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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an 30. 2024

역시 만나지 말 걸 그랬다

 우리 집 일본인 #9

일전에 JR니시닛포리 역 앞 스페인 요릿집에 지인 언니랑 맥주를 마시러 갔다가 입구 근처 창가 자리에 앉은 남녀 한 쌍을 보았다. 손님은 우리랑 그 커플밖에 없었고 우린 퇴근 후의 지친 몸을 벽에 기대어 비스듬하게 앉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의 와인 보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크게 손을 휘적거리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남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작은 리액션의 여자.


"あっち、絶対今日初対面だわ (저쪽, 절대로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일 거야)"


언니의 단언에, 왜 그렇게 생각하냐 물어봤더니 원래 알던 사람끼리의 텐션이 아니라고 했다. 특히 여자는 실제로 만나보고 완전 차게 식어 맞장구 밖에 안 치고 있는데, 남자 혼자 신나서 떠들고 있는 거라고.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의 나와 이 남자도 그렇게 보이고 있겠지.

이제 막 영업을 개시한 한낮의 이자카야, 10개 정도의 테이블 중 손님은 우리를 합쳐 두 테이블뿐. 데면데면한 공기가 역력한데도 "뭐 마실 거야? 나는 하이볼!"이라며 오버해서 메뉴판을 건네고, 다시 있는 힘껏 어색해하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오늘 처음 만나는 티가 날 것이다. 


그때 그 니시닛포리의 스페인 요릿집에서 나는 말했었다.

"얼추 비등비등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여자는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언니는 말했다.


"원래 어플 같은 거로 사진 주고받을 땐 '기적의 한 장'을 주잖아. 기대치가 높아진 만큼 현실과의 갭이 더 커지는 거지. 게다가 나 같아도 저렇게 오버 떠는 남자는 좀 싫을 것 같은데. 나이에 비해 여유 없어 보이고, 또-"

"또?"

"분위기 못 읽고 저러는 게 더 별로야."






한참 노미야가이(飲み屋街, 이자카야가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를 헤매다 들어간 이자카야.

점원이 안내한 안쪽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부터 찾았다. 딱히 가리는 건 없다던 그는 함께 메뉴판을 들여다보면서도 적극적으로 '이걸 시키자'라고 제안하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대한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좋은 사인은 아닐 것이나 점원이 음료를 재촉하러 와 있었기 때문에,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하이볼과 생맥주를 먼저 주문했다. 


점원이 술을 가지러 간 사이, 다시 메뉴판으로 눈을 돌려 우메스이쇼(梅水晶, 상어 연골을 매실과육에 버무린 안주)와 부타하라미야키(豚ハラミ焼き, 갈매기살구이), 포테사라(ポテサラ, 으깬 감자를 마요네즈 등과 버무린 샐러드)를 우선 주문하기로 했다. 이전 회사는 회식이 잦았는데 그 덕분에 회식 때 뭘 시키면 호불호가 덜 갈리고, 뭐가 빨리 나오고 늦게 나오는지 눈치껏 배웠다. 그게 뭐라고, 그래도 도움이 될 때도 있네. 그는 다 괜찮다고만 했다.  


곧 나의 하이볼과 그의 생맥주가 차례로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일본에서는「とりあえず生 (일단 생(맥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첫 잔을 맥주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냥 빨리 맨 정신이 아니고 싶어서 첫 잔부터 하이볼을 시켰다. 잔을 받은 뒤 그대로 음식을 주문하고, 그때까지 하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가방에 접어 넣고는 잔을 부딪혔다. 그는 얼굴을 드러내어 부끄러운 것인지, 낯을 가려서 그런 것인지 이제까지 보다 뚝딱댔다. 물어보면 대답은 하지만,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황급히 눈길을 돌리기 바쁘고 '후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그저 낯을 가리는 탓이라 생각했다. 여기로 들어올 때까지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건 아니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까 발밑에 아른거리던 불안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실제로 만나보니 실망한 걸까? 대화가 지루한가? 혹시 시간 아깝다 느끼는 걸까? 


불안감은 어느새 테이블 높이만큼 자라 있었다. 내가 아는 재미없는 나, 매력 없는 나, 예쁘지 않은 내가 그 위에 올망졸망 올라가 있었다. 얼른 잡아 뒤로 감추려 했지만 그가 눈길을 피하고 한숨을 쉴 때마다 삽시간에 몸집을 키운 불안감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상대에게 받은 실망감을 감추는 것보다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실망감을 애써 모른 척하는 것이 몇 배나 힘들다는 건, 처음 맛보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더 아프게 가슴을 짓눌렀다. 


역시 만나지 말 걸 그랬다. 

만날까 말까, 고민했던 시간들이 부질없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한숨 많이 쉬면 행복 다 도망간대'라고, 최대한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지만, 곤란한 마음에 한껏 일그러진 눈썹, 올라가다 만 입꼬리는 상대방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있을까. 마음의 정리고 뭐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정답이었음을, 정답을 선택하지 않은 내가, 그래서 이 자리에 온 내가 지금 느끼고 있었다. 

 

한편, 인간의 선함을 믿고 싶기도 했다. 그간 즐겁게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동안의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생각이 태도로 드러나는 사람은 아닐 거야. 그래, 피치 못할 뭔가 사정이 있겠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도진 걸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애써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들리지 않은 척, 동요를 감추고 평소처럼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아니, 동요를 감추고 평소처럼 이야기하려 했지만, 일그러진 눈썹, 채 올라가다 만 입꼬리까지 감출 수는 없어서 평소보다 더 과장된 표정과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늘 날씨 좋지? 어플로 사람 만나본 적 있어? 원래 그렇게 말이 없는 편이야?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 이어지지 않는 대화를 이어가려고 하는 내게서 니시닛포리 스페인 요릿집에서 보았던 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리했었는지를 뼈저리게 이해했다. 그는 아마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분위기 못 읽고 저러는 게 더 별로야."


그날 지인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내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첫 맥주잔이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였다. 두 번째 잔부터는 나와 같은 하이볼을 주문한 그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진짜 낯가림 심해서 워밍업 끝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려."

"한숨도 워밍업 옵션이야?"

"그건 너무 긴장되고 그래서. 그건 그렇고, 예상외로 어른스럽네?"

"그것은 욕일까? 칭찬일까?"


술이 들어가고 긴장이 좀 풀렸는지 그도 눈을 맞추고 좀 더 주체적으로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고, 만나기 전의,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농담도 주고받을 있게 되었다. 그제야 안주도 좀 무슨 맛인지 알 것 같았고, 허기도 졌다. 생각해 보면 오늘은 여기서 먹고 있는 이게 첫 끼니였다. 호불호가 갈릴 듯해 주문하지 못했지만 보자마자 줄곧 신경 쓰이던 닭 육회도 냅다 주문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아, 음식 사진 찍는 게 취미라서."


그가 살포시 웃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잠깐의 침묵이 아까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환상에 대한 호감이던, 안심감에서 온 안락함이던 그냥 이 순간이 즐겁고 편안했다.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 그의 얼굴에 있는 상처나 겪었던 사고에 관한 조금 깊은 이야기도 하게 됐는데, 그 안에서 그의 건강한 자존감이 드러났다. 자존심만 세고 자존감은 낮은 나와 달리 사고의 방향이 긍정적이고 자기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은 좋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만나지 말 걸 그랬다고 서러워하던 나는 쏙 들어가고, 그런 그의 모습에 인간으로서의 호기심이 더 크게 생겼던 것 같다.


그날 그곳에서 유일하게 찍은 닭 육회


하이볼을 한 네댓 잔 정도 마셨을 때, 가게 스피커에서 낯익은 곡이 들려왔다. 며칠 전 전화 통화에서 90년대에 좋아했던 J-POP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야기했던 곡이었다.


"이거 들으니까 가라오케 가고 싶다"

"그럼 이거 다 마시면 -"


우리 사귀는 거다, 

한국 영화에는 그런 대사가 있었지.


"가라오케 가서 노래 부를래?"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당일까지도 안 나올 것처럼 굴던 나는 지금 아카바네에 있다. 

낮술도 마셨고, 이제부터 가라오케에 갈 거다. 이상한 일이지. 굉장히 비일상적인 하루처럼 느껴진다. 가게 점원의 배웅을 뒤로하고 역 앞에서 본 가라오케로 막 향하려는데 갑자기 덥석 손을 잡혔다.


"엇? 뭐야 이거"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잡힌 손을 들어 보이는 내게 그는 말했다.


"말했잖아. 손잡고 걸어보자고."


손을 잡은 채, 그가 한 발짝 더 앞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어, 사람들이 보는데, 야, 어어, 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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