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 대신 와이퍼를 켜고 달린 밤
"여기서 집까지는 내가 몰아볼까?"
경찰서에서 운전면허를 갱신하고 온 후, 나는 약간 좀 시건방져졌다.
새 면허증을 받고 나니 슬슬 운전을 재개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까운 드럭스토어에 갔다 올 때마다 '집까지는 내가 운전할까?'라고 차주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말? 할 수 있겠어?'라며 진의를 확인하던 남편은 몇 번인가의 '아니'에 당하고 나서야 '그래, 해봐' 하고 왼쪽 조수석으로 향했다. 그럼 김 뭐시깽이는 아냐 뻥이야! 안 해 무서워 앓는 소리를 하며 그를 밀치고 조수석 안으로 쏙 들어가는 흐름으로, 그렇게 '내가 운전할까'는 우리의 작은 생활촌극 중 하나가 되어갔다.
자신감 넘치는 도발과 달리,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한껏 야들야들해진 나에게 운전은 아직 무서운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가족차를 운전해 다녔지만 그건 10년도 더 전의 일이고, 지금 차는 차폭 크기 가늠도 잘 안되는데 핸들도 차선도 다 반대다.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하지만 지금은 밤 9시.
동네 특성상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차는 그렇게 많지 않다. 올 때도 달리는 차를 보지 못했으니, 운이 좋다면 이 작은 왕복 2차로를 전세 낸 듯 달릴 수도 있다. 지금이라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아 운전석에 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편은 '설마, 네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편이 조수석에 타고, 나는 페달을 밟기 좋게 좌석을 당기고 높이를 맞추었다. 그런데 차 안이 원래 이렇게 어두웠던가? 뭐가 어디에 있는지 동체 알 수가 없다. 시동 버튼은 브레이크 밟고 누르는 거 맞지? 스틱 머리는 어디 있냐.
"캄캄해서 브레이크가 안 보여."
"보면서 밟을 생각이야? 왼쪽이 브레이크고 오른쪽이 엑셀인 건 알지?"
한참 허둥거리는 내게, 남편이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불안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자 차가 움직였다.
"앗, 안전벨트 매는 것도 잊어버렸네."
다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십 수년 전, 운전면허학원의 기능시험을 떠올린다. 그땐 무슨 깡인지 '여자는 1종이지!' 라며 1톤 트럭으로 시험을 쳤다. 지금처럼 했으면 시작부터 광탈이다. 삐빅- 안전벨트 미착용 실격입니다. 주섬주섬 안전벨트 하고 주차장 출구로 차를 돌렸는데, 다행히 도로 양쪽 다 차들 없이 까만 어둠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음 놓고 크게 좌회전을 하고 가볍게 엑셀을 밟았다.
"봤냐. 나님의 숨겨왔던 운전실력"
마지막 운전은 2012년 3월, 위험한 베테랑 초보 운전자가 그렇게 도로에 나왔다.
"음악이 나오면 몸이 저절로 움직여요."
옛날 댄스가수들은 10년, 20년도 전의 음악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했다. 머리는 잊었지만 몸이 안무를 기억한다고. 베테랑 초보 운전자의 손과 발에도 희미한 아지랑이 같은 기억이 남아있던 모양이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핸들을 꺾으며 오랜만의 코너링(※그냥 좌회전했을 뿐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엑셀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자 오른쪽 발끝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감각(※그냥 차가 멈췄을 뿐임)이 전해져 왔다. 첫 우핸들 운전이었지만 오른쪽 사이드 밀러를 보면서 중앙선과의 거리를 확인했다. 방향은 달라졌지만 예전의 습관이 자연스럽게 스며 나왔다.
그래, 예전.
울적한 밤엔 곧잘 드라이브를 하곤 했다. 유니존스퀘어가든이나 우버월드 같은 밴드음악을 좋아하던 때였는데, 그들의 센티한 곡들을 틀어놓고 집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한 톨만큼의 미래도 보이지 않던 그때. 그렇게 숨통을 트이게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던 그때.
아직 음악을 즐길 정도의 안정감은 없지만 몇 번 하다 보면 예전처럼 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가끔은 텀블러에 뜨거운 커피를 담고, 지금이라면, 그래, 뉴진스의 Ditto 같은 곡들을 들으며 아무도 없는 논두렁 밭두렁의 어둠을 쉬이익 갈라보는 거야.
"이런 식으로 연습하면 다음에는 더 멀리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이 생겼나 보네."
"응. 오랜만에 한 것치곤 생각보다 안정적이지 않았어?"
"방금 그 운전의 어디에서 자신감이 붙고 말았을꼬."
내 환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남편이 한숨을 쉬며 차에서 내렸다.
일본에서의 첫 운전이자 11년 만의 복귀운전에 대한 나와 옆자리 동승자의 감상은 상이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반대편 차선에서 차들이 나타나자마자 핸들을 붙잡은 채 얼어붙은 나는, 사람 말에 대답할 여유조차 없이 '차에 운전당하는 듯이' 보였다 한다. 중앙선을 넘지 않으려 하던 나머지, 도로 왼쪽에 너무 붙어 도로반사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고, 구불구불 위험천만한 1분간이었다고.
"우회전할 때 와이퍼는 왜 켠 거야?"
마지막 관문인 집 앞 골목으로 들어오는 길.
황색선을 넘어 우회전해야 하는 길이라 우측 깜빡이를 켜야 했다.
문제는 핸들과 레버 위치가 바뀌며 깜빡이 방향도 변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오른쪽, 오른쪽 레버가 방향지시등. 이것만 생각하다가 왼쪽 핸들 때처럼 무심코 레버를 위로 들어 올리고 말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무심코 계기판을 보았다가 (그때까진 계기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왼쪽 깜빡이가 켜진 걸 알았다. 그 순간, 내 몸에 잠재되어 있던 베테랑 초보 운전자 스피리츠가 다급히 11년 전의 나를 소환했다. 그리고 11년 전의 내가 오른쪽 깜빡이를 넣기 위해 습관대로 왼쪽 레버를 위로 올리면서,
나는 왼쪽 깜빡이를 넣고 오른쪽으로 돌다 급하게 와이퍼를 켠 사람이 되었다.
아까 드럭스토어 주차장 나올 때는 좌회전하면서 오른쪽 깜빡이 켠 사람이었고.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래도 11년 만의 재데뷔 치고는 괜찮지 않았어? 사실 난 주차를 제일 잘해"
"그걸 제일 못하던데"
"옆자리 계약된 차 없는 빈자리잖아. 그래서 대충 한 거야"
다른 차가 들어올 자리였으면 나도 제대로 했지. 흠흠.
11년 만의 운전 재데뷔는 본인만 즐겁고 같이 탄 사람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뭐 처음부터 다 경력자인 건 아니지 않은가? 하다 보면 신입이 경력되고, 경력이 킹갓무적경력 되고, 베테랑 초보 운전자도 초보딱지 떼고 노련한 운전자가 되는 날도 오고 그런 거 아니겠냐고.
"그러니까 다음은 그 길 말고 삼거리에서 신호 없이 꺾어 들어가는 어려운 길 해보자!"
"글쎄... 거긴 은근히 어려워서 좀..."
의욕에 찬 나와 달리 차주는 어째 눈에 띄게 머뭇거리고 있지만.
과연 내가 노련한 운전자가 되는 그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