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람 Jan 16. 2024

가끔은 쇼유라면

오늘은 최고기온 5도, 최저 -1도로 관동지방 치고는 꽤 추운 날씨다. 무엇보다 바람. 바람이 세다. 마치 어디 세상의 끝에서 데려온 것 같은 바람. 분명 창문을 잠가 두었는데 커튼이 틈새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베란다 창 접합부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 


이런 아기돼지 삼 형제 둘째 집 (목조라 더 리얼) 같은 집에서 혼자 바람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지구에 뭔가 큰일이 벌어졌는데 얼마 안 되는 기적의 생존자인 내가 건물 잔해를 모아 어찌어찌 터전을 만들고 남의 집 폐허에서 유물처럼 발견되는 통조림과 부탄가스를 모아 생활하며 '하... 오늘도 모래바람이 세네...' 하며 이 빠진 낡은 머그컵에 따뜻한 커피를 호로록 마시고 있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믹스커피만 줄곧 타마시다가 안 되겠다 싶어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라면을 끓이면 뭐가 좋냐면, 라면을 끓이는 동안 가스불 열과 수증기로 집안 온도가 올라가고, 보들보들한 면발에 국물 후루룩 뱃속에 넣어주면 몸 안쪽에서부터 따스한 온기가 스며 나온다. 덤으로 스르륵 졸음까지 와서.....................


어머 아줌마! 이런 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오늘은 일본 인스턴트 라면, 간장 베이스의 쇼유라면이다. 

끓인 물에 분말 스프, 건더기 스프, 면을 넣고 팔팔 끓이는 한국 라면과 달리, 이쪽은 면을 끓이다 불을 끄고 스프를 뿌려 휘휘 젓는다. 건더기 스프는 따로 없이 취향껏 야채를 넣어 먹으라는데 나중에 야채를 넣는 것이 좀 어색해 신라면에 하던 것처럼 다진 마늘도 넣고 양배추, 파, 숙주나물을 올려 끓였다. 



내용물이 적당히 익었을 즈음, 가스불을 끄고 첨부된 분말 스프를 탈탈 털어 넣었다. 화룡점정, 맨 마지막에 스프를 넣는 방식은 아직도 어색하다. 예전에 롤러코스터의 습관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는데, 그 가사대로다. 습관이란 건 무서운 거더군. 스프를 먼저 넣던 나중에 넣던, 라면 회사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니 그저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될 터인데, 오랜 습관과 에고로 새로운 것을 솔직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편할 때가 있다. 사람이 나이가 먹을 수록 꼰대가 되고, 답정너가 되는 것도 그런 원리일까. 내 의견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냥 해보라는 대로 해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특히, 지금처럼 따라야 할 조직사회의 룰 없이, '내 룰'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야말로. 


에이, 무슨 라면 끓이는 거로 이런 생각까지 하고 앉아 있어.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라면. 

한 젓가락 집어 들고 '호오' 불면 드래곤의 입김처럼 앞쪽으로 하얀 김이 기세 좋게 뻗어나간다. 

아, 대체 집을 어떻게 지은 거야. 투덜투덜 일어나 유탄포에 뜨거운 물을 넣어와 코타츠 안에 집어넣고 무릎엔 코타츠 이불을, 어깨엔 담요를 두른 채 다시 젓가락을 집었다. 차갑게 얼었던 손발에도 조금씩 온기가 돈다. 오늘 저녁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낫또 신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