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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Dec 19. 2023

도쿄에서 일합니다.

우리 집 일본인 #1

2021년 4월 10일 토요일 13시 15분.  

나는 JR아카바네 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 있었다.


막 벚꽃이 진,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차가운 공기가 불어오는 계절이었는데 오랜만에 공들인 메이크업에 마스크까지 얹고 나니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한낮의 햇볕은 뜨거웠다.  


버스는 야속하게도 그늘 한 점 없는 양지바른 도로로만 달렸다. 아, 안돼. 모처럼 찍어 바르고 나왔는데 땀으로 다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손에 든 손수건을 펄럭여 작은 바람을 일으켜 보았지만 더위를 식히기에는 택도 없었다.


버스 안은 부카츠(部活, 부 활동)를 끝내고 돌아가는 듯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중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저마다 상기된 얼굴로 즐거운 듯 재잘거리고 있었는데, 나는 꼭 버스 안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그날, 채팅 어플에서 알게 된 한 남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2주 전, 그날은 유급휴가였다.


그간 유일하게 휴가를 털어쓰던 한국에도 갈 수 없게 되었고, 직장에서 코로나 감염자가 나올 때마다 시시각각 변경되는 일정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2월 말이 되니 3월 중에 반드시 하루 쉬라는 지시가 왔다. 1년에 최소 5일의 유급휴가를 사용하지 않으면 기업이 과태료를 물어야 하는 법 때문이다.


어휴, 나도 그러려던 참이었다고. 근데 부려먹을 땐 다 부려먹고 이제 와서 쉬라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일본어로 '말이야, 방구야'를 표현하기 어려워 그냥 알았다고 했다. 3월 말이면 급한 건도 일단락되고 벚꽃도 피었겠지. 그렇게 3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유급휴가를 냈고 벚꽃을 보러 우에노로 향했다.


누군가를 만날 약속도 없는 휴일 오전에, 그것도 자발적으로 집을 나서다니 나로서는 매우 드문 행적이었다. 출근길 양복 아저씨들 사이에 끼어 숨만 겨우 붙어가던 만원 전철도 러시아워가 지나니 빈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한산했다.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마음속으로 손가락을 꼽아가며 일, 이, 삼, 사, 헤아려 보았다. 학생 때 왔던 워킹홀리데이를 빼고서도, 며칠 있으면 일본에 온 지 딱 9년을 채우고 10년 차에 들어선다. 짧지 않은 시간, 조금 있으면 영주권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게 된다. 


'잘도 버텼네.'




'외국에서 일한다'라고 하면, 울림은 꽤 근사하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폐쇄적인 일본사회, 특히 지금 직장에서는 '마이너리티 삼종 세트'같은 인물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암암리적인 차별의식이 강하고 여성인권이 낮은 일본에서, 외국인에, 여자, 게다가 가족도 없는 나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였다. 저평가되기 일쑤였고 위로 올라갈 찬스는 더 적게 주어졌다.


'이래서 외국인은' 소리가 듣기 싫어 회사에서 사주지 않은 내 시간을 쪼개 업무를 보고, 그 많던 취미도 버려가며 안 되는 일도 되게 해왔지만, 그럴수록 주어지는 것은 소모감 뿐이었다. 부당한 대우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면 한국 여자는 드세고 일본사회를 잘 모른다고 했다.


모르긴 개뿔, 그럼 얼마나 알아야 아는 건데. 

회의감만 짙어졌다.


차라리 일 말고 연애에 사활이라도 걸 걸 그랬나. 적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믿어주고 아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이 파삭파삭하게 말라비틀어져 가는 마음이 조금은 더 길게 버텨줄 수 있지 않았을까. 회사 나가면 그 길로 끝일, 그런 '일' 따위 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전철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날의 우에노


우에노는 속된 말로 내 '나와바리'였다. 그 일대에서 5년을 살았고, 회사를 6년 다녔다. 회식을 하는 것도, 친구와 만나던 것도 다 우에노였다. 그래서 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휴가'를 추억이 꽉꽉 들어찬 우에노를 걸으며 좋았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하루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선 예전처럼 벚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맥주라도 한 캔 따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편의점 커피만 하나 사 들고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 주변을 천천히 걷기로 했다. 공원 쪽으로 올라가면 너무 많이 걸어야 하니 이 근처를 한 바퀴 빙 돌고 나면 점심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벚꽃은 딱 좋을 정도로 만개해 있었다. 평일인데 사람도 많고, 딱 그만큼 비둘기도 많았다. 사람 반 비둘기 반. 그런데 비둘기, 보통은 사람이 다가가면 후다닥 도망가기 바쁘지 않나? 우에노의 이 작은 야쿠자들은 도망은커녕 사람이 벤치에 앉으면 뭐 삥 좀 뜯을 거 없나 약속이라도 한 듯 우르르 몰려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오는 악의 그림자에 가슴을 졸이며 자리를 뜨는 것은 항상 만물의 영장인 내 쪽이었다. 아아, 그 누가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이라 하였는가.


그래도 이날은 하늘도 벚꽃도 정말 예뻤다. 그렇게 실컷 풍경을 즐기고, 마루이 백화점의 잡화점에 들어가 혼자 사는 집에 더는 필요치 않은 예쁘고 비실용적인 (그러나 예쁘긴 정말 예쁜) 식기도 구경하면서 오랜만에 휴일다운 휴일을 보냈다. 얇게 튀긴 한국 분식집 같은 돈가스를 점심으로 먹고, 오랜만의 마사지로 경직된 근육을 풀고, 도쿄돔 시티 맞은편에 있는 사이제리야(*패밀리 레스토랑 체인. 나는 평소 이자카야 대용으로 이용하고 있다.)에서 와인도 마셨다.


나이 먹은 처자 혼자 청승맞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난 이런 즉흥적인 내 페이스와 기분 따라 유유자적하게 노는 걸 좋아한다. 이것도 얼마만인가. 별점을 붙인다면, 4.5 정도는 줄 수 있는 하루였다.


그날 저녁.

하루 종일 찍은 사진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다가 어플 프로필 사진을 제일 잘 찍힌 벚꽃 사진으로 바꿔두었다.


이 사진 한 장을 시작으로 나의 윤기 없고 빛바랜 일상에 잔잔한 물결이 일기 시작할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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