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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n 25. 2023

빛 좋은 개살구, 빛 좋은 불효자

나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일본에 온 이후, 벌써 만 1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강산도 한번 변했을 그 시간 동안, 엄마 아빠가 일본에 왔던 건 딱 한 번, 내가 일본에 온 첫 해 연말연시의 3박 4일이 다다.


나는 그때 도쿄의 게임회사에 입사한 지 2개월도 안된 때였다. 일본에 뒤늦게 와 얻은 일자리라 투지가 상당했다. 연말 휴가도 제 손으로 반납하고 출근하느라 공항으로 마중도 못 갔다.


하네다 공항에서 니시닛포리까지 오는 법을 메일로 적고는, 모르겠으면 무조건 전화하라고 090으로 시작하는 11자리 숫자 나열을 큼지막하게 써 보냈다.


아직 50대 중반이라 지금보다 조금 더 두려움 없고 총기 어렸던 아빠는 걱정 붙들어 매라 단언했는데 다행히 유언실행,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무사히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엄마 아빠는 잡다한 생활용품을 가득 채운 캐리어 하나와 종이박스를 이어 붙여 만든 커다란 상자를 하나 가져왔는데 집에 가서 열어보니, 작은 접이식 테이블과 플라스틱 수납장을 분해해 가져온 거였다. 


"너네 집엔 뭐 아무것도 없냐. 이거 가져오길 잘했지?"


아빠는 득의양양하게 수납장을 조립해 주고, 엄마는 EMS 박스에 아무렇게나 담겨있던 내 티셔츠와 청바지들을 차곡차곡 개켜 넣어주었다. 그땐 사면 되는 걸 왜 무겁게 여기까지 가져오냐고 면박을 줬지만, 옷 무게에 눌려 서랍 아귀가 맞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잘 쓰다가 작년에 결혼하면서 버리게 됐다. 버리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렇게 엄마 아빠가 있던 3박 4일.

밤에 도착하고 낮에 출발했으니 잠만 세 번 잤지 사실 이틀 있던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나 집에서 일할 거라고 으름장을 놔서 그랬나, 그동안에도 그저 동네 슈퍼에 가자느니, 잡화점 비슷한 곳에 가자는 말 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간 곳이라고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동네 슈퍼와, 이케부쿠로 로프트뿐이었다.


거기 가서 뭘 했냐면,


"조미료랑 식재료 그런 거 다 있네. 가깝고 뭐 사다 해 먹긴 충분하겠다"

"이거 사다가 오랜만에 밥 해줄게"

"이거 (압축봉 선반) 세탁기 위에 설치하자"


부모가 자식 만나러 외국까지 와주었는데도 뭐가 중요하고 뭐가 안 중요한지도 모른 채, 휴가에도 일한다고 3평짜리 좁은 집에 처박혀 회사 노트북과 씨름하고 있는 딸이 뭐라고. 밥 세끼 끼니마다 챙겨 먹이고 살기 편하라고 이것저것 해주고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에 센다기에서 우에노까지 시노바즈도오리를 중년 부부 둘이 산책하면서 붕어빵 사 먹은 것이 두 사람의 첫 해외여행에서 '여행'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출국일에 공항까지 가는 모노레일 안에서야 비로소 미안하고 아쉬워 싱숭생숭해 있는데, 엄마가 방긋방긋 웃으며 내 얼굴만 뚫어져라 보았다. 왜 민망하게 자꾸 쳐다보냐고 물었다.


"아니... 또 언제 볼 지 모르니까"



그게 스위치가 됐다.

 

별소릴 다한다고 퉁명스럽게 굴고 애써 눈물을 참았는데, 둘을 출국장 안으로 보내고 돌아서자마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모노레일 안, 그리고 야마노테센으로 갈아타고 니시닛포리로 올 때까지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학교 졸업하고 일하다가, 지금은 뭐 할까 생각하는 중이에요"



내가 한국에서 대졸백수로 살고 있을 때, 누가 "따님은 뭐 하세요?"라고 물으면 엄마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은 일한 시간보다 방황하던 시간이 더 길어서, 딸은 무슨 일 하냐고 묻는 질문은 그들에게도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워킹 홀리데이로 일본에서도 살다오고, 짧게나마 중국에서도 일했었는데 왜 재취업은 안될까? 대학까지 보내놨는데 뭐가 부족하다고 이러고 있는 걸까? 답답하고 궁금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겠지만 직접적으로 내게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경쟁이 싫고, 이미 겪은 실패를 통해 세상이 무서워져 버린 겁쟁이였던 나는, 안락한 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고,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더 두려웠다. 아마, 다 알고 있으셨겠지.

 

그러던 내가 큰 결심을 하고 부산까지 내려가 면접을 보고, 정부산하기관의 지원금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연수기간 동안 취업활동을 병행해야 했는데, 그 6개월간 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좌절도 하면서 조금씩 바뀌어갔다.


가장 첫 번째로 본 면접에서는 한국계 마케팅 회사 사장님에게 "당신은 내가 본 한국인 중에서는 제일 일본어를 잘하는데, 플러스알파가 없어"라는 뼈아픈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예전 같으면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났을 내 얄팍한 유리심장은 실금 정도의 대미지로 방어에 성공했고, 첫 면접에서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일본계 업무가전 판매회사와 모바일 게임회사, 두 곳에서 내정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딸 지금 일본에서 일하고 있어요"



똑같은 질문에 답이 바뀌었다.

외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의 울림은 참 멋지게 들린다.

 

처음엔 힘들면 언제든 집으로 돌아오라던 엄마도, 어느샌가 남의 돈 받고 일한다는 건 뭐든 어려운 거라며, 그냥 참고 일하라고 했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딸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자부심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제까지 하지 못한 효도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전직은 했지만 급여는 점점 올랐고, 일도 재미있었다. 직급도 생겼다.  

한 때는 노 에듀케이션 & 트레이닝, 아무것도 하지 않던 허우대 번지르르한 대졸백수가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에 나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트레이닝하는 일을 하다니. 실패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제2의 나, 제3의 나 같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고 대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일 때문에 바빠 집에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1년에 한 번은 집에 가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간간히 집에 갈 때마다 캐리어 안에는 동전파스, 약, 강아지 간식, 비싼 위스키 같은 걸 가득 채우고 가서, 집에 도착하면 보부상처럼 가방을 펼쳐, '이건 이럴 때 먹는 거고 이건 이렇게 쓰는 거야' 신나서 설명하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고 엄마 아빠는 '어휴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라고 하면서도 내가 꺼내면 꺼내는 족족 물건의 자리를 찾아주기 바빴다.


그래서 우리 집 강아지는, 아직까지도 내가 가면 내 캐리어에 코부터 박는다.






그랬던 나의 지금은, 보시다시피 인구 7만 명 남짓 지방 소도시의 외국인 가정주부다.


외국인이라면 필리핀 펍의 불법체류자나 '사장님 나빠요'조차 말 못 하는 공장 기계공을 떠올리는 이 지역 사람들은, 나를 '말이 통하니 제법 편리한 외국인 공장 파트 노동자'로서는 환영해 주지만, 이제까지 해 온 것처럼 이벤트를 기획하고, 제안서를 만들고, 프레젠 하는 것 같은 일은 맡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일본인이라면 경력자라고 환영해 줄 만한 일도, 외국인이라는 레테르를 달고 있는 나는 그저 '일본인과 결혼한 외국인 유부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걸 처음 느낀 것은, 작년에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하로워크(일본의 고용지원센터)에서 구직활동을 할 때였다. 내가 관심을 보인 구인표를 본 상담직원은 그 회사가 외국인을 채용하는지 여부를 먼저 확인하겠다며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와 연결되자 '지금 삼십몇 세의 여성분이 와 계신데, 한국 국적이세요. 일본에는 11년째 거주 중이시고요. 모스 자격증도 있고'라고 전달하고는 맨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 채용 담당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배우자가 일본인입니다. 응모 가능할까요?"



여기서는 내가 그간 어떤 삶을 살아오고, 무엇을 쌓아왔는지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일본인 배우자가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항이자, 취로제한도 없는 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 굳이 사무직을 희망하는 이 귀찮은 외국인의 최대 스킬이었던 것이다.


그걸 경험한 순간, 지난 11년간 공들여 만들어 왔던 나는 조각조각 부서져 버렸다.


나는 이제까지 뭘 해 온 걸까?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온 걸까?


순식간에 일본에 오기 전의 나약하고 두려움 많은 나로 돌아갔다.






인구 7만 명 남짓의 지방 소도시에 사는 지금은, 오전 중에는 가사를, 오후,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는 혼자 햇볕 잘 드는 거실에 앉아 글을 쓰는 생활을 하고 있다. 글을 쓴다고 해도 거창한 것을 쓰는 건 아니고 일상의 신변잡기나 생각한 것들을 짤막하게 정리하는 정도다.


처음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좋아하는 것부터 해보려고 시작했다. 글을 쓰는 것은 국민학생 때부터 좋아했다.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고 있는 생각들을 붙잡아, 말을 날실과 씨실 삼아 촘촘하게 짜내는 작업은 지금의 내게 있어서는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이유이기도 하다.


때로는 글 쓰는데 정신이 팔려 전기밥솥의 취사 버튼을 제대로 누르지 않아 귀가한 남편은 배를 곯아야 했지만 원흉이 된 글쓰기를 원망하거나 집에 있으면서 밥도 안 해놨냐는 타박은 하지 않는다. 원래 다정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나에 대한 미안함일 수도 있다. 물어볼 용기는 없다.


마찬가지로, 물어볼 용기는 없지만 가끔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딸은 뭐해요?라고 물어봤을 때, 엄마는 지금 뭐라고 대답하고 있어?

아마도 '결혼해서 일본 살아요' 하고 있겠지만, 대답하는 엄마의 기분은 예전과 똑같아?


그리고 또 궁금하다.

나는 과연 쭉 이대로도 괜찮을 것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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