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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Feb 14. 2024

쫀득한 밥솥 초코 브라우니

제3회 밸런타인데이 기념

올해도 밸런타인데이가 왔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밸런타인데이는 올해도 살아 돌아왔다. 이전에는 있는 힘껏 모른 척해왔다.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마음을 표현한다는, 그런 뭐랄까, 아기자기하고 볼 간지러운 이벤트는 내게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 것조차 초콜릿 회사의 상술에 속아 넘어가는 우매한 대중이나 하는 짓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아주 훌륭하고 건실한, 우매한 대중으로 거듭났다.


남편이 내 세상에 들어온 후 세 번째 밸런타인데이다. 딱히 초콜릿을 달라하진 않았지만 얘는 단 것을 좋아하고 귀여우니 우매한 대중이 됨을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초콜릿을 주고 싶다 느꼈다. 첫해는 사러 갈 시간조차 없이 바빠서 편의점에서 산 고디바 5구 초콜릿을 주었고, 작년에는 기왕 주는 거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주고 싶어 난생처음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 보았다. 아, 내가 말짱한 초콜릿을 사서 깨부수고 녹여 다시 굳히는 비효율, 저생산성 작업에 손을 대다니. 과거의 내가 들으면 천인공노할 일이다.


근데 이거 꽤 괜찮더라고요☆


그냥 굳히기만 한 게 아니라 그라놀라 넣고 초코 크런치를 만들었는데, 꽤 넉넉하게 만들어져서 둘이서 한참을 먹었다. 남편도 좋아했지만, 입에서 단맛 당길 때도 좋고, 컴퓨터 하면서도 입에 하나씩 넣어 우물우물 씹는 재미가 아주 좋았다. 게다가 그 과정을 동영상까지 만들어 올렸더니 네이버 블로그씨 핫토픽에 선정되기까지 했다. 그때부터였어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깨달은 것은. 그렇게 한번 재미를 본 나는 올해도 또다시 남편에게 줄 초콜릿 과자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매년 같은 걸 하면 재미없으니 이번에는 전기밥솥으로 만드는 초코 브라우니를 만들었다. 홈베이킹은 잘 모르는 세계고 계량도구도 없으니 실패가 적을 것 같은 것으로 골랐다. 재료도 초콜릿, 버터 (마음대로 마가린으로 갈음했다), 계란, 우유, 핫케이크 믹스만 있으면 되니 재료도 얼추 다 갖추어져 있었다. 디데이는 2월 13일. 전날 미리 만들어 두어야 다음 날 점심 간식으로 가져갈 수 있으니까. 그냥 집에서 먹는 것보다 일하다 중간에 먹는 것이 모티베이션도 올라갈 것 같아 작년에도 하루 먼저 만들어 건네주었다.


어디 보자. 작업 개시시간은 2월 13일 3시 55분.

우리 집 일본인을 퇴고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다. 우선 레시피대로 초콜릿 4개(200g)를 잘게 부수어 밥솥에 넣었다. 그 위에 마가린 한 숟갈 떠 넣고 보온 모드로 방치하며 녹여준다. 레시피에는 10분 정도면 된다 했는데 10분 뒤 열어보니 초콜릿이 너무 건재해 취사버튼 누르고 그릇 몇 개 설거지하고 왔더니 약간 진득하게 녹아있었다. 다시 보온모드로 바꾸어 스패츌러로 휘휘 마저 녹여주었고 형체가 사라질 정도가 되면 계란 1개, 우유 100ml를 먼저 넣고 섞은 뒤, 핫케이크 믹스 50g을 넣고 마저 저었다.


마치 계량을 한 듯이 써넣고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계량도구가 없기 때문에 일상에 스며든 습관을 활용했다. 우유를 부을 때에는 소주잔에 술을 따를 때의 스냅과 따르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렸었는지를 몸으로 떠올려가며 소주잔 2잔 분량을 넣었다. 나중에 큰 컵에 물 붓기로 테스트도 해봤는데 딱 소주잔 1잔 나올 만큼 알맞게 따라졌다. 습관은 정말 무섭다. 이래서 한석봉 어머니가 불 끄고도 떡을 써셨구나.



반죽이 다 섞이면 솥을 탕탕 내리쳐서 공기를 빼주고 밥 할 때처럼 취사버튼을 누르면 끝인데, 우리 집 밥솥에 찜 모드가 있고 그걸로 스펀지케이크도 만들어진다길래 그걸 눌러서 해봤다. 35분 뒤, 삑삑- 밥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습을 드러낸 초코 브라우니


잘 되었을까? 기대감에 부풀어 밥솥 뚜껑을 열자 우주 혹성 비슷한 것이 나왔다. 공기 뺄 때 싱크대 상할까 봐 살살했더니 기포가 덜 빠진 모양이다. 보, 보기엔 이래도 맛은 괜찮을 거야, 일단 속까지 다 익었는지 확인해 보자고 마음을 가다듬고 한쪽 구석을 젓가락으로 찔러보았다. 반죽이 묻어 나오지 않아 베이킹 시트를 깐 접시 위에 밥솥을 뒤집어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냈다. 아까 젓가락으로 찔러보았던 곳이 무너져 마치 딱 한 입 베어 먹은 것처럼 나왔다. 거대 초코파이 같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식혔다.

 

그렇게 브라우니를 만들었으니 이제 저녁밥을 지을 차례인데, 밥솥을 씻고 하려니 갑자기 급 피로가 몰려온다. 밥 하지 말고 파스타 해야겠다. 파스타 먹고, 김비서 보다가 (이제야 보고 있다) 커피랑 해서 꺼내줘야지.


다음 날, 자연광 아래에서 모습을 뽐내보는 브라우니


차갑게 굳은 브라우니에 나이프를 대자 묵직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본능적으로 대박의 직감이 들었다. 드립커피에 물을 붓던 남편을 불러 잘라보라 했다. 기대감이 한층 더 커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는 저녁 먹고나서부터 언제 주려나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쫀득하고 진한 초코 브라우니였다. 이거 진짜 맛있다, 너무 좋아, 다음에도 또 먹고 싶어, 오랜만에 칭찬을 연발하던 남편은 내가 게임 추가 업데이트 하느라 손에서 핸드폰을 놓자 이거로 대신 게임하라고 자기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아, 이제까지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게다가 액정 나간 핸드폰이 불쌍하다며 이번 화이트데이엔 새 아이폰을 사주겠다나. 초콜릿 400엔어치, 집에 있던 계란, 우유, 핫케이크믹스로 휘휘 저어 밥솥에 넣은 것만으로 이렇게 감동하는 걸 보면 이 남자도 참 소박한 사람이다 싶기도 하고,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많이 뜯겼겠구나 싶어 짠하기도 하다. 에휴, 나만이라도 이 사람 등치지 말고 행복하게 해 줘야지. 평생.


브라우니와 즐거운 동물 친구들
작년의 밸런타인 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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