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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Mar 26. 2024

연애가 바꾼 우리

우리 집 일본인 #17

그를 만나기 전, 나는 도쿄에서 다른 현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매일 편도 2시간 가까운 통근시간에 스트레스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직업만족도는 나쁘지 않았다. 과거의 나처럼 일본에서의 취업을 꿈꾸는 외국인 유학생들, 저마다 국적과 생김새는 다르지만 큰 테두리로 보면 후배 같기도 하고 동생 같기도 한 이들이 각자의 꿈을 발견하고 나아가는 걸 지원하는 것은 매우 보람찬 일이었다. 일부러 휴가를 내고 찾아오는 졸업생들을 맞이할 때면 내가 인생 헛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도 있었다. 학생들은 나를 '좋은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걸로 정말 다 괜찮은 거야?


내 귓가에는 그동안 들으려 하지 않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내일모레까지 엔트리 시트 (*일본 채용에서 요구되는 지원서류. 기업 사양의 자기소개서에 준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첨부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내야 하는데 어떻게 해요?' 같은, 기한은 촉박하고 나는 잘 모르겠으나 답은 네가 정해줘, 같은 상담에 휘둘리느라 오늘 목표로 하고 있던 지난 과제에 대한 개인 피드백 자료를 채 다 완성하지 못했다.


아아, 역시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학생을 상대해 줄 때가 아니었다. 그냥 '뭐 날로 먹으려고 하고 있어. 내일까지 어떻게든 생각해서 채워와. 이야기는 그때부터야.'라고 딱 잘라 돌려보냈어야 하는데 차마 그러질 못했다. 이 정도로 의존적인 학생 대부분은 본국 사람들이 느긋하고 태평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고 단기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그런 국민성의 차이에는 기후가 관여하고 있다던가 하는 걸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추운 겨울 없이 연중 과실이 나는 지역에서는 식량 조달이 어렵지 않아 위험요소에 대한 인지, 인과관계의 산출, 대책마련을 위한 사고, 멀리 보는 인사이트가 자라나기 어렵다던가. 물론 전부가 전부 환경적 요인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 그 학생은 모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학생인데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워 결국 방과 후에 남겨놓고 같이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영악한 학생은 '선생님이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실 건데요?' 같은 식으로 내 대답을 받아 적으려 하기도 하는데 그럴 요령조차 없어서 우선은 생각을 확장하는 법부터 연습해야 했다.


엔트리 시트 작성에 답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얻은 학생은 17시가 되자 '아르바이트 가야 한다'며 돌아갔고, 퇴근시간이 된 나는 이제야 교무실 내 자리로 돌아와 멈춰있던 피드백 작업을 계속해야 했다.


"이제까지 N상 면담 계속하신 거죠? 수고 많으셨어요..."


옆자리의 띠동갑 사무직원이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과 일을 봐주는 유일한 직원인데 사회인이 된 지 3년밖에 되지 않아 실수는 잦았지만 의욕도 있고 정도 많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작년 여름 즈음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관계는 사뭇 달라졌다. 우리 직장은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에 정해진 연간 휴일 수 이내에서 자율적으로 시프트를 넣는 근무방식을 택하고 있었는데, 평일 휴일인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위해 매주 학생들이 등교하는 평일에 휴가를 내고, 학생이 없는 토요일에 시프트를 넣어 실질적으로 그녀가 해야 할 업무를 직군이 다른 내가 대신 처리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말았다. 솔직히 그녀를 참 많이 원망했다. 회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 바쁜 사정 빤히 다 알면서 너무한다 싶었다. 휴무 다음 날엔 항상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민폐를 끼쳤습니다, 말하는 그녀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알면 그러질 말았어야지!


하지만 '회사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요령 좋게 살았어야 했다. 조직과 업무에 내 인생을 올인할 수 있을 정도로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잠을 줄이고, 연애를 포기하고, 잔업을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말고 적어도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노력을 했었어야 한다. 학생들이 환희에 찬 얼굴로 내정통지서를 가져오면 마치 내 일처럼 기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내 일 '처럼'이지 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남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퉁칠 수 있을 만큼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들의 성과 이면에 나 자신이 벌레 먹은 잎사귀처럼 너덜너덜해져 있다는 상실감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아닐까. 언제나 캐주얼 슈트에 힐을 차려 신고, 등을 쭉 펴고 단호한 목소리로 마치 강남의 카리스마 일타강사라도 된 듯 학생들 앞에 서 있지만, 항상 빠듯한 시간에 쫓기고, 진짜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조차 잃어버리고 있는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갖고 나서야, 그녀의 어쩌면 허울뿐일지도 모르는 인사도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에는 역시 그의 존재가 컸다고 본다.


그를 만나기 이전엔, 17시에 칼같이 퇴근해도 집에 가면 어차피 19시, 집에 가서 딱히 꼭 해야 하는 일도 없고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일도 딱 깔끔히 마무리하고 가면 기분 좋으니까 내 시간을 쓰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회사가 사지 않은 내 시간을 스스로 0엔의 값어치를 매겨 억지로 회사 손에 쥐어주고 이것이 나의 열정이고 노력이노라, 스스로 뿌듯해하며 사회인으로서의 자아만 비대하게 키워갔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나서는 사회인으로서의 나에 눌려 작게 오그라들어 있던 나를 직시하게 되었다. 고상한 척, 쿨한 척하고 있지만 마스크 아래로는 씨발씨발 욕하고 있는 나. 남을 보살필 깜냥은커녕 몇 살을 먹어도 유치하고 게으른 나. 싫은 건 나중으로 미루고 좋고 편한 것만 하고 싶은 나. 노란색 분홍색을 좋아하고 작은 캡슐토이에 욕심을 부리는 나. 사랑하는 이에게 볼을 비비고 히잉, 혀 짧은 목소리로 애기 흉내를 내는 나. 


나의 위치와 입장 때문에 사람들 앞에 쉽사리 꺼내놓을 수 없었고 꺼내놓아서도 안된다 생각했던 나의 모습들. 대체 이제까지 어디에서 몸을 말고 숨어 있었을까. 그와의 만남을 통해 숨어있던 진짜 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사회인으로 살아가는데 불필요하다 여겼던 나는, 그와의 연인관계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그런 나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쏟아주었다. 항상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던 누군가의 사랑이 내가 나로 있는 것만으로 손에 넣을 수 있다니. 


매일 할 일이 생겼다. 가능한 한 빨리 저녁과 샤워를 끝마치고, 하루종일 입고 있던 딱딱하고 강한 나를 벗고 야들야들하고 유약한 나로 돌아가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며 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일본에 온 이유, 일본에 취업하고 싶은 이유, 우리 회사에 응모한 이유, 학생시절 가장 열심히 했던 것, 입사 후 캐리어 플랜, 취업비자가 나오는 업무, 이 업무에서 취업비자를 내려면 어떤 이유서를 써야 하는가, 그런 남의 대리 고민 따윈 다 내려놓고 그냥 나, 내가 즐겁고 내가 행복하고 내가 주체가 되는 그런 삶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학생들에게만 좋은 선생님이고 나에겐 나빴던 내가, 나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하는 게 좋아'라는 어드바이스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을 뿐인데 숨통이 틔이는 기분이었다.




꽃잎이 조금 남아있던 하자쿠라(葉桜, 꽃잎이 지기 시작하고 초록 새순이 돋아난 시기의 벚나무)가 무성한 신록으로 뒤덮였을 무렵, 나는 닛포리 역 니시구치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이 고양이로 유명한 곳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고양이 발자국을 형상화한 현판을 보면 쉬이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은 집 근처에서만 데이트를 해왔지만 따뜻하고 볕이 좋은 어느 토요일, 닛포리의 야나카 긴자에 가기로 했다. 딱 이 계절은 산책하기에도 좋고, 그와 모르던 시절에 내가 살았던 거리를 함께 걸으며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입구를 착각해 반대쪽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다는 그를 기다리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출근할 땐 항상 무채색계 슬랙스, 프라이빗에서도 실용성을 중시해 짱짱한 진만 입고 다녔는데 오늘은 연분홍색 플리츠스커트 팬츠를 입고 굽이 없는 스트랩 뮬을 신었다. 얼마 전 초여름까지 입을 수 있을 옷을 사러 갔다가 충동적으로 산 것들이다. 이런 여자 같은 차림은 정말 오랜만이라 살 때도, 입을 때도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전신거울이 없는 방에서 책받침 만한 거울로 이리저리 비춰보면서 이걸 입어, 말아 몇 번을 고민하다 나왔다. 너무 오래간만이라 하늘하늘한 천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다리에 감겨오는 느낌도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고, 왠지 행동거지도 조심스러워야 할 것 같은 귀찮음도 따라왔지만 언제나처럼의 틀에 박혀있지 않다는 느낌이 해방감을 주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이런 옷차림을 계속 동경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서 털레털레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크게 손을 흔들었는데도 나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를 향해 걸음을 한참 옮기고 나서 바로 앞까지 갔을 때에도 마스크 때문인지 그는 나를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안녕!"

"오, 안녕. 오늘, 뭐야?"


갑작스러운 인사와 나의 낯선 행색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마스크로 눈만 보이는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뭐긴 뭐야. 데이트지."


슬랙스와 진에 구겨 넣던 시간이 너무 길어져 어떤 내가 진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의 눈이 평소의 나답지 않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스스로가 살짝 부끄러워져 그의 팔짱을 끼고 앞으로 이끌었다.


"아, 배고파. 빨리 가자, 빨리"


내 팔에 이끌려 한참 언덕을 오르는 중에 그가 말했다. 


"나 이런 이야기 잘 안 하는데"

"응?"

"뭔가 예뻐, 오늘."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우리를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바꾸어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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