현실로 돌아왔다. 이윽고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긴 무빙워크를 걷고, 열감지 카메라를 지나 양손의 지문을 찍고 짐을 찾으면서, '정글 숲을 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기어서 가자' 어쩌고 하는 동요를 떠올렸다.


입국장을 빠져나온 건 5시 반 정도였는데 동네 역에 도착한 것은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전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는 긴 여정이었다. 저 앞에 우리 차가 보여 종종걸음으로 캐리어를 끌고 가는데, 나의 '지금'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사람, 남편이 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이야"


전날 통화에서 '오랜만에 만나려니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서 두근두근해'라던 남편이 수줍은 인사를 건네왔다. 결혼하고 1년 반이나 지났는데 오랜만에 만났다고 수줍어하는 귀여운 사람은 왠지 모르게 낯설면서 또 반가웠다. 


"근데 밥은 제대로 챙겨 먹었어? 왜 이렇게 야위었어"


영상통화에서 본 모습이랑은 다르게, 남편 볼이 핼쑥하고 까칠해져 있었다.


"그런가? 삼시세끼 다 잘 먹고 잘 잤는데. 아마 마음의 병이 얼굴에 나타난 거 아닐까"

"병?"

"그동안 너무너무 쓸쓸했거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취생이 된 남편의 3주는 참 길었다고 한다.

특히 이 집은 줄곧 나와 함께라, 돌아오면 항상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고, 어서 오라 반겨주는 목소리가 있는 곳이었는데,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도 적막만 흐르는 어두운 집이 어색하고 울적했다나.


그래서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샤워하면서도 콧노래, 저녁 만들면서도 콧노래. 매주 일요일은 '와인데이'로 지정해 새로운 카나페 안주를 만들면서 콧노래. 약간 '신나서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상황' 느낌이 나는데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아닌 거겠지.


그렇게 3주를 보낸 남편에게서는 약간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능동적으로 가정 운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타국에서 오래 자취생활을 한 나와, 줄곧 본가에서 살며 시어머니 손을 탄 남편의 가장 큰 차이는 '당사자 의식'이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대신해 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알아가며 아둥바둥 처리해 온 나와 달리, 남편은 만사가 누군가에 의해 저절로 굴러가는 줄 알며 가정을 운영하는 일을 마치 남의 일처럼 한 발짝 물러서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엄마 품 안에 살던 때의 나 같은 모습. 뭘 물어보면 단 1초의 고민이나 해결 의지도 없이 '몰라' 한마디로 내치는 남편은, 자신의 모름과 나의 아둥바둥, 둘 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부부가 되고 나서도 어딘지 모르게 계속 그냥 남자친구 같은, 어찌 보면 아들 같기도 하다는 것이, 착하고 성실한 남편에 대한 유일한 불만이었다. 






그랬는데 3주 동안 혼자 살아본 남편이 조금 달라졌다. 

온수매트가 물부족 알림을 삑삑 울리면 언제나처럼 '이거 소리나' 하며 나를 부르지 않고 알아서 뚜껑을 열어 물을 부었다. '휴지 두 개밖에 없으니 이번 주말에 사야겠다'며 집안의 비품 재고상황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먼저 일어난 주말 아침은 세탁기 운전 버튼이라도 눌러 놓고 게임을 한다. 요리를 하고 있으면 옆에 와서 다 쓴 요리도구를 씻어주고, 대충 읽고 버리던 (사실은 버리면 안 됐던) 서류들도 꼼꼼하게 챙겨두고, 전부 나한테 시킨 작년과 달리, 올해 연말정산은 먼저 서류를 챙겨 계산해 두고 내게 더블체크를 부탁했다.


나는 이런 남편의 작은 변화가 반갑다. 소소한 것이지만 이제야말로 진짜 둘이 함께 이 가정을 쌓아나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또, 나의 아둥바둥을, 나란 존재를 당연시 여기지 않게 된 그 마음가짐이 고맙다. 고맙다는 기분이 드니 나도 이 사람에게 더 깨끗한 환경, 따뜻한 행복감을 주고 싶어져 신혼 초기처럼 가사도 즐겁다. 미묘하게 남편을 돌보는 기분이던, 글 쓰는 루틴이 깨져 답답했던 주말도 지금은 기다려지는 걸 보면 사람 하나의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마음 하나가 전부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부부 역시 여타 다른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상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해서, 아주 가까운 존재라서 쉽게 잊기 마련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작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만으로도 더 쉽게 감동하고 더 간단히 상처받는다. 나도 그도. 그러니까 -


"떨어져 지내보니까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지냈는지 알겠더라고. 그러니까,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내가 더 잘할 테니까"

"근데 여보, 기왕 해주는 거 이거 손잡이까지 제대로 헹궜어야지. 이게 뭐야. 거품이 그냥 있잖아."

"......."


가끔은 하고 싶은 말은 묻어두고, 좋은 말만 해주는 시간도 가져볼까나. 






같이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서로 떨어져 있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 

남편이 그랬듯, 나도 나대로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떨어져 지내는 동안 깨달았다. 우리 아빠는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로 볼 땐 그래 보이지만 내가 우리 남편을 바라보듯, 엄마의 남편으로 바라보니 좀 순한 맛이긴 하지만 옛날 그 나이 또래의 가부장 아저씨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집 양반을 떠올렸다. 세대가 변했으니 당연한 건가? 아니,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감사해야 할 일이지. 그렇게 우리 부부는 또 한 단계,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다음에도 또 한 삼주 다녀와도 돼?”

“... 아직은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


성장에는 아픔이 따른다던가.

뭘 해도 재밌지 않았다던 3주간은 남편에게 약간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매주 일요일의 와인파티는 뭐였나요) 그렇게 따로따로의 시간은 남편의 거부로 당분간은 같이의 시간이 계속될 전망이다.


그래도 가끔은, 따로, 또 같이. 

서로의 존재감을 재확인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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