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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an 23. 2024

다음 주 토요일에 뭐 해?

우리 집 일본인 #7

"다음 주 토요일에 뭐 해?"


아아 우어어 옹알이로 시작했던 나의 한국어. 그 한국어를 깨친 이후, 장장 3n 년 동안 계속해 온 언어생활에서 얻은 '눈치'에 의하면 이와 같은 질문의 의도는 이하 세 가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하나, 토요일에 정말 뭐 하는지 궁금하다. 

둘, 휴일을 보내는 방법을 통해 그 사람의 가치관을 파악하고 싶다. (※면접의 경우)

셋, 별일 없으면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 


첫 번째 의도라면 굳이 '다음 주 토요일'이란 시간 지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면접이 아니니 두 번째 일리도 없고, 이제까지의 맥락을 따져보면 세 번째 의도임이 명백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반문했다.


"왜?"






2020년 한 해는 코로나19 대응 때문에 업무 피로감이 아주 심했다. 처음 겪는 팬데믹에 학교 전체의 방침도 니텐산텐 (二転三転, 두 번 세 번씩 자꾸 번복되는 것) 되어, 어제 퇴근 직전까지는 대면수업을 준비했는데 다음 날 출근해서는 비상근 강사들에게 휴강과 온라인 수업으로의 전환을 부탁하고 등교한 학생들에게 학교의 노트북을 지급해 귀가시키는 등, 당장 오늘부터 움직여야 할 모든 스케줄을 정지시키거나 학사 일정을 변경하는 짓을 1년 사이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게 1년을 우왕좌왕하다 이제 겨우 한숨 돌리려는 찰나,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해 온 상사의 가스라이팅이 시작되었다. 그는 독단적이고 편협한 성정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실무진과 의견이 어긋나면 아주 나긋나긋한 말투로 집요한 설득을 시작하는데, 한번 시작하면 듣는 사람이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장시간 붙잡아두고 세뇌하는 것을 특기로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유일한 외국인 정직원이었다. 외국인과 함께 일해본 경험이 없던 그에게 있어서 나는, '일본어가 어디까지 통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반일교육을 받아 생긴 일본에 대한 반감을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도 있는 위험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그가 부임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비상근 강사용 배포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그가 자기 자리에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을 건 적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고, 혼잣말도 잘하는 사람이라 또 혼잣말했나 보다, 하는데 묘한 시선을 느껴 '혹시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내게 질문을 했었던 모양이다. 


"이입하악시익 주우운비이느은 다아 끄읏났스읍니까아? (입학식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네, 이미 강의실 세팅도 다 끝났고요, 담담히 대답했지만 그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어린아이에게도 그렇게는 안 할 법한 느릿한 말투. 아무리 외국인이라 해도 강산이 한번 변할 시간 동안 일본에서 밥벌이하고 있는 서른 중반의 부하에게 할만한 언사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옆 자리에서 설마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혼잣말인척 자꾸 주어 빼고 빈정거리기도 했고, 이미 나도 알고 있는 일이고 인식마저 같은 사안에 대해 장시간 설교를 늘어놓아 사람을 흔들어 놓았다. 그의 의도는 전부 알고 있었다. 나를 자신의 컨트롤 하에 두고 싶은 것이다. 


그쯤 되니 외국인 유학생들의 꿈을 실현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내 일에 대한 자부심도 뿌옇게 흩어져 가고, 사랑스럽던 학생들-다들 스물 훌쩍 넘은 어른들이지만-도 그저 나를 괴롭히는 족쇄들 중 하나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 늘어갔다. 상담시간에도 자신의 생각 없이 그저 '어떻게 해요?'라고 질문하러 오는 학생들에게 '나조차 나를 어째야 할지 모르겠는데, 왜 스스로 고민하지 않는 너의 인생까지 내가 같이 고민해 줘야 하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고 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던 것이 매일 퇴근 후 그와 주고받는 전화와 메시지였다. 


문제는 정말 큰 위안이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매일의 희로애락을 공유할 수 있고, 때론 웃음으로, 때론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인 동시에 불안한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마음을 기대어도 되는 것일까. 언젠가 갑자기 지금의 관계가 무너져 버리면 어떻게 하지. 


무엇보다도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는 나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건 연애감정이 아닐 터인데 연애감정 같기도 했다. 하, 애들도 아니고, 나이 먹고 이게 무슨 꼴인가.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낮은 자존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복잡한 기분 때문에, 퇴근길에는 예정에도 없던 긴자에 내려 정처 없이 거리를 걷기도 하고, 술을 왕창 마셔 마음을 분산시키려 했다. 하지만 내가 대답이 없을 때에는 끈기 있게 기다려주고, '괜찮아? 무슨 일 없는 거지?' 하고 따뜻하게 물어봐 주던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점점 더 그가 궁금해졌다. 



서성이던 긴자


어둠 속의 남편 얼굴이 궁금했던 프시케가 어떤 종말을 맞이했는지 알고 있지만, 세헤라자데는 어느 날, 프시케가 되기로 결심했다. 


"궁금해, 사진 보여줘."


사진이 없다 냅다 잡아떼던 그는 결국 사진 교환을 조건으로 내걸며 마지못해 사진을 보내주었다. 지금 막 씻고 찍은 참이라 머리 세팅을 안 해서 이상하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보게 된 그의 모습은 내가 멋대로 품은 이미지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부드러운 곱슬머리가 부러워서 해 보았다는 파마는 원컬도 아니고 왜 그렇게 보글보글 말아놓은 것인지,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서만 쓴다는 동그란 프레임의 안경은 콧등이 아닌 그 곱실곱실 한 파마머리 위에 턱 하니 얹어놓고 있었다. 날카롭게 힘을 준 길고 가느다란 눈매와 얼굴의 흉터는 상냥하고 따스한 목소리와 다르게 매섭고 의외의 것이라 놀랐지만, 외모야 뭐 연인으로서의 관계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뭐에 실망했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나의 실망과는 별개로 그에게는 환상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생기를 잃은 동공에까지 첨단과학기술을 응집시켜 윤곽만 얼추 나인 사진을 만들어 랜선에 실려 보냈다. 만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좋은 인상만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만난다'라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공된 사진을 보고 좋게 생각하고 있다가 실제로 만나보면 속았다는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럼 굳이 서로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고 지금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는 사람 얼마 없는 일본에서 이렇게 매일 연락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고, 이 밸런스가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리스크를 안고서까지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지금 이 상태가 베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뭐, 별다른 예정 없으면 만나보고 싶어서."

"만나서 뭐 하려고?"

"그냥 밥 먹고 이야기하고."

"좋아."

"진짜?"

"응, 근데 다음 주 토요일 말고, 다음 생 정도가 좋겠다."


하지만 그는 다음 생은 안된다고 했다. 


"내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금 120kg 정도 나가는데 한 100kg까지는 다이어트 한 다음에 만나고 싶어. 뭐랄까, 가장 좋을 때의 나를 보여주고 싶달까? 별로 뭐 남자여자 그런 거 운운 아니고, 그냥 내가 세상에 베풀고 싶은 최소한의 매너랄까?"

"됐어. 120kg라도 괜찮으니까. 그럼 토요일에 만나는 거다?"


그는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이만큼 매일 이야기하고 있는데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내게도 궁금하지 않냐고 물었다. 


궁금하긴 궁금하지. 하지만,


"만약 만나게 되면 우리 관계는 변하게 될까?"


그는 잠시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좋은 방향이 아닐까 싶어."

"글쎄, 과연 어떨까."

"그럼 우선 손잡고 걸어보자."

"뭐래."


그렇게 매일같이 계속되던 줄다리기는, 결국 나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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