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람 Jan 09. 2024

나 사실 일본인 아니라는 고백

우리 집 일본인 #4

대화는 서로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캐치볼과도 같다. 질문과 대답, 적절한 공감과 리액션을 밸런스 좋게 주고받으며 상대에게 나를 알리고 나 역시 상대를 알아가기 위한 정보를 얻는다. 


채팅 어플에서도 마찬가지다. 얼굴을 마주하고 하는 대화는 아니지만 답장 내용이나 길이, 답장에 걸리기까지의 텀과 적절한 반응이 그 사람에 대한 사실적 정보는 물론이고, 그 사람에게 내재된 가치관과 성향을 파악하는 열쇠가 된다.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초반에는 프로필 이외에는 서로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기 때문에, 주로 어느 지역에 사냐, 고향은 어디냐, 이런 이야기부터 풀어나간다. 도쿄에는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어디 출신이냐고 가볍게 물어보고 혹시라도 동향 사람이면 반가워하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면 되고, 그게 아니더라도 '아 거기 뭐뭐로 유명하죠' '어디 어디 가봤어?'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화제의 실마리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쓰는 어플 안에서 내게 '고향은 어디냐'란 질문은 어딘지 모르게 좀 껄끄러운 것이었다. 


내 고향은 서울이니까.






'일본인들은 친절하다'라는 대외적인 인식과 달리, 일본 사회는 외국인에게 냉정하다.

집을 구하러 부동산에 가면 집주인에게 전화해 '지금 어디 나라 국적, 몇 살, 성별은 무엇인 외국인 분이 입주를 희망하고 계신데 입주심사 신청해도 괜찮을까요?'라고 일일이 확인을 하고, 그 과정에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는 경우도 허다하다. 줄을 무시하고 새치기하는 사람이 딱히 말소리를 낸 것도 아닌데 뒤에서 '하여튼 외국인은'이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전철 안에서 핸드폰으로 한국 사이트를 보고 있던 한국인 여성이 옆자리 모르는 아줌마에게 시비가 털렸다는 일화도 이곳 커뮤니티에선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일본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 밑도 끝도 없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한때는 싫으면 시집가...가 아니고, 싫은 사람이 알아서 피하라고 프로필에 한국인임을 적어놓았던 적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르는 사람에게서 이런 메시지가 왔다.


'일본이 침몰선 구조에 병력을 보내려 했는데 한국 측에 거절당했습니다. 너무해요. 한국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를 봐야 합니다'


아아, 정말 너무 한 건 뜬금포로 이런 메시지를 받아야 하는 이 현실이 너무해요다. 그 이후, 프로필에서 한국인이라는 글자를 지우고 불특정 다수에게 내 국적을 명시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한국인임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메시지 테러를 받을 원인을 제공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저 자에게는 티브이에서 떠드는 말만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결괏값 앞에 놓여있을 원인이란 것에 대해서도 조사해 볼 것과, 본인의 미래를 위해서도 본인의 지금 이 행동이 얼마큼 무례한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걸 밝히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말을 걸어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본어 잘하네요'라고 첫인사를 보내오는데, 프로필 고작 몇 줄 읽고 일본어 잘한다는 소리 하는 게 듣기 거북했고 (네가 나의 뭘 알아? 같은 심정이랄까), 그런 사람들 중에는 상대방이 한국인이라고 '한국에서도 뭐뭐 해?' '한국은 어때?' 같은 식의 한국 관련 질문 공세를 퍼붓는 부류도 있었는데, 마치 '내'가 아닌 '한국인 대답봇'을 원하는 듯한 지리멸렬한 대화가 싫었다. 


나는 캐치볼이 하고 싶었다. 

일방적인 투구연습 말고.


생각해 보니 나도 참 깐깐한 사람이네.






당시 어플에 설정된 나의 이름은 「社員マスカット(샤인 마스캇토)」였다. 

그 달고 맛있는 포도, 샤인 머스캣. 일본식으로 읽으면「シャインマスカット(샤인 마스캇토)」인데, 일본어로 사원(社員)의 발음이 샤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가타가나를 한자로 치환한, 일종의 말장난이었다.


때문에 나의 정교한 빅데이터를 운 좋게 빗겨나갈 수 있었던 그 남자도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진짜 이름은 뭐냐고 물어보았을 때에는 경계심으로 '케이'라고 둘러댔다. 케이는 일본에도 있는 이름이기 때문에 도쿄 어딘가에 살고 있는 일본인 1,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케이는 김 씨의 K였지만 일부러 설명하지 않는 이상 그런 걸 알리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그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고 말았지만, 애초에 한국인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에게 본명 -너무나도 외국인임이 확연히 드러나는-이 쓰여있는 라인 아이디를 가르쳐 주는 일도 없었다. 그래도 라인 아이디를 가르쳐 준 직후, 내가 나를 '케이'라 소개했던 것이 생각나 허겁지겁 이름을 K로 바꾸어 두었는데, 대화를 나누던 도중 그 사람이「地元も東京? (고향도 도쿄?)」라고 물어봤을 때, 결단을 내릴 순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는 자기 이야기를 꽤나 솔직하게 홀랑홀랑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답장에 머뭇거림이 없고 내가 던진 공을 금방 받아 바로 돌려주었다.


굉장히 한가한 사람 같지만, 

대화 상대로서의 나를 약간은 신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이 대화를 무척 즐거워하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고향이 어디냐 물어보았을 때, 이름을 케이라고 대답했을 때처럼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었다. 

그냥 '응' 하면 끝날 일이고 '비밀♪'같이 장난스럽게 흘려 넘겨도 될 이야기였다. 


하지만 언페어 하다고 생각했다. 캐치볼을 하자고 해놓고 이쪽은 몰래 배팅머신을 써서 공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달까. 이제까지 그런 언페어 한 대화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사람에게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당신과 같은 일본인이 아닌, 사실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대화를 종료시키는 최후의 방아쇠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모르고 있었지만 실은 한국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외국인임을 숨기고 이야기하던 내게 불신감이나 이질감을 가질 수도 있다. 언페어 운운하는 결벽만 버리면, 이 재미있는 시간은 조금 더 길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고향? 서울이야'라고 대답했을 때 이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사람과의 대화는 그래도 계속될까?

언젠가는 밝혀질 수도 있는 일, 나 사실 일본인이 아니라는 고백으로 대화가 단절되어 버린다면, 그건 그거야 말로 '여기까지'였었던 것이 아닐까. 


작은 결심과 함께 내 손가락이 핸드폰 화면 위의 자판을 토도독 두드려 나갔다.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응?'


'나 사실 일본인 아니야' 


이전 03화 빅데이터를 빠져나가는 남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