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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04. 2023

더위와 맞바꾼 풍경

남편 육아활동

이런 풍경을 마주하면 항상 올림픽 공원이 떠오른다


집 안에서 하루 종일 취미활동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 타고난 집순이인 나와 달리, 남편은 계절을 불문하고 집에 있는 휴일을 지루해한다. 특히 날씨가 좋은 날에는 집에서만 보내는 게 아깝다나.


그럼 그 아까운 사람 혼자 나가 놀다 들어오면 그 사이 집에서 나 할 일 하고 딱 좋겠는데, 어째서인지 꼭 나를 데리고 나가고 싶어 한다. 주중에 종일 집에 있는 내 삶을 가엾이 여겨 그러는 것 같은데, oh what a good time, 난 잘살아 내 걱정은 낭비야. (IVE-Kitsch 중)


이건 비밀이지만, 나는 아이도 없는데 육아 -그것도 월령 사백 몇십 개월짜리- 하는 느낌 때문에 내심 주말보다 평일이 더 좋아지려고 하는 중이다. 피곤해 죽겠는데 아파트 놀이터에 끌려 나가던 우리 엄마가 이런 기분이었지 싶다.  


지난 일요일은 한창 장마철인 요즘 보기 드문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덤으로 기온은 35도. 이런 날씨에 거실 요가매트 위에 벌러덩 누워 심심하다고 한숨을 폭폭 내쉬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나까지 숨이 턱턱 막혀와 억지춘향으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질끈 묶었다.


야, 가자.

연꽃 구경하러.


남편이 환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크고 작은 공원이 많은 일본.

지금 살고 있는 시에도 봄에는 매화, 여름에는 연꽃이 장관을 이루어 지역 사회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공원이 있다. 부지 내에 체육관, 바베큐장, 도그런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항상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었는데, 이 날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공원에 꽃들만 덩그러니.


한낮의 최고기온이 35도까지 치솟은 날 낮 1시 50분에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그늘도 있긴 있었지만

피부가 약해 샌들 신은 발로는 나무그늘 따라 풀밭을 거니는 건 꿈도 못 꾸고, 최대한 그늘 가까이에 붙어 자그마한 양산 하나에 나를 맡기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의 여름 나기도 쉽지만은 않았지만, 일본의 여름은 한층 더 악독하다. 위도가 낮아서 그런가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에 와닿는 햇볕이 뜨겁다 못해 아프고, 금세 벌겋게 익어 우툴두툴 알레르기가 올라오는데, 이런 나를 바깥으로 끌고 나온 남(의) 편은 내가 잠깐 다른데 쳐다보는 사이 조형물 뒤에 숨어서는, 어디갔나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날도 더운데 아오, 이걸 그냥 콱.



사실 연꽃을 특별히 좋아해서 보러 온 것은 아니다.


예전의 나는 꽃을 보아도 별 감흥이 일지 않았고, 꽃을 살 돈이 있으면 먹을 걸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그랬던 내가 나이를 먹으며 조금 변했다.


봄에는 매화, 벚꽃, 등나무꽃, 여름엔 수국과 연화, 가을엔 단풍, 겨울엔 일루미네이션. 그 계절에만 즐길 수 있는 풍경, 그날의 날씨, 색감, 기분까지 추억이란 이름으로 켜켜이 눌러 담고, 2021년 여름, 2022년 여름, 2023년 여름, 폴더마다 다른 이름을 적어 기억하는 재미를 알았다. 같은 봄이라고 작년의 봄과 올해의 봄이 같은 것이 아니더라. 보편적으로는 백세 인생, 고령화시대라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 몇 번의 여름일지는 알 수 없으니, 살아있는 동안 옆에 함께 해 주는 사람과 함께 좀 더 곱고 예쁜 것들을 많이 보고 느끼고 싶다. 남편도 비슷한 마음일 수도 있겠으나, 나와 그의 다른 점은 때를 고른다는 부분일까.


살아있는 동안 옆에 함께 해 주는 사람과 함께 좀 더 곱고 예쁜 것들을 많이 보고 느끼고 싶다.


가능하면 이렇게 더운 날 말고 덜 더운 날에.   



연애 시절, 즉흥적인 기분으로 우에노 공원에 갔다 생각지도 않게 활짝 핀 연꽃들을 보았다.

그때까진 이 시기에 연꽃이 피는 것도 몰랐는데, 이런 멋진 장면을 우연히 볼 수 있었던 것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다음 주였던가, 주말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일요일 저녁에나 돌아오는 아들의 수상한 행동거지에 '여자가 생겼다'라고 직감한 남자친구 아버지 (현 시아버지)는 어느 날 저녁, '강아지 산책하다 봤는데 공원 호수에 연꽃이 많이 피었더라. 데이트할 때 가 봐'라고 슬쩍 미끼를 던지셨다. 갑작스러운 어택에 당황한 아들은 '어, 어어' 얼떨결에 대답하면서도 '우에노에서 벌써 봤는데' 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여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작년에는 이래저래 일이 많아 때를 놓쳤는데, 올해는 연꽃을 볼 수 있었다. 빠른 개체 몇몇이 피어났을 뿐, 거의 꽃봉오리 상태라 이번 주, 어쩌면 다음 주까지는 더 활짝 핀 연꽃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근데 더운 데 억지로 나온 것치곤 사진도 많이 찍고 나 되게 재밌어했네. (머쓱)


독야청청, 아니, 독야홍홍


연잎에는 요전날 내린 빗방울이 고여 있었다


연꽃이 핀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잰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고, 그 길로 아이스크림을 사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은 대체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지은 집인지, 여름에는 바깥보다 덥고, 겨울에는 바깥보다 추운, 안에 들어있는 사람의 감정과 라이프스타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마이 페이스 하우스인데, 이 집에 둥지를 튼 지 1년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바깥보다 집이 시원하다고 느꼈다.






일본의 여름은 9월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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