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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an 16. 2024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 일본남자

우리 집 일본인 #5

대학생이 되고 맨 처음 들은 수업은  '일본 영화의 이해'였다. 교수님은 학생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수업이라 월요일 첫 수업치고 마음도 가벼워서 좋았다.


18년 전 그 수업 첫 시간에 본 영화-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하지만-는 재일교포 3세의 고뇌를 그린 'GO'였다. 그때까지는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는 재일교포가 어떤 괴로움에 직면해 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기특한 우리 동포라고만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주인공 스기하라가 일본인 여자친구에게 한국인임을 밝히는 씬이었다. 여자친구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아버지가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피가 더럽다고 했다'며 그를 거부했다. 실망한 스기하라는 자신의 성이 리(李), 브루스 리의 리와 같다고 밝히며 너무 외국인 같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고백한다.  


이 영화가 개봉된 시기는 겨울연가가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하고, 일본인 취객을 구하러 선로에 뛰어든 한국인 유학생의 비보에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 내부의 시선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때였다. 그렇다 해서 지금처럼 도쿄의 코리안타운에 여고생이 몰려들고, (철없는 발언이다 치더라손) 한국인이 되고 싶다 말하는 그런 시대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고향도 도쿄냐'는 질문에 일본인이 아님을 전하는 나의 모습에서 18년 전 그 영화, 그 장면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아주 많이 변했다. 한국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 하듯, 쉬이 '아버지가 한국인은 피가 더럽다 하셨어' 같은 소리를 내뱉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나'로 인식될 수 있을까?

시대는 바뀐 듯, 바뀌지 않았다.




그동안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은 나를 신기해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사투리 비슷한 딱딱한 억양이었지만 일본어로 듣고 말하는데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고, 한국어 표현과 정서를 기본으로 하는 나의 말들은 여성성과 절제를 강요당하는 같은 일본 여성들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성적인 호감은 아닐지언정 동물원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영장목 사람속 사람 한국인'을 보고 '헤에, 저런 것도 있네'하는 느낌인 것은 확실했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아이덴티티 중 그 어떤 것도 좀처럼 '한국인'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내가 외국인임을 입술로 고백하는 순간, 하늘에서 철벽 같은 것이 뚝 떨어져 내려왔다. 신기하고 유니크한 한국인 이외에, 섬세하고 게으른데 의외로 집요하고 지적이며 호탕한데 때론 사랑스러운 여러 나를 보여줄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철벽 너머의 상대방은 한국인 이외의 나는 이미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봇' 또는 '예외인간'이 되어갔다.


때문에 나이 먹을 거 다 먹고 온 일본에서 뒤늦게 정체성의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는 둘러싼 환경이 너무 많이 달라져 버렸고, 일본에서는 ‘결국은 이방인’이라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왜 스스로 외로워지는 길을 선택해 왔을까? 왜 이렇게 되었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나는 대체 뭐지?


그래서 (그게 어플이든 아니든) 새로 만난 이에게 국적을 밝히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잘 통한다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더더욱. 모처럼 만난 괜찮은 사람을 더 알아보기도 전에 잃을 수도 있다는 각오도 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덜 상처받으니까.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나 사실 일본인 아니야'


나의 고백에 그는 과연 뭐라고 대답해 올까.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그는 천연덕스럽게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며, 혹시 자이니치 (*재일교포)냐 물었다. 조금 놀라웠다. 본인이 그렇거나, 지인 중에 있거나, 어딘가의 웹 사이트에 '자이니치는 조선으로 돌아가라'를 복사-붙여넣기하고 있는 우익분자가 아니고서야 보통의 일본인이 갑자기 '자이니치'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티 나게 틀린 일본어 문장이 없는데 일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혹시 일본에서 나고 자랐나 생각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늘 나는 영화 'GO'를 떠올리지 않았었는가. 마음을 읽힌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그냥 한국인이야'

'그냥?'

'한국에서 나고 자란 그냥 한국인'

'그렇구나'


뭐가 그렇다는 것일까. 일본인의 맞장구는 버튼 누르면 자동으로 찌익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진심으로 '아, 그렇구나' 할 때도 있지만, 이대로 페이드아웃 하기 위한 대화 줄이기 태세에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우익분자일 가능성도 제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찌 리액션하면 좋을지 몰라, 토끼가 고개를 끄덕이는 스탬프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후 그는 더 말을 잇지도 않고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예전에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밝히자, 뜬금없이 북에 계신 그 분 사진을 보내온 이가 있었다.

한국인이라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고 이야가라세 (嫌がらせ, 일부러 상대방이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는 것)로 보내온 것이다. 나의 좋은 기억력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만약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번에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실망스럽긴 매한가지지만.


핸드폰 화면에 뜬 통지버튼을 눌러 라인으로 들어갔다.


그가 보내온 것은 웬 강아지 사진이었다.


갑자기 왜, 무슨 의도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어린 티가 감도는 강아지 한 마리가 눈을 꼬옥 감고 단잠에 폭 빠져있는 것이 귀엽긴 했다. 얘는 누구냐 물으니 ‘우리 집 완전 귀여운 강아지'라 했다.


그야 귀엽긴 하다만.

약간 우리 한국 집 강아지들도 닮긴 했다만.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사고체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비밀 아닌 비밀을, 나름 의미심장하게 전달했다. 그런데 그렇구나 한마디 하고 뜬금없이 자기네 집 강아지 사진을 보내 자랑하는 사람. 얘 사료값 벌어야 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뿌듯해했다. 어플에서 대화할 때는 이렇게 종횡무진하지 않았는데 원래 이렇게 다른 사람 말은 대충 넘겨 듣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타입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그런 반응을 보아하건대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은 이 남자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로 인식되기 이전에 외국인 레테르가 먼저 붙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조금 안심감이 들어 한국 집에는 스피츠가 다섯 마리나 있고 지금은 혼자 살아 강아지를 키울 여건이 되지 않지만 장래에 집이 넓어지고, 강아지를 돌볼 가족이 생기면 데려와서 기르고 싶다고 했다.


'그럼 다음 달 즈음에는 결혼할까? 강아지도 길러야 하니까'

'강아지 때문에 결혼한다고?'

'아니 뭐, 그건 결혼을 결정하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로 치고'


세간의 눈으로 보면 혼기를 훌쩍 넘기고도 자기 가정을 갖지 않은, 뭔가 좀 사연이 있지 않을까 싶을 애들끼리 결혼결혼 자조 섞인 농담을 하는 것도 골계미가 느껴졌고, 한번 말했던 소재를 다시 한번 가져오는 스타일도 싫지 않았다. 개그콘서트가 한창 잘 나갈 때도 난 그게 제일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일본남자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그래서 이 사람과는 좀 더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혹시 지금 졸리지 않냐고 물어왔다.


'안 졸리면 전화하지 않을래요? 시간만 괜찮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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