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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Mar 05. 2024

그런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우리 집 일본인 #14

저녁 9시쯤 시작된 전화는 새벽 1시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일단 진정하고 눈 좀 붙이자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티슈로 대충 훔치고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울었다 웃었다 하며 보낸 격정의 시간들은 다음 날 아침 '우리의 1일은 이야기가 시작된 4월 12일인가, 이야기가 끝난 4월 13일인가'를 정리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기쁨과 놀라움, 자기혐오와 절절함이 교차하던 눈물의 밤을 보낸 것 치고는 아주 재빠르게 캐주얼하고 세속적인 행동이었다.


인간이란.


퉁퉁 부은 눈은 안경으로 감추고 집을 나섰다. 사실 남들이 보기엔 '부었든 안 부었든 그게 그거인 그저 작고 소중한 실눈'이겠지만 눈가의 묘한 당김이 어제의 일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부터'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어제부터 1일이든, 오늘부터 1일이든, 교제의 시작점을 어디에 두었든 간에 우리 두 사람 관계에 붙은 이름표가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시작은 여기부터다라고 명확히 그어두고 시작하고 싶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랜선연애 비슷한 느낌을 털어내고 보다 현실적인 관계성 구축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이성적인 척을 하고 있지만 내 마음속의 간질간질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막 말랑말랑한 마음 어딘가에 붙은 따끈따끈한 '연애 중' 딱지를 보듬고 있는 것만으로도 항상 보아오던 매가리 없는 아침 풍경이 훨씬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온갖 만휘군상에도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지금 내 앞에 있는 다리 쭉 뻗고 자는 대머리 아저씨. 가뜩이나 짜증 나는 아침 출근길, 비좁은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 설 자리까지 하나 더 해 먹고 옴팡지게 코까지 고는 이 아저씨.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의 나는 분명 '이 사악한 대머리는 머리만 뜨문뜨문하지 양심에는 모발이 무성하다'며 마스크 안 쪽에서 입술을 달싹달싹 '시옷'하고 '비읍'해 악담을 퍼부었을 터인데, 오늘은 연민, 그저 연민이다. 어휴, 얼마나 피곤하시면 양심도 못 챙길 만큼 정신을 잃으시고. 어휴, 아휴, 에휴.


나이가 차면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 여기고 오히려 '왜 아무도 안 만나냐, 뭐라도 찍어 바르고 밖으로 나가라'며 질타하는 듯한 풍조가 싫었다. 사랑이니 연애니 그런 것들보다 나 한 몸 먹여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왜 다들 그렇게 연애를 강요할까. 


그랬던 내가 '아침 풍경이 선명하게' 어쩌고, '너그러워지는 기적' 저쩌고 하고 있다니.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로까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소중한 것'의 축이 아주 약간 옮겨져 가고 있는 것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간 타지에서 스스로를 기르기 위해 아둥바둥 매달리던 회사, 일, 거기 얽힌 인간관계, 그 외 잡다한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주는 자극들은 아무래도 좋게 느껴졌다. 


내가 조금 더 빨리 그 축을 내게로 옮기는 것에 성공했었더라면. 내가 올라선 시소의 반대편에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게끔 딱 알맞은 정도의 일과 인간관계만을 올려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지금보다 좀 더 날이 던 선 모습의 나로 일상을 보다 다채롭게 누릴 수 있었을 텐데.


후회는 하지만 괜찮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하고 처음 맞이하는 일요일 낮. 우리는 일주일 만에 다시 아카바네에서 만났다. 원래 이번 주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었다. 토요일은 과자무역상을 창업한 제자가 출점하는 이벤트에 응원을 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일요일은 오랜만에 집에서 푹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집 좋아하는 애들은 주말 이틀 중 최저 하루는 등에 침대를 발아시켜야 다음 주를 살아나갈 수 있다. 지난주는 얼떨결에 이틀 내내 그를 만났고, 그 후론 매일 두세 시간씩 전화통화를 하느라 잠을 설치는 강행군이 토요일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슬슬 에너지 고갈의 빨간 버튼이 점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만나게 되었다. 막상 일요일이 되자 그가 보고 싶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왔고, 나 역시 그와 만나고 싶었기에 한동안 나 몰라라 하던 방청소를 다시 한번 내팽개치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사귄다고는 해도 왕복 3시간 거리를 매일같이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만날 수 있을 때 만나두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집을 나서기 직전, 냉장고를 열고 차갑게 식은 아사히 슈퍼드라이 생맥주캔을 하나 꺼냈다. 발매되자마자 전국적인 품귀현상으로 좀처럼 구할 수 없던 전설 속의 맥주다. 어제 집 앞 마트에 갔다가 발견하고 두 캔 사다가 하나는 마시고 하나는 언젠가 그와 만나면 주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것이었다.






지난주와 같은 버스를 타고 아카바네 역으로 향하는 길.

불과 일주일 사이에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아, 내가 지금 어플에서 만난 사람을 만나러...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은 더 이상 없었다. 순수하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앉아 열린 창틈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봄바람을 느꼈다. 일요일 오후의 호수공원을 향해 유모차를 끌고 걷는 부부, 지팡이 짚고 산책 나온 할머니, 줄줄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네 꼬마들, 하나같이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저절로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역 앞, 장난 삼아 서로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한 뒤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왔다. 마치 데자뷔처럼. 일주일 전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여자치고 작지 않은 내 손조차 쏙 들어가는 그의 손은 여전히 크고 따뜻했으며 살짝 땀이 배어있었다.


"아, 미안. 땀 닿는 거 기분 나쁘지."


그는 자신의 재킷에 슥슥 손의 땀을 훔치더니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아직까지 긴장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겨우 세 번째 만났으니 아직 긴장을 탈 만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남자가 약간 귀엽게 느껴졌다. 우리는 조금 걷다가 한 타치노미야(立ち飲み屋, 서서 마시는 이자카야)로 들어갔다. 좁은 가게 안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걱정되고, 바깥은 꽤 따뜻했기에 바깥에 놓인 드럼통 같은 테이블에서 먹기로 했다. 맥주를 기다리는 사이 그가 생각났다는 듯이 가방 안주머니에서 내 이어커프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하룻밤 잔디밭에서 이슬을 맞고 왔는데 흠집 하나 없이 말짱했다. 또 잃어버릴까 봐 화장품 파우치 안에 고이 챙겨 넣고 그 김에 집에서 가져온 아사히 생맥주캔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어디서 이런 귀한 걸 구했냐며 송아지 같은 눈이 동그래졌다. 가져오길 잘했다.


우리는 그 가게에서 맥주와 하이볼 두어 잔을 마시고 가게를 옮겼다. 하시고 자케(梯子酒)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사다리 술, 한 칸 한 칸 옮겨 다니며 마시는 술을 의미한다. 아카바네는 작고 싼 선술집이 많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마시는 재미가 있다.


아무리 매일 긴 통화를 이어왔었다 해도, 이렇게 함께 있으면 새삼 서로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다는 걸 느낀다. 오늘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얼마간의 새로운 그를 발견했다. 그는 손에서 땀이 잘 나는 체질이고, 뭐든 순간적인 직감으로 고르는 나와 달리 뭘 먹고 마실지 주의 깊게 고민하는 사람이며 (아마 우유부단한 성격인 것 같아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만큼 긴장은 하지 않지만 아직도 약간 뚝딱거리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 대신 들어주기도 하고, 차도와 인도의 구별이 불분명한 길에서는 나를 건물 쪽으로 밀어 넣고 본인이 차도 가까이에 서서 걷는 사람이었다.


"리정혁 씨."


사랑의 불시착에서 본 리정혁 흉내라고, 설사 내가 못 알아볼까 봐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 가면서. 전화와 문자만으로는 알 수 없던 것들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워 내가 지레 그어둔 선을 넘지 않았더라면 채 몰랐을 그의 모습들.


지난 두 번의 만남에서와 달리 '나 사실 음식이나 풍경사진 찍는 거 좋아해'라고, 뭘 먹기 전에 음식 영정사진부터 찍는 나 역시 그에게는 '전화로는 알 수 없던 나' 일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만큼 더 '새로운 서로'를 발견하게 될까. 그리고 그 모습은 각자에게 어떤 인상으로 마음에 남게 될까.



그 날의 사진들

 





"어, 미안한테 꾸물대는 바람에 도저히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괜찮다면 우리 집에 와서 놀지 않을래?"


서로를 더 알게 될 계기는, 바로 그다음 주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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