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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Feb 13. 2024

화수분 가장 밑바닥의 고백

우리 집 일본인 #11

일본인의 속내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친한 척 하다 뒤돌아 서면 서로 날을 세우던 회사 동료들, 카페 아르바이트 첫날 티스푼 내가는 걸 깜빡했더니 커피는 입도 안 댄 채 돈만 내고 나간 단골손님, 오늘 즐거웠다고 먼저 라인을 보내놓고도 나의 답장에는 두 번 다시 답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겪고 나서 얻은 결론이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고, 무엇이 그들을 수틀리게 만드는 폭탄 스위치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있다 뒤통수 맞은 기분이 드느니 차라리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는 게 충격이 덜해 항상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해두려고 했다. 자연스레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되었다.


이 사람과의 시간도 모를 일이지만 이번엔 용기를 내어 먼저 라인을 보냈다. 전철은 탔냐고, 오늘 정말 재미있었고 먼 길 가야 하니 잠들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라고.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즐거웠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음을.


잠시 후 그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조심히 가', '오늘 즐거웠어', '또 놀자', 했는데 그 '또 놀자'가 바로 다음 날인 오늘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제 버스에서도 그랬지만 오늘도 전철 안에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수십 번을 생각하며, 어젯밤 그가 집에 돌아간 뒤 걸려왔던 전화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전에 했던 이야기 말이야."

"뭐? 나한테 일본어 천천히 말하는 상사?"

"아니, 그거 말고."

"'아베노마스크'로 세금 줄줄 세는 거에 내 돈도 들어있는데 걸핏하면 세금도 안내는 조센징은 돌아가라고 인터넷 댓글이 억울하단 거?"

"아니, 그것도 말고. 전에 이야기했잖아, 만나고 난 다음에는 뭘 어쩔 거냐는 이야기."

"말했던가, 그런 거."

"그... 어때?"

"그래. 다음에도 가라오케 또 가자."

"사귀어 주세요."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 그가 갑작스럽게 본론을 말해왔다.


"갑자기? 나의 뭘 알고?"

"갑자기인가? 나는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너 나 한 번밖에 안 봤는데 뭘 믿고 사귀자는 거야? 장기판매범일 수도 있잖아."


'어떤 사람인지는 그간 이야기하면서 대체로 다 알았어. 같이 있으면 즐겁고'라며 미덥지 않은 대답을 해왔다.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거네?"

"좋아해."

"아니,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좋은 거냐고."

"말했잖아. 같이 있으면 그냥 좋다고."

"이유가 납득이 안되니까 기각."

"그럼 오타메시 (お試し, 트라이얼)로 사귀어 보는 건 어때?"

"오타메시 같은 소리 하네. 무슨 홈쇼핑이냐고."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한편 '어플에서 만난 남자'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는 지울 수 없었다. 사회통념상 일반적인 만남으로 취급되지 않는 방법으로 만났다는 이상한 죄악감에서 오는 갈등도 있었다. 좋은 사람이었고 나 역시 그와의 시간이 즐거웠지만 막상 사귀자는 말에는 ‘그래, 그럼 사귈까?'라고 쉽게 대답하기에는 껄끄러운 무언가가 있었다.


이 감정은 그를 만나기 전부터 줄곧 따라다니던 것이었다. 내 안의 유교걸은 '우린 어플에서 만났어. 2주간 대화하고 처음 만난 그날 사귀기로 했지' 주위에 이렇게 설명할 거냐고 아우성을 쳤다. 그의 교제신청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또 하나는 우리의 '나이'가 마음에 걸렸다. 시작과 동시에 연애의 종착지를 아니 생각할 수 없는 나이, 둘 다 비혼주의자는 아니었기에 괜히 어설픈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서로 발목만 잡거나, 좋지 않은 타이밍에 불필요한 상흔을 남길 수도 있으니 더더욱 신중해야 할 것 같았다. 사는 곳이 먼 것도, 서로 가족들이 납득할 만한 상대가 아닐 수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내가 가진 화수분은 어찌 된 일인지 금은보화가 아닌 고민만이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그의 애매한 대답과 불확실한 애정, 고민의 흔적 없는 듯한 고백은 그 덜떨어진 화수분을 틀어막을 마개가 되지 못했다. 


30대 중반 외국인 노동자에게 연애는 필수품이 아니다. 어차피 고립되어 살아온 타지 생활, 딱딱한 지반에 어떻게든 뿌리를 내려보려 안간힘을 쓰고 살아온 날들에 달콤함은 원래 없었다. 잠깐의 설렘이나 좀 더 가까운 관계의 누군가가 없어도 여전히 나는 씩씩하게 혼술을 하고, 시청에 전입신고를 하러 다니고, 웃고, 기뻐하고, 분개하고, 한숨을 쉬며 그렇게 살아가겠지.


우리의 관계는 나의 방황과 고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소하고 있는 지금의 랜선친구가 가장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사귀면? 그 다음은? 화수분 가장 밑바닥에 들어앉아있는 그의 고백이 오히려 나를 더욱더 번민하고 흔들리게 했다.


"솔직히 너는 내 타입이 아니야."


일일이 설명하면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아 일부러 가장 차갑고 뭉뚱그려진 이유로 뿌리쳤다. 나는 윤두준 (당시 드라마의 영향으로 제일 좋아하던 연예인이었다)이 좋다고. 그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참을성 좋게 기다리겠다고 했다.


"타입은 아니지만 싫은 건 아니라면 대답은 일단 보류인 걸로 하자. 좀 더 생각해 보고 말해줘. 기다릴 테니까."




다음 날, 눈이 떠진 것은 8시 좀 넘은 시각이었다.

스트레스로 2시간에 한 번꼴로 자다 깨다 해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매일이었는데, 그날은 오랜만에 깨지 않고 잤다. 창밖의 햇살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기분 좋은 아침, 침대에서 눈만 또록또록 굴리며 어제 일을 곱씹어 보았다. 아침인데도 축제가 끝난 뒤의 허전함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반나절을 함께 지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그가 보고 싶었다. 부정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끌림이었다.


사귀자는 말은 어영부영 흘려보내놓고 뻔뻔스럽지만 라인을 보냈다. 동네 구경하러 가도 되겠냐고 하니 그러라고 했다. 농담인 줄 아는 것 같았다.


'내가 못 갈 줄 알고 그러는 거지? 나 유언실행형 인간인데.'

'몇 시쯤 도착할 거 같은데?'

'지금부터 준비하면 1시 전에는 도착할 것 같아.'

'알았어. 그럼 기다릴게. 역 앞에서 봐.'


그는 오늘도 기다리겠다고 했다.




텅 빈 객차에 실려온 한낮의 시골역. 전철이 떠나자 역사는 이내 적막에 휩싸였다.


그가 고등학생 때까진 역무원이 상주하지 않는 무인역이었다던 낡고 인적 없는 역을 두리번거리며 개찰구를 찾았다. 계단 위 통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플랫폼으로 내려가야 개찰구에 닿을 수 있는 구조였다. 1시간 넘게 앉아있기만 하는 것도 괴로웠는데 갑자기 계단을 오르라니 너무 가혹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평소대로 빨리 걸으면 신나서 뛰어온 것 같을까봐 일부러 한 템포 느리게 걸어 개찰구로 향했다.


'핏-'


스이카(*IC 교통카드)에서 한 번에 1600엔이 빠져나갔다. 먼 거리를 달려온 실감이 난다. 개찰구 밖은 광장과 맞닿아 있었는데 마중 나온 이를 찾을 틈도 없이 검은 SUV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쑥스러운 인사를 나누고 조수석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며 '모르는 사람 차 타는 거 아니랬는데 어제 한번 본 사람은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 '안전벨트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안전한 선택이 될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한 번은 해봤으니 아주 정신이 나간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 차는 타지 마세요.'

유치원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배웠을 것인데 인간은 왜 머리가 굵어질수록 유년기의 소중한 가르침을 잊어가는 것일까.  


20대 초에 동네 편의점에서 시급 25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여느 때처럼 아침 7시 반, 논두렁 옆을 걸어 출근하던 어느 날, 웬 차가 클랙슨을 울리더니 내 곁에 멈춰 서고 차창을 내렸다. 40대 초반의 면식이 없는 여성은 내게 차를 태워주겠노라 했다.


유치원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한 번은 거절했지만 그녀의 기백에 눌려 결국 타고 말았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액셀을 밟는 그녀를 보고 역시 타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직진한 다음, 편의점 앞에서 내려주세요'라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순진하다 못해 멍청했다. (지금도 별 차이 없을지도 모른다)


운 좋게 차는 편의점 방향으로 달렸고 저기 내려달라고 용기를 쥐어짜 말하자 그녀는 순순히(?) 내려주었다. 그동안 출근하는 걸 보던 동네 주민이거나 손님이었겠지만 퇴근하고 엄마에게 말하니 제정신이냐고 타박을 들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모르는 사람 차에는 타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차를 태워준다고 한 적도 없었지만.


그런데 지금 나는 아는 사람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도 아닌, 어제 처음 만난 남자네 동네에 와서 그 사람 차에 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이 근처엔 아무것도 없어서 날씨도 좋으니 카루이자와에 갈까 하고. 가본 적 있어?"

"아니"


어제 처음 만난 남자가 사는 모르는 동네에 와서, 어제 처음 만난 남자가 모는 차를 타고 도쿄 우리 집에서 160킬로나 떨어진 나가노 현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 동네를 달리면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십 수년 전 어느 날의 아침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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