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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Dec 12. 2023

조만간 맛보게 될 인생 첫 일확천금의 맛

우리는 반드시 맞춘다

일본에서 복권하면 '〇〇점보'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주택복권 비슷한 종이복권인데, 연 5회, 밸런타인점보(2월), 드림점보(4월), 섬머점보(7월), 핼러윈점보(9월), 연말점보(11월)라는 이름으로 발매한다. 1장 300엔에 최고 당첨금은 7억. 때가 되면 유명 배우들을 기용한 CF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아침 정보 프로그램에서는 1등을 배출한 명당이나 고액당첨의 비결을 소개한다. 존재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이전 직장에서도 때가 되면 '점보 샀어?'라고 묻는 동료들이 있었다. 연말점보만 딱 한 장 사서 지갑에 넣어두고 연말의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사람도 있었고, 때마다 한 세트 열 장을 꼬박꼬박 구매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3000엔이 300엔이 되는 마법(*세트로 사면 그중 한 장은 반드시 300엔에 당첨된다)을 경험하면 어디다 호소할 수도 없는 울분을 느끼지만, 가끔은 투자금 이상을 회수하는 때도 있어 추첨일을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귀가 약간 솔깃했지만, 이제까지 나는 점보, 아니 복권 자체를 사본 적이 없다. 세상사 'no pain, no gain', 상처 없는 영광은 없다 하더라도 애초에 상처의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면 차라리 그 영광 난 안 받으렵니다, 를 선택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올해는 연말점보를 구매했다. 매달 꼬깃꼬깃 모아 왔던 생활비 중 9000엔을 시드로 꺼냈다. 연말연시에 부부가 함께 즐길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 그리했지만, 그런 결정에 이르게 된 것은 나 나름대로 믿을만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믿을만한 구석.


첫 번째, 복권 당첨을 위해 지난 1년 간 선불로 긁어온 악운 리스트. 그리고 사람이 이만큼 긁었으면 마지막엔 대박도 있지 않겠냐는, 빅 페인 빅 게인 살짝 얹은 소망.


브런치북 응모에 1초 차이로 응모를 못한 것도, 왜제 시월드에 마음 상해 눈물 콧물 짜던 것도, 악플때문에 기분 더러웠던 것도, 흰머리가 많이 생긴 것도, 코로나에 걸렸던 것도, 불볕더위에 사랑하는 다육이 절반을 요단강 건너 보낸 것도, 요긴하게 쓰던 진공 유리병이 갑자기 폭파된 것도, 불면증에 잠을 못 이뤘던 것도, 브런치를 반년 가까이하면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것도 (이건 백 퍼센트 내가 구려서인가) 다 복권에 1년 치 운을 털어 쓰기 위해 선불로 긁어온 악운들이었다.  - 2023년 12월 8일 발행, '나의 크리스마스 리스트' 중


두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이 아주 나쁜 기억만 있는 해는 아니었다는 것.

네이버 블로그는 2월부터 6월까지 핫토픽에 세 번 선정되었고, 오늘의 동영상에도 종종 소개되었다. 브런치 작가 신청도 한 번에 통과했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난달에는 연두색 동그라미도 받았다.


세 번째, 원 플러스 원, 길일이 두 개나 겹친 대형길일.

12월 8일은 뭘 해도 좋다는 '타이안(大安)'과 작은 투자가 큰 결실로 돌아온다는 '이치류만바이비(一粒万倍日)'가 겹친 운수대통의 날이었다. 이 날 사면 뭐라도 될 것 같았다.


네 번째, 남편과 함께 가챠를 하러 갔을 때 둘이 한마음 한 뜻으로 '이거 나와라!' 하면 꽤 높은 확률로 원하던 것이 나오던 운빨. 한 사람 한 사람의 운은 그저 그런데 같이 있으면 나오던 시너지 효과를 이번에는 연말점보에 쏟아보기로 했다.


다섯 번째, 작년에 '씻어온 돈'.


가마쿠라의 제니아라이벤텐(銭新井弁天)에서 씻어온 돈

가마쿠라의 제니아라이벤텐(銭新井弁天, 금운이 좋아진다는 신사)에 가서 씻어온 돈이다. 제니아라이벤텐에서 씻은 돈은 사용했을 때 큰돈으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 게다가 저 돈을 감싸고 있는 하얀 천은 가마쿠라의 유명 사원, 하세데라(長谷寺)에 있는 커다란 불상의 발을 닦은 것이다! 원래는 발을 만지면서 기도하는 곳인데 코로나 시국에는 작은 수건으로 문지르고 그 수건을 가져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집에 와서 마땅히 둘 곳을 찾지 못해 씻은 돈을 둘둘 말아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것이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팩트지만, 나는 이 일을 그저 나의 망각이 불러온 현상이 아니라, 이번 연말점보의 고액당선을 위한 큰 그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믿을만한 구석들을 불쌍할 정도로 주섬주섬 그러 모아, 올해 12월 최대의 길일에 남편과 복권을 사러 가기로 했다. 복권 판매소는 통상 오후 6시 30분까지 영업하는데, 최근 남편의 평균 퇴근시간을 생각해 보면 집에 한번 들렀다 가기엔 시간이 좀 촉박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 대박길일을 놓칠 수 없다며, 어떻게든 빨리 돌아오겠노라 전의를 불태웠지만,  그에게 '이제 갈게'가 온 것은 5시 45분쯤이었다.


그도 마음이 다급할 터이니 '알았어, 천천히 조심히 와' 했지만, 기왕이면 조심히, 그러나 빨리 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 계산하면 6시 좀 넘어 집 앞에 도착, 거기서 또 10분. 좋은 날이니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도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또 퇴근시간이기도 하니, 사느냐 마느냐, 줄 선 사람 수가 문제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려 미리 현관을 나섰다. 약간의 기다림 뒤 남편이 도착해 복권 판매소로 향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던가. 남편은 출퇴근할 때도 피해 다닌다던 상습 정체구간을 골라 차를 몰았다.


"아니 또 왜 급할 때 이 길로 왔어... 허허허"


웃음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내 목소리는 아마 냉랭했겠지. 남편은 '아... 주말에 나가는 길로 와버렸네...'라며 풀 죽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했고, 나는 슬슬 마인드컨트롤에 들어갔다.


갈 수 있다.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설령 시간을 넘겼다 하더라도, 길일이 하나뿐인 날이라면 또 다른 날도 있다.

사실 길일이 몇 개든, 길일이든 아니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맞춘다.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6시 17분. 겨우 판매점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예상은 완전한 기우에 불과했다.

안심한 나는 가방 안에서 흰 수건에 싼 2000엔을 아주 정성스럽게 꺼내 들었다.


"이게 뭐야?"

"서랍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영험한 돈"


자신의 지갑에서 꺼낸 7000엔과, 다른 한 손엔 내가 건넨 2000엔을 들고 남편은 진지하게 물었다.


"사이에 섞을까? 위에 덮을까?"





"연말점보, 에... 바라(*연속되지 않은 랜덤번호)로 20장, 에... 그리고... 렌방(*연속된 번호)으로 10장 주세요"


복권을 사본적이 없어 전날부터 미리 연습해 둔 '복권 사는 말'을 남편이 천천히 읊었다. 말도 빠르고 뭐든 빨리 하려는 나와 달리 남편은 성격도 말도 느긋해 내 기준 약간 답답할 때가 있다. 원래는 복권 주문할 때부터 받을 때까지 '1등! 1등 되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빌면서 사기로 했는데 내 피 속에 흐르는 빨리빨리 때문에, 중간에 '빨리 말해, 빨리빨리'하고 사악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복권 판매소 아주머니가 '확인해 주세요, 여기 바라 2세트, 렌방 1세트'라고 종이봉투에 포장된 세 개의 복권 묶음을 보여주었을 때, 퍼뜩 정신을 차리고 '1등, 1등'을 속으로 외웠다. 아슬아슬했다. 그렇게 복권이 무사히 손에 들어왔다.


빨간 색이 바라, 연두색이 렌방


아직 발표하지 않은 나의 '믿을만한 구석'은 하나 더 있다.

가장 중요한 믿을 구석이기도 한 그것은 바로, '말이 씨가 됨의 법칙'이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속담'이란 형태로 마주하고 있다.

괜히 남기신 말이 아닐 것이다. 일본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이렇게 나라를 떠나 비슷한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 인류가 공통적으로 경험해 온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한참 전부터 나와 남편은 '복권에 당첨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 아니라


"우리 내년에 연말점보 당첨금 들어오잖아? 그거 받으면 일단 통장에 넣자. 막 쓰지 말고."

"연말점보 당첨금 언제 찾으러 가지? 5만 엔 이상은 은행에 가야 하니까 유급휴가도 내야 되겠다"


처럼, '사기도 전부터' 꾸준히, 아주 많은 말을 뿌려왔다. (브런치에도 뿌렸다)

인생 첫 복권이자, 일본에서 곧 맞이할 일확천금은, 우리가 그간 뿌려온 말들이 싹을 틔우는 12월 31일에 맛볼 수 있다. 이렇게 단꿈을 꾸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으니 만에 하나 설령 당첨되지 않더라도.. 에비에비!!!!! 우리는 반드시 맞춘다.


어서 와라, 연말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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