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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Mar 07. 2024

일본에서도 나는 비 오는 날 부침개를 찾는다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실 때 비가 오는 일요일 낮에는 종종 부침개를 부쳐먹었다. 온 집안에 진동하는 기름 냄새, 프라이팬에 부은 반죽이 치이이익 기름에 익어가는 소리로 가득한 형광등 켠 주방, 발 밑을 바삐 움직이는 강아지들, 크게 틀어놓은 전국노래자랑. 난 그게 좀 싫었다. 그 동네 사람들만 신나는 지역구 명물들, 때때로 질척하고 눅눅하게 구워진 부침개, 말수 적은 가족들, 찌뿌둥하고 축축 처지는 날씨. 하나같이 지루했다. 아 그냥 방에 들어가 컴퓨터나 하고 싶은데. 그 생각만 하면서 부침개를 씹었다. 


나이가 든 지금에서야 그것이 자각하지 못했던 '좋은 기억들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싸늘하고 울적한 비 오는 날이 고소한 기름 냄새와 김이 모락모락 하는 복작복작한 풍경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배곯지 않고 가족이 모여 앉아 밥을 먹는 집, 주말엔 별미를 만들어 먹는 집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린이였던 시절에야 말하기 좋아해 재잘재잘 시끄러웠지만, 사춘기를 지나며 집안에서 웃음과 말소리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우리 집이 화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 역시 지금은 이해한다. 


추억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비가 오면 종종 그 풍경, 그 냄새를 다시금 떠올린다. 떠올린다기 보담은, 마치 다시 재현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평소 잘 만들지 않지만 만들기 어렵지도 않은, 그런 약간 특별한 음식을 만들며 내는 복작복작한 소리와 냄새로 춥고 눅눅한 우울감을 몰아내고 싶어 진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기분을 행동으로 실현시킬 때가 왕왕 있는데, 그게 바로 어제저녁이었다. 



마침 대파가 있었다. 마트에서 파를 팔 때는 보통 1개, 3개 단위로 파는데 남편이 회사 사람한테 받아온 대파는 한국에서 말하는 한단 정도 되려나. 작년 겨울에도 이 정도 얻어왔다가 수완 좋게 먹지 못해 반 정도는 곰팡이가 슬어 버리고 말았지만 올해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다. 쫑쫑 썰어 냉동시킨 뒤 야곰야곰 꺼내 써도 괜찮겠지만, 모처럼 밭에서 갓 뽑은 싱싱한 대파를 처음부터 얼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마침 비도 오고 그래서 부침개 생각이 나서, 파 하나를 물로 살살 씻어보았다. 흙이 씻겨 내려가고 껍질을 벗기자 이내 뽀얗고 튼실한 줄기가 드러났다. 설겅설겅 대충 썰고 찬장을 열어 밀가루를 꺼냈다. 



부침가루 대신이라 전분과 소금을 살짝 섞고 계란 하나와 물을 넣어 휘휘 저었다. 부침개는 자주 하는 것이 아니라 반죽의 양과 되기를 가늠하는 것이 쉽지 않다. 바로 지난번 부침개는 거의 카레 난 비슷하게 되어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 더 묽게 만들었다. 아까 썬 파와 양파 반 개, 냉장고 속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넣고 보니 건더기에 비해 밀가루가 너무 적었나 싶기도 하다. 이럴 밀가루를 더 부으면 반드시 망하므로 그냥 이렇게 부쳐보기로 한다.

 


국자로 반죽을 퍼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처억 얹고 한 면이 다 익으면 뒤집어 준다. 한 손으로는 프라이팬 손잡이, 한 손에는 뒤집개를 든 나도, 반죽과 함께 온몸이 들썩인다. 왜 너도 같이 뒤집히냐고 웃던 남편이 '근데 비 오는 게 부침개 먹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라 물었지만 딱히 뭐라 설명할 길이 없어 '핀란드에선 자기 전에 자일리톨을 씹습니다' 같은 대답을 했다. 


"한국에서는 원래 다 그래."




그런데 정말 한국 사람들은 다 그렇다. 모두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먹은 것은 아니겠지만, 비 오는 부침개 부쳐먹던 기억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비가 오면 부침개, 먼지 많은 날은 삼겹살, 이삿날은 짜장면, 축구 치킨. 이런 '국룰'에 가까운 공통적인 행동양식들은 누가 먼저 시작했고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고 그 경험은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또 그 자식에게로, 추억이란 이름으로 전이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이 강력한 메커니즘은 삶의 장소를 일본으로 옮긴 이후에도, 나를 여전히 관념적 한국인으로 살게 한다. 전화 한 통에 슈우웅 달려와 주는 치킨집이 없어 비록 내 직접 치킨을 튀기고, 이삿날엔 짜장면 대신 편의점에서 야끼소바를 사 먹더라도 말이다. 


같은 한자문화권 국가로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고, 부침개 비슷한 음식도 존재하는 일본이지만 한국에서처럼 '비 오는 날 오코노미야끼'란 개념은 없다. 그래서 일본인인 남편은 나의 '비 오는 날엔 부침개'라는 공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오니 파전을 부칠 것이라는 나의 선언에, 


"반찬으로 말고 파전만 먹는 거야? 그럼... '소주 주세요 (한국어)'"


라고 애교있게 소주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부침개에는 한국 술이 어울린다란 인식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비 오는 날의 부침개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가 먼저 '오늘은 비가 오니 부침개'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시공간을 달리 한 지금의 우리 집에서 비 오는 날 부침개를 떠올리고 '그때의 우리 집'을 추억하듯이, 언젠가 올지도 모르는 그의 '비 오는 날엔 부침개' 안에는 어떤 추억이 고이 접혀 있을지, 기대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전에, 이제 슬슬 알려줘야지.


여보, 부침개에는 막걸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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