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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an 24. 2024

일본식 참치조림(이었던 것)

겨울이 되면 유독 오래 끓이고 졸인 요리들이 생각나곤 한다.

보글보글 찌개가 그렇고 고기살점 넉넉하게 함께 넣고 푹 끓인 사골국이 그렇고, 또 국물 자작하게 붓고 졸인 조림요리들이 그렇다. 푹푹 찌는 여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라인업이지만 한창 추운 겨울, 요리를 하며 솟아오른 김으로 훈훈해진 방에서 따뜻한 온기를 삼키는 그 시간을 나는 꽤 좋아한다.


며칠 전에는 마트에 갔다가 참치 서더리로 큰 살점 하나가 나와있는 걸 보았다. 마침 무떡 만들려고 무도 하나 카트에 넣어둔 참이다. 이번 주는 싸늘할 거라 하니 이걸 사다 일본식으로 졸인 참치 조림을 만들고 소주를 곁들여 삼삼하게 추위를 견디어 보는 건 어떨까. 소주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으로다가.



먹는 건 저녁에 먹을 거지만, 점심 먹고 커피 한잔 마신 다음에 무를 썰기 시작했다.

요 이틀간, 오후 좀 이른 시간에 저녁거리를 미리 만들어 두고 있는데 이게 꽤 괜찮다. 저녁엔 데우기만 하면 되니 여유가 생겨서 좋고, 무엇보다 날이 캄캄해지고 나서 뭘 하려 들면 세상만사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는데 아직 해가 있을 때 움직이면 그나마 좀 낫다. 해가 난 날은 부지런을 떨면서 흐린 날은 한없이 게을러지는 나를 보고 남편은 '식물인가?'라고 했는데. 나, 정말 식물인가?


반달썰기한 무는 궁중팬에 우르르 쏟아 넣고, 간장, 미림, 설탕, 다시다, 다진 마늘, 다진 생강을 눈대중으로 넣은 뒤, 그 위로 물을 자박하게 부어 끓였다. 팔팔 끓어가는 무를 보니 갑자기 고등어조림이 떠오른다. 매콤한 양념, 콤콤한 시래기가 들어간. 아- 시래기. 친정 갔을 때 시래기 얻어오는 걸 잊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무얼 하겠느냐마는, 여기에 왠지 시래기, 아니면 시래기 친구 우거지라도 넣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에 배추 반토막이 있는 게 생각나 배춧잎을 몇 장 떼어내어 칼로 슥슥 베어 넣었다. 푸욱 끓여 흐물흐물 해지면 약간 우거지 느낌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거지처럼 될 것 같았으면 우거지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추도 배추대로 맛있지만, 이건 이거, 그건 그거지. 우건 우거지. (?)



배추줄기까지 익고 나면 참치를 위에 얹고 소주를 조금 부었다. 요전에 참치조림을 만들 때 비린내와 거품이 심해서, 거품 뜨랴, 생강 넣으랴, 소주 넣으랴 정신없었는데 미리 넣었는데 이번엔 참치를 물에 담갔다 써서 그런지 이번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이고, 아까운 내 소주) 국물 밖으로 삐져나온 참치는 이리저리 굴려가면서 뭉근한 불로 오래 끓였는데, 국물이 영 심심해 저녁 전 데울 때 고춧가루를 뿌려 넣고 파도 얹었다. 혼자 먹었으면 아까부터 떠올렸던 고등어조림처럼 더 칼칼하게 만들었을 텐데 매운 걸 잘 못 먹는 사람도 같이 먹어야 하니 이쯤에서 타협을 해야겠다. 이미 배추를 넣었을 때부터 탈선했지만 일본식 조림이라 하기에는 맛이 다채롭고, 한국식이라 하기엔 어딘가 밍밍한 이 참치 조림은 '일본식 참치조림(이었던 것)'이라 부르기로 했다. 일식 레시피를 보고 만들면 항상 이렇다. 내 머리 한구석 어딘가에는 내가 먹고 자라온 그 맛이 있고, 이미 그것이 '완벽한 이상향'으로 자리 잡아 있기 때문에, 지시에 없던 마늘을 넣고 고춧가루를 뿌린다. 하지만 또 완벽한 이상향을 퍼펙트하게 구현해 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 내 멋도 네 멋도 아닌 음식이 탄생한다. 나는 평생 이런 식으로, 어중간하게 자꾸자꾸 한국을 뒤돌아 보면서 살지도 모른다.


- 여기까지 쓰고 세탁기가 부르길래 그 김에 청소기까지 돌리고 있는데 문득 수십 세기 전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도 그러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 마음 한편에 있었던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침략자에 대한 분노, 미개의 땅에 터전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그들을 동경하기도 하면서 질투의 감정도 가지고 있던 왜인들. 그리고 그 안에서 싹트는 백제 몰락 왕족 왕자와 왜인 귀족 아가씨의 사랑-


푸시시이이익-


잡생각은 청소기를 끄는 순간 끝났다.






내 멋도 네 멋도 아닌 일본식 참치조림(이었던 것)의 퍽퍽한 참치살은 국물에 촉촉이 적셔 와사비를 조금 올려 먹으니 그건 그거대로 또 괜찮았다. 다음에 만들 때에는 냉장고에 배추가 없을지도 모르고, 양념의 배합이 달라 지금 이것과 똑같은 맛은 재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나, 그땐 냉장고에 또 다른 뭐가 있겠지.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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