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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Feb 27. 2024

어디서 이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우리 집 일본인 #13

드라마는 무섭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은연중에 운명 같은 사랑,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꿈꾸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타인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일 같은 건 그렇게 간단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운명? 그런 게 정말 있다면 왜 모두에게 공평하게 설계되지 않은 것인가. 내 운명은 대체 왜 이 모양 이 꼴이고.


해가 갈수록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한때 죽고 못살던 친구들도 학년이 바뀌고, 서로를 둘러싼 세상이 달라지면 조금씩 소원해졌다. 우정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지만 더 빨리 식어버리는 사랑의 유효기간 -2년이랬던가- 은, 어째서인지 내 것만 항상 더 짧게 끝났다.


드라마 같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월요일, 익숙한 멜로디에 채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손만 베개 옆으로 뻗어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코 앞까지 들이대어야 겨우 보이는 핸드폰 화면에는 라인 통지도 하나 와 있다. 어제도 만난 그 남자의 '오하요'라는 아침인사였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지지부진 간을 보는 듯한 나의 태도에도 평소와 똑같은 아침인사를 보내왔다. 나도 언제나처럼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틈틈이 답장을 했다.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푹 잘 잤는지, 그런 어찌 됐든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몇 개 주고받다 내가 탄 지하철이 우치사이와이쵸(内幸町)역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도 회사에 도착해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욱여넣고 좁고 가파른 역 계단을 올라가면 아침해가 뿜어내는 따가운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가쁜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눈썹 근처에 손그늘을 만든 뒤, 무표정한 샐러리맨들이 가득한 거리에 섞여 들어가 다시 새로운 전철로 갈아타야 했다. 나의 일상은 언제나처럼 거기 있었다.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나의 시간은 다시 빠르게 일상의 모양으로 덧칠되어 갔다.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이던 주말의 감정선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잔잔한 파동으로 바뀌어 갔다. 차가 신호대기에 걸릴 때마다 답장을 하고 있다던 그가 어떤 표정을 띄우며 핸드폰을 만지고 있을지 상상이 간다는 점만이 평소와 다를 뿐이었다.


아침의 라인이 끝나면 점심에는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각자 타임카드를 찍고 나서야 '퇴근했다'라고 라인을 보냈다. 퇴근했다는 그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어제 갔던 공원에 가보겠다고 했다. 잃어버린 나의 이어커프는 그의 차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아니 그걸 어떻게 찾아. 괜찮아. 안 찾아도 돼.'


나는 내 것이 된 것에 집착이 있어 한번 손에 넣은 물건은 고장이 날 때까지 오래 쓰고 또 버리지도 못한다. 때문에 내 의지와 달리 무언가를 내 삶에서 놓치게 되었을 때  -설령 내 인생에서 0.01% 정도의 지분 밖에 차지하지 못한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그 상실감을 쉽게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너른 잔디밭에서 새끼손톱만 한 이어커프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서운하긴 하지만 어차피 500엔짜리였고 비슷한 것은 쉽게 다시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아지 산책 데려가는 김에 찾아보겠다는 그가, 혹시라도 정말 내 이어커프를 찾아와 준다면 어제의 그 라멘집을 포함해 온 우주가 우리를 붙여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 아니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다. 우주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그렇다. 이어커프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서 잃어버린 물건의 주인조차 기대하지 않는 것을 위해 너른 잔디밭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그 착한 사람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안 찾아도 된다 말하지 말고 오백엔 짜리 싸구려 액세서리고 이미 값어치만큼은 쓴 거라고, 그러니까 찾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걸.


그런데 내가 아직 집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 있을 때, 그에게서 '후후후' 하는 라인이 왔다.

혹시나 싶어 정말 찾았냐는 내 말에 그는 손수 사진까지 찍어 보냈다. 내 것이 틀림없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번 주말에 만날래? 줄게.'






잔디밭에서 주운 이어커프는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바닷가 모래알에서 진주 찾기', '가랑잎에 떨어진 좁쌀알 찾기'와도 같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의 성공신화와도 같이 느껴졌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닐터인데 나를 위해 기꺼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이 남자를 보는 나의 시선도 조금 달라졌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나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정의로운 척했지만 결국 속물에 지나지 않았던 나의 본모습'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지만 내게 100%의 남자는 아니었다. 키 180센티 이상, 연봉 800만 엔 이상, 이런 말도 안 되는 잣대로 사람을 고르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점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안 되는 이유를 안간힘을 쓰며 찾아대고 있었다. 어플에서 만났다거나,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을 잘 모르겠다거나, 일주일에 한두 번 밖에 만날 수 없는 거리감, 나이 같은 것도 어려운 부분이었지만 사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나보다 낮은 연봉, 그의 인중에 남은 어린 시절의 수술자국, 불의의 사고가 남긴 상처를 주위에 설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별 것 아니라면 별 것 아닌 것인데 그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의 따뜻함이나 올곧은 성품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를 받아들이려면 저속하고 그릇 작은 나를 뛰어넘어야 했다. 그럴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이어커프는 내 마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혹시나 하고 벤치 주변 기웃거리다 보니 거기 있더라'는 그의 말도, '오다 주웠다'같은, 고생해서 찾았다고 솔직히 말하기 부끄러워 부려보는 허세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날은 잔디밭에서 이어커프를 찾았다는 초유의 사태에 고무되어 맥주를 마시며 통화하는 내내 뭔가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호의를 베풂 받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고, 나를 좋아해서 그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가슴이 찡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남자는 그날 술에 취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조금만 더 잘난 사람이고, 네가 조금만 더 못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씁쓸하게 내뱉는 그의 한마디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있는 힘껏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그를 놓아버리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은 주저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내가 주는 상처를 덤덤히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눈치챘다.


그런데 그 말이 그렇게 아릿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의 추악한 생각들을 들키고 말았다는 부끄러움 보다도 이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는 뭐든 금방 포기하고 음지로 숨어버리는 나와는 근본부터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 큰 일을 겪고도 구김살 없이 살아가는 정신적인 건강함은, 겉으로는 밝은 척, 씩씩한 척하고 있지만 실상은 나약하고 무기력한 내게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런 그가 참 많이 부럽고 좋아 보였다. 그랬는데 내가 뭐라고 저 사람에게 그런 소릴 하게 만드는 것인가. 


내가 뭐라고. 겨우 나 따위가.


처음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너는 나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내가 뭐라고 그렇게 자신을 낮춰서 이야기하냐고, 외국어로 지껄이며 나 잘났다 하고 사니 착하고 순박한 너는 그대로 속아 넘어가 주고 있지만 내가 얼마만큼 덜 되어먹은 인간인지를 울먹이며 고백하는 사이, 가슴이 먹먹해져서 말을 채 잇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숨죽여 눈물을 흘리고, 전화기 건너편에서 그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도 들려왔다.


둘이서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다가 생각했다.

고작 나 정도의 인간을 위해 잔디밭을 뒤져 자그마한 귀걸이 하나를 찾아오려는 마음을 가져주는 사람을 내가 어디서 또 만날 수 있을까. 첫사랑 진행 중인 어린 학생들도 할까 말까 한,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함께 울어주는 이런 사람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이전에도, 앞으로도 이 사람 밖엔 없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쳐 눈물 콧물 다 질질 짜면서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우리, 만날까."

"응?"

"사귀자고, 그냥. 이젠 나도 모르겠다. 마음 가는 대로 하자."


겨우 닦은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12시를 넘겨 날짜는 4월 13일이 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게 돌아왔는데, 방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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