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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Dec 21. 2023

부부 싸움하다 한국어 강좌는 왜 봐?

한 100일쯤 뒤 결혼 2주년을 맞이한다.

그래도 1년 꽉 채울 때까지는 어디 가서 신혼이라 말하기 부끄럽지(?) 않았는데, 이제 곧 3년 차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정말 이대로로 괜찮을까 걱정스럽다. 늦은 결혼, 풍모에서는 이미 짙은 관록이 묻어나는데 언제까지고 깔깔 까르르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웃음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다른 집 일은 알지 못하니 딱히 기준이 될 비교대상도 없지만 우리 부부 사이는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어제저녁엔 오랜만에 이 시간에 글을 써보겠다고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더니 남편도 덩달아 조용히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 자려고 누우니 하루가 아쉽게 느껴졌다. 뭔가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계속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고 있어서, 나 사실 오늘 좀 외로웠어."


품에 파고드는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이에게 그리하듯이 (아이가 없으니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야기를 많이 안 했구나. 심심해하는 남편이 신경 쓰여 가끔가다 화면에서 눈을 떼고 '오늘은 어땠어?'라고 매일 묻는 상투적인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거기에 내 마음은 있었을까. 남편도 모를 리가 없다. 


"내일은 많이 이야기하자."






이렇게 쓰고 보니 아주 애틋한 부부 같지만 다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탁기에 양말을 뒤집은 채 넣어서라던가, 씻은 젓가락을 수저통에 꽂는 방식 같은 것 때문에 싸운 적은 없지만 여느 집 부부처럼 그 나름의 '싸움 포인트'가 있다. 지난 토요일 밤에도 그러했다. 내 말에 남편이 발끈해 말다툼을 하다가,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하고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래서 거실을 나와 방으로 휙 들어갔다. 잘 생각해 보고 화가 나면 뒤따라 들어와서 뭐라 하던가, 사과를 하던가 하겠지 하면서. 


그랬는데 5분, 10분이 지나도록 남편은 거실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자기가 분쟁은 꼭 그날 해결하자 해놓고 뭘 하고 있는 거야. 화나서 푸들푸들하는 중인가? 아님 아 시끄러운 애 방에 들어가서 다행이다 하는 건가? 뭐지? 왜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져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뭐 해?"


전화는 걸었지만 남편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딱히 할 이야기는 없었다. 

세상 구남친들이 왜 뜬금없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 '나야, 뭐 해?'라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있어."

"그렇군... 아이스크림 안 먹고 싶어?"


딱히 할 말도 없어 뜬금없이 아이스크림 타령을 시작했다. 남편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먹고 싶어."

"나도."

"근데 집에 아이스크림 없어."

"사 오면 있어."


순순히 알았다 하더니 나갈 채비를 한 남편은 동네 슈퍼에 가서는 '이거 있는데, 저거 있는데' 하면서 이것저것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중 하나를 고르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잠시 뒤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아이스크림 사 왔어. 와서 먹어."


방문을 빼꼼 열고 남편이 말했다. 아까까지는 그렇게 질척거리던 내가 마지못해 말하는 척, '으응. 냉장고에 넣어놔' 대답을 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 거실로 나갔다. 남편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며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소파 앞에 자리를 잡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언제나처럼 뭔가를 먹기 전 경건한 마음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뚜껑을 열고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바닐라향이 입안에 퍼졌다.


"먹을래?"


남편도 다른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지만 선뜻 끄덕인다. 남편이 들고 있는 것보다 이게 더 바닐라맛이 진할 것이다. 더 비싸고. 어쩌면 사실 그도 이걸 먹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편도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지만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젓고 티브이로 시선을 돌렸다. 매주 목요일마다 하는 한글나비라는 한국어 강좌가 틀어져 있었다. 가나다라 배울 때는 매주 꼬박꼬박 봤는데 '해요', '어요'가 나오자마자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한국어 너무 어렵다'며 흥미를 잃고 지금은 너무 안 봐서 따라잡을 수도 없어진, 녹화만 해놓고 보는 이 없는 비운의 방송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아직 싸우고 있는 중 아닌가? 냉전 중 아니냐고.

뜬금없이 싸운 마누라네 나라 말은 왜 공부하고 있어. 이 남자의 심리상태가 궁금했다. 


"갑자기 이건 왜 보고 있어?"

"안 보던 사이에 상반기 총 다이제스트 편이 있길래."

"근데 우리 싸우던 중 아니었나요? 왜 갑자기 공부 모드죠?"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웃었다. 애초에 싸움거리도 아니고, 더 끌어봤자 의미도 없고,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지 못하고 서로의 손만 기다리고 있는 그런 상태였겠지. 우리는 손을 맞잡고 미안해, 아니 내가 미안해 같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웃고,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고, 한국어 강좌를 보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를 대했다. 그래서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하나보지. 때론 작은 일로 싸우기도 하고, 작은 일 때문에 싸우면서 세상 제일 미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완전히 미워할 수가 없는 우리 부부는 신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물'이긴 한 것 같다.


 




근데 갑자기 한국어 강좌는 왜 보고 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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