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일본인 #19
어느덧 여름이 왔다. 연일 30도를 넘는 더위에 마스크까지 하고 있으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열사병을 우려한 의료 관계자들이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 했지만, 출퇴근 길에 맨얼굴을 드러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벗으면 되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장마가 끝나자 내가 사는 맨션은 대대적인 외부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기간 동안 낮에는 창문을 열 수도, 에어컨을 틀 수도 없다.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에어컨 실외기 옆엔 구슬땀을 흘리며 작업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만 살자고 에어컨 운전 버튼을 누를 순 없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자주 미츠기(見次) 공원에 갔다. 탁 트인 호수는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가끔은 키 큰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에 앉아 시원한 캔맥주로 목을 축였다. 또 어떤 날은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공원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고가로 된 수도고속도로의 불빛이 비치는 호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우리는 이 공원의 밤풍경을 좋아했다.
"툭, 툭"
집에 가려고 막 일어서는데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소나기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비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우리는 가방을 머리 위로 들고 전속력으로 뛰는 쪽을 택했다.
안타깝게도 가방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뛰다 불 꺼진 어느 건물 아래에 멈춰 가뿐 숨을 골랐다. 잠깐 사이에 비에 쫄딱 젖은 생쥐꼴이 된 모습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참을 웃었다. 가방에서 젖지 않은 손수건을 꺼내 안경의 물기를 닦았지만 큰 물방울이 작게 쪼개졌을 뿐, 시야를 또렷하게 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안경을 벗고 보는 인적 없는 거리는 비에 젖어 반들거렸고, 반사된 주황색 가로등 빛은 여름의 짙은 밤과 대조를 이루었다. 머리칼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아주 로맨틱하다고 느꼈다.
이 나이에 이런 '소나기'같은 연애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우리의 나날'이 항상 풋풋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여름, 우리는 이카호(伊香保, 군마현의 온천휴양지)로 여행을 떠났다. 뜨거운 온천물에 위축되어 있던 몸을 풀고, 료칸사람이 방에 차려주는 진수성찬으로 호사를 맛보았다.
그런데 내 마음 한켠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카호에 가자는 말만 꺼냈지 구체적인 결정이 필요할 땐 항상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뭘 정하는 것은 전부 내 몫이었다. 나도 뭘 결정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인데 빨리 해결하고 싶어 혼자 알아보고 안을 제시했다. 그는 언제나 좋다고만 했다.
우리는 '같이' 여행을 가는 것인데 왜 '혼자' 가는 것 같지.
부담스럽고 답답했지만 언짢은 이야기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문제는 여행이 끝날 무렵 불거졌다. 또 내게 미루어진 선택권으로 고기 정식을 먹으러 갔는데, 그는 시킨 것이 나오니 허겁지겁 먹고는 '아, 배불러' 하고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나는 아직 절반도 먹지 않았을 때였다. 내가 밥을 먹는 내내 그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소곤거렸다.
"여기 고기 별로다."
시작부터 삐끗해 있던 참이었다. 한껏 짧아진 도화선은 한번 불이 붙자 걷잡을 수 없이 타들어 갔다.
마스크 눈치게임 하는 답답하고 수동적인 일본인, 책임지기 싫어 방관할 땐 언제고 투덜투덜 뒷말을 하는 일본인, 개인주의인 척하면서 사실은 이기적인 일본인. 이제껏 내가 보아 온 '싫은 인물들'이 그의 위로 켜켜이 겹쳐졌다. 그가 드러낸 허물 전부가 일본인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 텐데도, 나는 그가 일본인이라 그렇다 생각하고 싶었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일본인이기 때문이 아닌데도, 왜 이런 건 일본인이라 그렇다 여기고 싶은 걸까. 어쩌면 그의 결점은 그의 탓이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은 '한국인이니까'라고 낙인찍히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으면서. 이렇게 모순적인 나도 싫었다.
말없이 고기와 맥주를 더 시키고 그와 똑같이 핸드폰을 보면서, 묵묵히 밥을 먹었다. 조용한 식사가 끝나고 그보다 먼저 빌지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어디에 터트려야 할지 모르겠을 분노를 꾹 억누르면서.
그는 내가 왜 그러는지는 몰랐지만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은 알았다.
'뭐 마음 불편한 거 있지? 나 때문인 것 같은데, 미안해.'
3일을 서먹서먹하게 지냈다. 딱히 '그 버릇을 고쳐놓겠어!'란 의도가 있던 것도, '헤어져야지'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긴 시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게 되었고, 갑자기 그가 사과를 해오자 당황스러움에 무슨 소리냐고 딱 잡아뗐다. 머리는 냉정을 되찾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남의 일엔 쉽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지만 정작 내 일이 되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런데 한국 짬뽕을 배달시켜 놓고 기다린다는 내게 '한국식 짬뽕은 어떤 거야? ^^'라고 해맑게 묻는 말에 또 짜증이 치밀었다. 맨날 남한테서 답을 찾으려 들지 말라고, 좀! '스스로 찾아봐'라고 잘라냈다. 그 말에 그도 화가 난 것인지 그날밤 연락이 두절되었다. 두절되었달까,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라인이 온 것은 다음 날 저녁. 순간적으로 속이 상해 그리 했지만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좀처럼 하지 않던 실수도 했다며,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본인이 고치겠으니 이만 화 풀고 화해하자고 했다. 브레이크에 발이 닿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러저러해서 그랬다고 실토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덧붙였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고, 만약 그의 어떠한 모습이 견딜 수 없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하나의 사인일 테니까. 만나면서 서로를 더 알아가는 것도, 그 안에 정말 싫은 점이 있어 헤어지는 것도,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소동이 봉합된 것은 평소엔 수동적인 그가 관계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관계를 너무 편히 생각해 어리광을 부린 것 같다 했고, 나 역시 이해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개인의 성향이 스테레오 타입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이제껏 레테르를 거부해 오던 나 자신 또한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했음을 인지한 것도.
이번 일로 하나 더 깨달은 것이 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 이 사람은 나와 맞지 않아, 어차피 맞지 않는데 일부러 맞춰가려 공들일 필요도 없어, 잘 가라, 안녕. 이제까지 고마웠고 지겨웠다. 칼로 자르듯 툭 끊어냈다.
그러다 보니 갈등해결보다는 '갈등을 만들지 않는 것'을 제일 중요시하게 되었다. 일단 참고, 참아주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으면 작두를 꺼내 들었다. 갑자기 썰려나간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내게 매정하다 했다. 하지만 모든 관계의 갈등을 '잘라버림'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결코 좋은 버릇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게끔 설계되어 있고, 서로 폐를 끼치며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하물며 애정으로 묶여 있는 관계다. 타인에게 보다 좀 더 너그럽고, 좀 더 솔직하게 부딪히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상대와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 아닌가.
국적이 다른 연인에게 있어 가장 큰 장벽은 '언어'라 여겨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발생한 연애감정에 의해 발전한 커플이라면 언어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지 않을까. 눈빛만 보고 파지직 전기가 통한 것이 아니고서야 뭔가 말이 통하는 게 있었으니 사랑도 싹텄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눈빛 만으로 상대를 푹 빠지게 할 수 있을 만큼 매력 터지는 존재가 아니다. 자세히 봐야만 예쁘다.
정말 가장 큰 문제는, 여느 보통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각자를 둘러싼 정서적 베이스와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한다고 느낀다. 거기에 각국 고유의 사회적 룰이나 정서 차이가 한 스푼 더 얹어지는데, 그것에만 포커스를 두면, 서로의 의견 차가 발생했을 때 이것이 '그 사람이기 때문'인지, '그 나라 사람이기 때문'인지가 모호해지는 시점이 온다. 쓸데없는 생각거리가 많아진다. 크게 보면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때론 그것이 갈등을 조장하고 불안을 가속시키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 하는 마음만 있다면, 국제연애가 쉬운 길은 아니겠지만 어려운 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인 그와의 연애는, 아니 그와의 연애는 나를 조금은 성장시키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