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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an 02. 2024

빅데이터를 빠져나가는 남자

우리 집 일본인 #3

그는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벚꽃 사진에 반응한 사람이었다.


「お花見行きましたか? (꽃구경 다녀왔어요?)」


사진을 통해 하고 싶은 말에 반응을 해준 것이 기뻐, 어제 갔던 우에노 공원 이야기를 했다. 사람 반 비둘기 반이었다, 비둘기도 사람 오는 거 기다린 거 아니냐, 밥 주는 기계들 요즘 영 안 온다 하면서? 맞아 맞아 비둘기 완전 자기 마음대로지, 공원의 야쿠자야, 이런 비둘기 이야기로 시답잖은 대화를 얼마간 나누다 그날은 그걸로 답장이 끊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한참을 떠들다가도 뭔가 '아니다' 싶은 것이 있거나, 동시진행으로 여러 명과 대화하다 제일 재미있는 상대와의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대화가 뚝 끊기는 일은 어플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다.


길고 지루한 주말. 번아웃이 오기 전이었다면 일이라도 했을 텐데 그러고 싶지도 않은, 그러나 딱히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도 몰라 멍하니 있다 보면 주중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오갔던 말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울분을 가라앉히려 술을 마시고 한국 드라마나 버라이어티를 보며 현실을 잊으려 했다. 그런 우울한 주말에 모처럼 얻은 말상대였는데 대화가 끊겨 아쉽다는 생각은 잠깐 했지만, '뭐 해?' '??' 같은 구질구질한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다.


가벼운 잡담어플에서 스쳐가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지도 오래다.

어차피 거기까지였나 보지.

개의치 않고 나는 나 할 일을 했다.  


당시 개의치 않고 한 일 : 모닝 주지육림 (당시의 나는 낮이고 밤이고를 따지지 않았다)


어제의 그 사람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안녕! 잠들었었어요'


새로운 타입의 개풀 뜯어먹는 소리였다.


전날 오전에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다음 날 아침에 '어젠 잠들었었다'라며 다시 메시지를 보내오다니, 무슨 잠자는 숲 속의 공주도 아니고 하루를 꼬박 잠들어 있지는 않았을 텐데 되지도 않는 변명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는 게 영 뻔뻔스러웠다. 성의조차 없어 보인달까.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다가 까였나 보지?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이것이었다.




어플을 하며 일정량의 데이터가 쌓이고 나면 이야기상대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시스템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금방 사진이나 라인 아이디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웃 (그들의 목적은 애초에 대화에 있지 않다)

카카오톡을 교환하자는 사람은 아웃 (일본에서는 라인이 주류이기 때문에,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의 경우 실제 지인들과는 라인을 쓰고, 어플로 만난 사람과는 무슨 일 있으면 탈퇴하기 쉽도록 카카오톡으로 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조금이라도 성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아웃 (투명하다, 투명해)


이러한 나의 빅데이터에 의하면, 대화 중간에 텀이 생기는 사람이과는 결국 대화가 지속되지 않는다.


단순히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만 하루의 블랭크는 나 말고 더 매력적인 상대와 이야기하는데 열중하던 시간일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그러다 상대에게 차이고 나니 어제 그 꽃구경 여자가 생각나 다시 말을 걸어보았지만 어차피 이 순위는 계속해서 이 순위, 더 좋은 사람이 생기면 간단히 잊혀진다.


어쩌면 처자식 눈을 피해 놀아보려던 유부남이 가족 서비스에 열심이던 시간일 수도 있다. 아내와 아이가 잠들어 있는 아침 시간을 틈타 답장을 시도하면서, 가정이 있다곤 할 수 없으니 잠들었었다고 얼버무리려는 것이겠지. 이런 경우, 답장은 항상 정해진 시간대에만 돌아올 것이고, 아무리 날 잘 속인다 해도 박자 좋게 흘러가지 않는 대화의 텐션은 점점 더 떨어질 것이다. 유부남이라는 게 밝혀지면 그건 그 순간 끝이고.


어느 쪽일까? 이 사람은. 

어느 쪽이든 길게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긴 통근시간과 만원 전철에 시달려 성질이 개복치가 되어버린 나는, 평소대로라면 여기서 읽고 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푹 쉬고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그랬는지, 어디까지 하나 어디 한번 봐보자 싶었는지, ‘어차피 금방 또 끊어지겠지' 하면서도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예상과는 달리 이번에는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하루종일 이어진 대화에서 그의 닉네임은 본명이었고, 나보다 2살 어린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지만) 미혼에 술과 강아지를 좋아한다는 것, 도쿄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별 기대 없이 이야기를 이어간 것에 비해 개그코드가 잘 맞아 그와의 티키타카는 꽤 즐거웠다. 아침에만 해도 '뭐야, 얜' 싶었는데 몇 시간 뒤에는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으로 아쿠아팟차에 와인까지 곁들여 마시며 하루 종일 약간의 취기 어린 장난스러운 메시지를 이어나갔다.  


'죽이 척척 맞는데 그냥 이쯤에서 타협하고 결혼할래?'

'그래. 내일 구청 앞에서 집합'

'라인 아이디 알려줘'


나이 먹은 자들만이 가볍게 할 수 있는 결혼 드립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그는 뜬금없이 라인 아이디를 물어왔다. 수년간 쌓아온 나의 견고한 빅데이터에 의하면 '대화를 시작한 당일, 금방 라인을 묻는 사람에게는 라인 아이디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다'가 정답이었지만, 나는 웬일로 하루에 두 번이나 평소와는 다른 선택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한 가지 잊고 있던 것이 있었다.


나는 나의 빅데이터를 빠져나가는 남자에게 내 이름을 ‘케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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