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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Dec 26. 2023

채팅 어플의 득과 실

우리 집 일본인 #2

지금도 이렇게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SNS를 꽤 좋아한다. 직접 만나서 밥을 먹고 수다를 떨지 않아도, 랜선 너머의 온기가 있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종종 채팅 어플로 말상대를 찾곤 했다. 지루한 통근시간, 집에 와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 밖에 나가 누군가를 만날 에너지조차 없는 길고 긴 주말. (그 시간에 영어 공부를 했으면 지금쯤이면 꽤 괜찮은 영어 실력을 가지게 되었을 텐데) 혼자 덩그러니 있는 우울한 시간을 잊게 해 줄 유희가 필요했다.


어플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페루 쿼터 대학생, 은행 시스템 엔지니어, 재일교포 청년농부, 자동차 메이커 연구원, 마술용품 가게 직원, 디스플레이 생산기술자, 파견회사 영업사원, 물리치료사...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내가 모르는 세상 이야기 듣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귀동냥으로 들은 업계생리는 외국인 유학생의 취업지도를 하던 내 일에도 약간 도움이 될 때도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랑 채팅이나 하며 시간 죽이고 있는 한심한 나'에 대한 면죄부가 되기도 했다.


3년 전에 다니던 전회사에서 담당했던 클라이언트를 어플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사진이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직업이 뭐냐, 닉네임은 본명이냐, 이런 상투적인 대화를 하는 사이, 점점 진하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혹시 고슴도치 회사 다니세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한번 만난 적 있어요. 일러스트 관련으로"


업무 미팅으로 만난 적도 있고 빈번히 연락을 취하기도 했던 H상이다. 게임 플래너였던 그가 갑이고 내가 을이었는데, 저쪽 디렉터가 우리 회사 작업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아주 고된 시간을 보냈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어플에서의 재회가 재미있어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카구라자카의 텐푸라집에서 '계약 단계에서부터 영업과 트러블이 있어 회사 자체에 인상이 좋지 않았다. 이제까지 사내에서만 작업하던 걸 처음 외부에 맡긴 거라 디렉터 머릿속의 세계관이 너무 강했고, 트러블 때문에 허들도 너무 높아져 있었다'라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3년 만에 들었다. 만약 그때도 이렇게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당시 내 월급의 상당 부분이 '시발비용'으로 날아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원래는 배경 일러스트레이터 출신이라는 H상과의 대화는 꽤 흥미로웠다. 식사 후 근처를 산책하다 연애에 영험한 신사인 도쿄대신궁(東京大神宮)에도 들렀다. 아무도 없는 신사 안 벤치에서 그가 7년 동안 사귀던 여자친구에게서 파혼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퇴사와 함께 연이 끊어졌던 사람과 다시 만나, 연을 이어주는 신사에서 연이 끊어진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 집 일본인'이 아니다.




채팅 어플은 편리하다.

내 주위에서는 좀처럼 만날 일 없는 사람과도 쉽게 접점을 만들 수 있고, 좀 아니다 싶으면 정리도 깔끔하다.


보통은 만나는 일 없이 랜선 말상대로 끝이 나지만, 본캐가 궁금해져 실제로 만나보는 일도 있었다. 어떤 타이밍에 만나느냐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부분인데, 의심이 많은 나는 이 사람이 믿을만한 인물이란 판단이 설 때까지 섣불리 만나지 않는다. 내게 그런 의도가 없다 해서 상대방도 그러하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중요한 판단 기준 중에 하나는 '장기간 대화가 이어지고 있는가'였다. 만약 다른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쓸데없는 시간 투자는 하고 싶지 않을 것이고, 상대가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대화가 길어질수록 모순이 드러난다. 경험에 의한 나의 빅데이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을 백 퍼센트 걸러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름 안전한 인물이라 생각해 만났는데 그저 한 자루의 흑심 가득한 연필 같던 사람도 있었다. 아니, 연필 같다니 연필한테 미안해지네. 치한으로 정정한다.


어지간한 일본 남자보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나는, 무슨 일이 있으면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고 설마 외국인에게까지 나쁜 짓 하겠어? 같은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험한 꼴 당하지 않고 무탈히 살아있으니 다행이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나를 인간불신의 늪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해 주었다.


덧붙이자면 옛 클라이언트는 그다음 주말, 오다이바에 건담을 보러 가자고 연락을 해 왔다.

건담에 관심이 없어 거절했더니 또 그다음 주말에는 자기 집에서 피자를 먹으며 영화를 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피자 사 먹을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남의 집에 가 영화를 볼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일정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인연이 끊겼던 것은 원래부터 딱 거기까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피자 같은 소리 하네.  

차단.





벚꽃을 보고 온 날 저녁.

하루종일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다 보니 내 입으로 '다녀왔습니다 - 어서 오렴' 하고 들어오는 내 집이 더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샤워 후 머리 말리는 드라이기 소리가 끝나자마자 다시 잽싸게 찾아온 침묵이 싫어 언제나처럼 채팅 어플을 켰다. 문득 내 프로필 사진에 눈이 멈췄다.


나쁜 목적으로 다가오는 이는 사람 얼굴사진에만 반응한다. 나한테 사진이라도 맡겨뒀는지 뜬금없이 '사진 내놓으라'라고 요구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꾸 없이 차단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맛있었던 커피', '예뻤던 풍경', '귀여운 장식품' 이런 사진을 프로필로 걸어두었는데, 오늘 찍은 사진이 생각나 그중 제일 예쁘게 나온 벚꽃 사진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진을 바꾼 뒤, 잠시 어플을 뒤적여 보았지만 누구에게도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내가 보낼 기분도 아니라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냉장고에서 레몬사와를 꺼냈다. 하루종일 해야 하는 마스크가 갑갑해서 그런가, 요즘 들어 상큼한 레몬사와가 아주 맛있다.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 캔 두 캔 마시다 보니 졸음이 와 이를 닦고 침대에 누웠다. 마지막으로 어플을 다시 한번 켜보았지만 내 앞으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어떤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お花見行きましたか?(꽃구경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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