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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an 19. 2024

송중기를 이긴 호기심

우리 집 일본인 #6

우선 고백하건대, 나는 특별한 용건이 없는 사람, 그럴만한 유대감이 아직 구축되지 않은 사람과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내 할 일 하면서 보낼 수 있는 메시지와 달리 내 시간을 통째로 저당 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5시 정각에 퇴근해도 집에 오면 7시 반, 씻고 저녁 준비하면 뭐 한 것도 없이 9시다. 12시 이전에 반드시 잠들지 않으면 체력이 버텨나지 않는 신데렐라 회사원에게 있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메시지뿐이라면 드라마의 다음 장면을 계속해서 이어볼 수 있지만, 전화가 되면 송중기를 끊어내야 한다. 참을 수 있겠냐고.


게다가 용건도 없이 '그냥 해보는 전화'는 별 내용도 없이 길어지기 마련이고 상대방이 걸어온 전화라면 내 쪽에서 끊기도 어렵다. 아주 곤란하다.


그가 전화 통화를 하자 한 그때, 내 얼굴에는 때아닌 마스크 팩이 붙어있었고 눈으로는 송중기를 쫓고 있었다.


그와 메시지를 나누면서도 내 방에는 드라마 '빈센조'가 틀어져 있었다. 겨우 금가플라자 사람들이 조금 덜 짜증 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전에도 금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손을 놓았던 드라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드라마도 재밌어지고 금가 사람들도 귀엽게 보인다던데. 이제 거의 다 온 모양이다. 드라마를 보다 흘끗 옆에 놓인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그냥 내가 아닌, 쓰레기 같은 내가 들어앉아 있었다. 금토일 삼연휴 중 후반 이틀은 술만 진탕 마시고 있었으니 확실한 원인이 있는 명백한 결과다. 내일 있을 출근을 위해 급히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실시한 얄팍한 응급처치, 그것이 마스크 팩이었다.


그러면서도 송중기는 놓을 수 없었다.






빅데이터를 빠져나가는 기적의 남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 일본 남자는 성미가 급했다.

라인 아이디 교환도, 국적을 밝히는 것도 벌써 다 했는데, 이건 내 기준으로 이제까지 없었던 초고속 광폭행보다. 하지만 전화까지 하자니. 오늘은 한번 끊는 것이 좋겠다. 얼굴의 팩도 아직 덜 말랐고, 드라마도 꽤 중요한 장면이니까.


무엇보다도 모르는 사람과 처음 전화할 때의 그 긴장감-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일요일의 끝자락, 아직 나 할 일도 남아있는 시간에 그것들을 미뤄두고서까지 그 묘한 긴장감을 맛보고 싶진 않았다.  


거기다 전화통화를 하려면 상대방 이야기도 잘 들어야 하고 (기력소모)

적당히 리액션도 해야 하고 (기력소모)

밝게 텐션도 끌어올려야 하고 (기력소모)


그냥도 월요일 생각만 하면 기운이 쭉 빠지는데 굳이.


하지만 오늘의 나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어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어떠한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나를 '요래요래' 조종 중이거나. 전화는 무슨, 이라 생각했는데 내 손은 '그럼 팩 떼고 올 테니 기다려 달라'라고 답신을 보냈다.


자린고비에게는 '지금 막 뜯은 것'과도 같은 덜 마른 팩을, 이제 막 재밌어지려는 드라마를, 그 잘생긴 송중기를,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야기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이겨버리고 말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이지,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는 것도 모른 채,  그는 내가 무슨 수건이라도 뒤집어쓰고 있는 걸 상상했는지 '그럼 이제까지 얼굴 막힌 채로 라인 했던 거야?'라며 화면에 www (*한국의 ㅋㅋㅋ와 같은 것)를 연신 띄워댔다.


아아, 평소 같으면 체온으로 따뜻하게 달궈질 때까지 붙이고 있었을 팩인데. 아까워하면서도 팩을 뗀 자리에 화장수와 로션을 발랐다. 그냥 부직포 쪼가리가 되어버린 팩은 목에, 팔에 벅벅 문질러 남은 에센스 한 방울까지 최대한 쥐어짜 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

'팩 다 뗐어?'

'어, 스킨케어까지 했어'

'여자냐고 www'

'여자라고 www'

'아, 그렇구나'

'실례다, 이 녀석'


얼마간은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혼 운운 하는 조크는 하면서도 사실상 이성적 텐션은 없는 이런 장난스러운 대화가 좋았다. 친구 같고.


'전화 걸게'


곧 라인의 착신 음이 들려왔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려?"


이어폰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차분한 중저음이었다.






가끔가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전화하자 해놓고 막상 전화를 하면 대화를 리드하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 그럼 침묵이 고통스러운 나는 나의 낯가림 따윈 던져버리고 또 무슨 유재석이라도 빙의된 거마냥 내 쪽에서 화제를 발굴하고, 질문하고, 맞장구를 치게 되는데, 연금술이 만들어낸 나의 유재석은 나 자신의 정신력과 등가교환된 것이라 전화를 끊고 나면 마음이 아주 헛헛하고 기력이 쭉 빨려나간 기분이 든다.


저가 하자던 일본인도 안 하는 걸, 왜 외국어 화자인 내가 이토록 열심히.

진짜 아는 사람도 아닌데 그냥 콱 끊어버릴걸.


다행히 그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다만, 상상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목소리와 성격의 상관관계는 불분명하다지만, 대화 속에서 드러난 성격으로 보아 아마 이런 목소리가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상상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그는 내가 일부러 하는 보케 (ボケ, 만자이(일본식 만담)에서 멍텅구리같이 구는 역할, 또는 말)에 타이밍 좋게 츳코미 (ツッコミ, 보케의 언동에 딴지를 걸거나 지적을 하는 역할, 또는 말)를 넣곤 했다. 답장 속도도 빠르고 유머러스한 걸 보면 머리 회전이 빠른 수다쟁이 스타일, 그래서 목소리도 가볍고 높은 톤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고, 좀 더 차분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 그는 모르는 한국 사람이랑 갑자기 전화까지 하고 있는 지금 (본인이 부른 화(?)이지만) 상황이 약간 부끄러운 것인지, 목소리에 웃음기도 섞여있었다. 웃기냐, 나도 웃기다.


그렇게 서로 간단한 인사를 하고, 하는 일, 사는 동네 이야기, 가족관계, 강아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전화하는 내내, 그는 한번도 '한국은 어때?' 같은 이야기를 묻지 않았으며, 독도는 일본땅이라 우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 그대로의 나를 보아주는 사람과 이야기 한 것 같았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 이만 자자고 전화를 끊고서도 아쉬움에 라인을 더 나누다 다시 15분 동안 전화통화를 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음 날도, 다다음날도, 그러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매일 라인과 전화를 계속하게 되었다.


화제도 대중없었다. 회사에서 화났던 일(거의 내가)부터 시작해, 넷플릭스에서 최근에 본 드라마,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안주, 각자의 정치관, 이성관, 과거의 연애, 휴일을 보내는 방법, 주로 돈을 쓰는 곳, 등등. 이야기가 잘도 퐁퐁 튀어나온다 싶을 정도로 끊기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것이, 마치 신데렐라 맛 세헤라자데가 된 것 같았다.


앗, 12시가 가까워진다. 자야 하니까 다음 이야기는 내일 이 시간에.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그가 물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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