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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Dec 07. 2023

후루토 켄지와 야지마 코이치

토박이 야채와의 조우 

자주 가는 마트에서 처음 '그 자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지난여름즈음이었다.

오이 자리가 아닌데 오이가 왜 와 있는지 유심히 본 것은, 평소 이런 것들을 자주 봤기 때문이다.


안 살 거면 원래 자리에라도 돌려놓지... 양심 어디?

그런데 오이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매대 안에는 별 연관성 없는 여러 야채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아삭이고추, 여주, 상추, 열무, 노각, 배추


잘 보면 라벨도 좀 수상하다. 



상품명이 쓰여 있어야 할 자리에는 '후루토 켄지(古戸健治)'라는 사람 이름이 쓰여 있었다. 여주와 열무에는 '야지마 코이치(矢島孝一)'가 쓰여 있는 걸 보니 이 아이들을 키운 재배자의 이름인 것 같다. 몇 개인가 친절히 '사이타마산 아삭이고추' 같은 별도의 라벨이 붙어있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마치 '보면 알지?' 같은 느낌으로, 여러 종류의 후루토 켄지와 야지마 코이치가 쪼르륵 줄지어 앉아 있었다. 


이 야채들은 얼마 뒤 작은 입간판이 서면서 정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 근방에서 재배한 로컬푸드라고 했다. 가끔 '미치노에키(道の駅, 지역 특산품 등을 판매하는 휴게시설. 고속도로 휴게소와 비슷하다)'에 가면 그 지역에서 키운 야채들을 만나볼 수 있었지만 일반 마트에 로컬푸드 코너가 들어와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뭔가 엉성한 포장에 작고 못생긴 녀석들. 

종류당 수량도 많지 않은 걸 보니, 어쩌면 오랜 교직생활을 정년퇴임하고 귀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루토 씨와,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농업발전에 큰 뜻을 품고 도쿄의 증권회사를 관두고 귀농한 젊은 농부 야지마 씨가 종묘 가게에서 알음알음 배운 대로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길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땅 자체가 척박해 (※잘 모르고 속아서 샀다는 설정이다) 아무리 열심히 돌봐도 수확량이 적고 모양도 예쁘지 않게 자랐지만, 당초부터 그 둘의 귀농상담을 담당하며 정착을 돕던 시청 농업진흥과 직원 야마다 (※가상의 인물)가 두 사람의 노력에 감동해 그들이 기른 야채의 판로를 찾아주고자, 야채들을 차 트렁크에 싣고 이 근방의 대형 마트들을 찾아갔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뫄뫄시청 농업진흥과 야마다입니다. 구매 담당자를 만나고 싶은데요."


어깨에는 서류가방, 양손에는 열무와 노각, 시금치와 고추를 바리바리 들고 있는 야마다를 훑어본 마트 직원은 안으로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했겠지.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된 구매 담당자와 명함교환을 하고 야채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는 야마다 씨를 보며 몇몇 구매 담당자는 속으로 하품을 했을지도 모른다. 별 수확 없이 돌아온 야마다를 만나러 시청에 온 후루토와 야지마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야마다의 표정에서 '오늘도 글렀구나'라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둘이 자식처럼 길러온 야채들을 위해 힘들게 뛰고 있는 야마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두 사람은 말없이 야마다에게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어느 날, 후루토와 야지마의 밭에 시청의 공용차가 도착한다. 야마다였다. 멀리서부터 손을 붕붕 흔들며 큰 소리로 외치는 야마다. 잎에 붙은 벌레를 잡고 시든 잎을 따던 후루토와 야지마가 허리를 펴 몸을 일으켰다. 


"뭐라는 거야?"

"잘 안 들리는데요."

"후루토 씨이이!! 야지마 씨!!! 납품! 납품 따냈어요!"


장면이 바뀌어 어느 날의 이른 새벽. 수확한 야채를 익숙지 않은 손놀림으로 포장해 자신의 이름을 붙인 후루토와 야지마. 두 사람은 오늘의 납품분을 로컬푸드 코너에 소중히 내려놓았다. 수소문 끝에 알아낸 좋은 거름을 밭에 뿌려 지력을 높였고 좋은 종자를 써 맛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지난여름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소비자들이 제발 알아봐 주었으면. 두 사람은 잠시 기도하듯 야채들을 쓰다듬고는 잠시 코너 주변을 서성이다 돌아갈 채비를 하던 그때였다. 


"어? 여기 '열무'가 있어!"


한 여성이 들뜬 (그리고 딱딱한 억양의) 목소리로 그들의 야채코너에 다가왔다. 뒤를 이어 삐쩍 마른 사내가 따라왔다.


"'요루무'가 뭐야?"

"무 종륜데, 한국에선 김치도 담그고 시래기도 만들어."

"헤~"

"일본에서 열무를 보게 될 줄이야. 사갈까?"


후루토와 야지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이러지 않았을까. (중간에 스톱된 것도 있는데 왠지 이런 소설도 써보고 싶어 진다)


상상의 나래 속에서 허우적대다 그냥 상추보다 후루토 켄지(상추)가 더 싸고 싱싱해 보여 '모 아니면 도'라 하며 사본 것이 다품종 소량생산 로컬푸드, 후루토 켄지 씨, 야지마 코이치 씨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근처 텃밭에서 기른 것 같은 모양새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한번 사보고 나니 '후루토 켄지'와 '야지마 코이치'는 꽤 괜찮은 선택이 되었다. 점점 종류도 더 늘어나고 있어 지역 농가를 응원하는 보람도 있다. 정규품으로는 들어오지 않는 진귀한 야채들도 종종 들어와 별미를 맛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진귀한 야채(노각)는 조리법을 몰라 아직 도전은 해보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일요일에는 야지마 코이치(파프리카)를 사 왔다.

작고 못생겼지만 알록달록 귀여워 양배추 샐러드 위에 얹어보았는데 열매는 작지만 과육이 새콤하고 부드러워 맛있었다. 모처럼 복잡한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은 싱싱한 야채를 시들게 하기 뭐해, 어제는 돼지고기와 양파, 양배추를 새우젓으로 간해 볶다가 막판에 파프리카를 썰어 가볍게 볶아봤는데 그냥 고기 야채 볶음에 상큼한 맛이 더해져 소주 안주로 참 좋았다. 


후루토 켄지 씨와 야지마 코이치 씨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디서 이 야채들을 기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집 앞 50평 정도의 작은 땅에서 시금치 조금, 가지 조금, 상추, 고추 약간, 소일거리 재미 삼아 기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다품종 소량생산을 목표로 농장을 운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덕분에 나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더군다나 이 고물가 시대,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비타민, 식이섬유원을 공급받고 있어 가정 경제에도 큰 보탬이 된다. 이 분들의 이름을 부디 앞으로도 오래오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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