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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07. 2023

남편의 성적표

남편의 사회생활을 멀찍이서 훔쳐보는 맛

어제저녁, 남편의 귀가 후에 있었던 일이다.


처음엔 요리 중이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거실 테이블 위에 못 보던 흰 종이가 접힌 채로 놓여 있었다.

가방에 대충 넣어온 듯, 구깃구깃해져 있었다.


부부가 된 지 1년 4개월째, 남편 이름으로 된 우편물이나 내가 만지지 않은 종이는 내 마음대로 열어보지 않는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해서-


는 아니고, 할머니의 엄한 교육 덕분에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엔 일절 손대지 않는다. 할머니는 13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가르침은 이제까지 3n년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 생각하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그냥 있는 말은 아니지 싶다.


샤워를 마친 후, 거실로 돌아온 남편은 종이를 보더니 '아, 맞다' 하더니 내게 그 종이를 쥐어주었다.


"읽어봐"


남편의 성적표였다.






남편은 평범한 월급쟁이다.


주 5일 근무에 토일 쉬지만, 연간 휴일은 쥐똥만큼 있고, 부여되는 유급휴가수는 법정 기준보다 훨씬 많지만, 유급휴가 소화율은 법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다.


출근시간이 빠른 만큼 퇴근도 빠르지만, 정시에 퇴근한 건 손에 꼽을 정도니, 노동력 대비 보상률을 따져보면 이직을 생각해 봄 직도 한, 내 기준 새까매도 이렇게 새까말 수 없는 회사인데, 본인은 일이나 조직에 큰 불만이 없고 그 나름의 보람과 즐거움도 느끼고 있는 것 같으니 나는 그저 잘 먹이고 잘 재워서 내보내는 것 밖엔 할 말이 없다.


남편의 회사는 반년마다 인사평가를 하여 여름과 겨울, 연 2회 상여를 지급한다.

상여라고 해도, 보너스라기보다는 실질적으론 인질로 잡혀 있는 것 같은 성격의 것이라 나는 '당연히 받아야 할 노동의 대가를 회사의 편의에 따라 후불로 받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남편은 긍정적으로 '보너스'라 생각하며 상여 언제 들어오냐고 묻는 내게 상여받으면 뭐에 쓰려고 그렇게 기다리냐고 물어본다.


뭘 하긴요, 쵸킨(貯金, 저금) 데스.







10년 동안 3개의 일본 회사를 경험하면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보았다.

사회인으로서 귀감이 되는, 일로도 인격적으로도 존경할 만한 분도 계셨고, 할 줄 아는 건 없으면서 입만 산 빡대가리들도 있었다. 어쩌다 그 빡대가리의 와이프랑도 만날 일이 있었는데 자기 와이프 앞이라 그런가 평소보다 딱 2배 더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언젠가 내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되고 남편이 회사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자신의 무용담에 대해 말할 때에는 다 믿지 말고 절반만 믿어주자고 생각했다. 절반만 믿어도 이미 충분히 뻥튀기된 내용일 거라고.


남편의 경우는, 딱히 회사에서의 일을 집에서까지 곱씹고 싶어 하는 타입은 아니라,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나 자신의 활약상을 줄줄이 늘어놓지는 않으니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물가에 어린아이 내놓은 것 같은 기분 비슷하게, '회사에선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항상 궁금했다. 내가 보는 그는, 심성이 착하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포지티브 한 성격이나, 남자치고는 뭔가 해 보려고 하는 향상심이나 도전 정신은 부족하다. 또, 내성적이고 말주변이 없어 그런 점 때문에 회사에서 사람들하고는 잘 어울리고 있을지, 일은 잘하고 있는지 내심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중, 그가 인사고과 개인평가표를 내 앞에 내밀었다.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절대 보여주지 않을 텐데, 이게 웬 꿀잼거리냐 싶어 날름 펴봤다.

작년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의 6개월간의 성적이었는데, 이것이 7월 상여에 반영된다 했다.

총 10개의 항목별로 평가요소와 평가기준이 명시되어 있고, 이에 따른 성적은 S, A, B, C, D 5단계로 분류되었는데, SABCD보다도 그 옆의 인사평가자(상사) 코멘트가 더 직관적일 것 같아 열심히 읽어 내려가는데 그만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 의뢰한 일은 싫은 내색 없이 확실하게 처리함


시킨 건 곧잘 하지만, 지시가 없으면 제 발로 나서서 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좋게 써준 것 같은데 그걸 쓴 상사의 기분이 정말 뼈저리게 느껴졌다. 딱 한 발짝만 더 내디뎌주면 좋겠는데 그걸 안 하죠?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알아요 알아. 집에서도 그러거든요. 이렇게 자라와서 어쩔 수 없습니다. 즈이 엄마 탓이에요. 훈육을 해야 하는데 잔소리만 했더라고요. 제가 다시 길러보고는 있는 중인데 이미 삼십몇 년을 그렇게 살아와서 교정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근데 한 발짝 더 내딛게 하고 싶으면 더 정확하고 확실한 방법 -가파른 급여인상- 을 시험해 보세요. 맨입으론 좀 어렵지 않을까요?


다음.


-최전선에는 나와주지 않지만, 자신의 일은 물론 주변도 잘 챙기며 협조성이 좋아 (이하 생략)


역시 자발적으로 막 나서서 뭘 하려 들진 않나 보다. 과거의 나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고 무슨 남자가 야망도 없냐고 한마디 했을 법 하지만, 그래, '굵고 짧게' 보다 '길고 가늘게'도 삶의 방법 중에 하나지. 지금의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협조성이 좋은 건 역시 부인(나)의 가정 내 트레이닝이 한몫했다고 본다.


결혼 후 첫 부부싸움의 테마는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였다.

결혼 당시의 남편은 내가 해주는 밥, 내가 하는 설거지, 내가 하는 청소와 빨래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집에 오면 보냉컵에 얼음 담고 위스키와 탄산수를 부어 맛있는 하이볼 만들 줄은 알아도 눈앞에서 비지땀 흘려가며 종종 거리는 사람에게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라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제 입에 들어갈 술부터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운 날 불 앞에서 고기를 볶는 내 옆에 와 자연스럽게 샐러드 용 야채를 씻고 토마토를 써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어쩌다 한 번씩은 피곤할 테니 그냥 앉아있으라고 하는데, 그럴 때에도 안절부절못하고 옆에 와서 구경은 하고 있으니 꽤 괜찮은 갱생이 아닌가?


 "그건 협조성이 아니라 노예성이지"


본인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자, 다음 코멘트.


-변함없는 안정감, 좋은 의미로 방치해도 걱정 없는 몇 안 되는 사람


진짜요?


-다양한 각도에서 의견을 내주어서 팀 운영에 큰 도움이 되는 존재


이 말주변 없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의견을 말한다니 상상이 가지 않지만 어쨌든 상사들의 평가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주변과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처럼 회사일을 시시콜콜 털어놓으며 기뻐하고 화내고 이런 감정의 기복이 적은 사람이라 미처 알 수 없었던 그의 사회인으로서의 모습도, 인사고과 평가표를 통해 조금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기도 했다. 기특하기도 하고. 하나의 반성점이라면 나보다 더 내성적이고 연하라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너무 싸고도는 방향으로 그를 대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 이제까지 나 없이도 잘 살던 사람인데 좀 더 믿어주자.


그래서 이번 상여는 얼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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