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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an 25. 2024

4월 10일, JR아카바네 역 앞에서 만나

우리 집 일본인 #8

2021년 4월 10일 토요일 13시 20분 경.

나는 아직 JR아카바네(赤羽) 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 있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는 13시 28분에 아카바네에 도착하는 전철을 탔다. 개찰구를 나오는 건 대충 30분 정도가 될 것이다. 나도 처음 타보는 버스라 현재 위치에서 역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으나, 남은 시간은 10여 분 남짓. 아, 아까 눈앞에서 놓친 그 버스에 탔었더라면 상황은 훨씬 나았을 텐데.


조금 늦을 수도 있다는 연락을 하니 상대방은 괜찮다고 했지만, 일부러 먼 곳까지 와준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영 마음 불편한 일이었다.


내가 오늘 이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가, 만나고 싶지 않았는가를 떠나서 말이다.






얼떨결에 그래, 토요일에 만나자, 고 대답했지만 나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좋았고, 괜한 허세를 부리지 않는 겸허함이 좋았다. 서로 다른 곳에서 굴러가던 나의 일상과 그의 일상이, 매일 저녁 한 점에서 만나 일직선을 그어가는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실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 어떤 의미로는 티브이 속 사람과도 다를 바 없는 액정 건너편의 사람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의 사진을 보고 나서 느꼈던 묘한 실망감은 나의 호감이 그 자신이 아닌, 내가 멋대로 싹 틔우고 애지중지 키워나간 '환상'에 향하고 있었음을 인지함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외국인이란 껍데기가 아닌 나 자신의 내면을 보아주길 바라고 지금의 이 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다 하면서도, 내가 만든 환상과 동떨어진 현실에 실망하고 흔들리는 이율배반을 범하는 나 자신이 속물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냥 지금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될 텐데-


한편으로는, 그냥 빨리 종지부를 찍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다.

긍정적인 자극이라고는 개미 눈곱만치도 없는 일상에 오랜만에 들이닥친 이벤트 같은 느낌으로 한번 만나보고 그걸로 마음의 정리가 된다면, 이 이상한 기분도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우타다 히카루의 'Addicted you'의 가사처럼, 변하지 않는 것도,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길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굳이 매일 시간을 할애하며 감정을 소모할 필요도 없다.


그와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견딜 정도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일 테니까.


하지만 두려웠다.


그런 복잡한 기분을 딱히 숨기려 하지는 않았다.

당일 아침까지도 '자, 그럼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각자의 자리에서 주말을 만끽합시다' 라느니, 이제 막 전철에 탔다는 사람에게 '수고했어. 그럼 도쿄에서 잘 놀다 가!' 같은, 농담 같지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라인을 보냈다. 읽은 사람이 그걸 눈치챘는지, 눈치채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결국 국제흥업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아카바네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가 몇 군데 가게를 골라 URL을 보내주었지만 하필 핸드폰 데이터가 끊겨 일일이 열어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반도 다 못 열어보는 사이, 버스는 헤아리던 것보다 더 빨리 역 앞에 도착했다. 13시 31분이었다.


'역 앞에 도착했어. 어디야?'

'히가시구치(東口, 동쪽 출구) 흡연소 앞. 어디쯤에 있어?'

'역 안 와코 (和幸, 돈카츠 체인점) 앞 지나고 있는데, 일단 그쪽으로 갈게'


아카바네역 히가시구치 앞은 넓은 광장이었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한 이후,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광장의 벤치 조형물에 기대어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파마머리 남자. 저 사람인가? 전화를 걸었다. 아, 역시 맞았다. 전화를 받는다.


"지금 히가시구치에 도착해서, 나는 너 보이는데 나 누군지 알겠어? 코방(交番, 작은 파출소) 앞에 있어."

"아, 응. 보여"

"자, 그럼 이제부터 코방에 같이 가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자"

"에?"

"농담이야."


긴장했나. 괴상한 농담을 해버리고 말았네.






"안녕하세요. 일단... 처음 뵙겠습니다?"


서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 하던 존댓말로 인사를 나누었다.

너무 빳빳한 생머리라 곱슬머리가 부러워서 했다던 그의 파마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러나 사진과 마찬가지로- 썩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사진보다는 덜 곱슬거렸다. 왜 그렇게 세게 말았냐고 한 것이 신경 쓰였던 걸까. 그 파마가 저 정도로 덜 곱슬거리려면 머리 감고 나서 쥐어뜯듯 당기면서 말렸을텐데. 그러고 있었을 걸 상상하니 뭔가 좀 웃겼다.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이런 저라 죄송합니다.


지난 2주간, 매일 아침 눈을 뜬 순간부터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퇴근하고부터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줄곧 라인으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한두 시간씩 전화 통화를 이어나갔다. 인생에 접점이 없었던 시간을 이제부터 메우려 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이제까지 살아온 이야기와 시시콜콜한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던 사람과 처음으로 마주하려니 반가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이 일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제일 부끄러웠다.

더운 버스 안에서 땀과 함께 다 지워졌을 화장, 업무 스트레스를 술로 풀다 퉁퉁하게 불어난 몸, 출근할 때 입는 옷 말고는 변변한 외출복이 없어 자라에서 급하게 산 영 어울리지 않는 민트색 쟈켓. 거기에 현대 영상편집기술이 집약된 내 사진과 괴리감 밖에 없는 내 모습. 약간의 죄책감마저 들었지만, 내 타입이 아니네 뭐네 하면서도 그를 너무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 또 한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멀리서 한눈에 봐도 처음 만난 사이임이 분명한 둘을 일단 이 광장에서 끌어내야 할 것 같았다.


"아까 라인으로 보내준 가게들, 데이터가 끊겨서 제대로 못 봤는데 그냥 좀 걸으면서 가게 찾아볼까요?"


송아지가, 아니 송아지 같은 눈망울을 한 그 남자가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1000엔을 내면 주는 카드들을 술 또는 음식과 교환하는 센베로.


우리가 만난 아카바네에는 이자카야, 그중에서도 천 엔만 있어도 곤드레만드레 취할 수 있다는 서민적이고 저렴한 센베로가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골목이 있다. 낮부터 이자카야가 열려있는, 이른바 술꾼의 성지 같은 곳인데, 집에서 버스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건너 건너 이야기로만 들었지 실제로 가본 적은 없었다.


한낮의 아카바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순전히 낮술을 할 수 있는 가게가 많을 것 같아서였다. 둘의 중간지점에서 만난다 한들 논밭밖에 없을 거라며 상대방 본인이 도쿄에 오겠노라 했고, 만나서 밥을 먹자니 음식 취향도 따져봐야 하고 맨 정신에 민숭맹숭 있어봤자 낯 가리느라 속이 타 물만 벌컥벌컥 들이켤 것 같아 차라리 낮술을 마시자는 이야기가 됐다. 어차피 코로나 대책으로 도쿄 도내의 음식점들은 오후 8시에는 문을 닫아야 하니, 점심 즈음에 만나서 술잔 앞에 두고 이야기하다가 늦은 시간이 되기 전에 파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이쪽이 노미야가이(飲み屋街, 이자카야가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인 것 같은데"


둘 다 초행길, 처음 온 동네를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었지만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저기 이런 가게 있다' '이쪽으로 가볼래?' '날씨 좋다' 정도. 실제로 만나보니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낯을 좀 가린다고 했다. 정말일까? 내가 사진이랑 너무 달라서 실망한 것은 아닐까? 약간의 불안함이 그림자처럼 발밑에 아른거렸지만, 나는 불안감으로부터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했다.


종종 흘끗흘끗 쳐다보던 그 남자의 느긋한 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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