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람 Apr 18. 2024

반가운데 불편한 연락

지난 3월 말 즈음, 재작년에 졸업한 졸업생에게 연락이 왔다. 항상 밝고 똘똘한 데다, 목감기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교직원에게 간식으로 가져온 귤이나 사탕을 나눠주는 마음 따뜻한 학생이었다. 그 클래스에는 유독 이런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클래스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 모두 다 같이 절차탁마해서 좋은 결과를 이루어 내자고. 그래서 졸업여행에서 해산하는 길에 퇴사 예정임을 전달하면서 '여러분과 같은 좋은 학생들과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여러분이 졸업할 때까지 각자의 성장을 지켜보고 함께 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기쁘다.'라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얏호! 이제야 해방이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게 하는 이들도 몇몇 섞여있었지만 마지막 립서비스라 생각하고 입술에 침을 발랐다. 


"선생님, 라인 아이디 가르쳐 주실 수 있으세요?"


이전에 덴 적이 있어 개인 연락처는 숨겨왔지만, 그땐 퇴사도 있고 아이디를 물어온 친구들은 '전직할 때 이것저것 물어봐야지', '비자 갱신할 때 도움 받아야지'같은 얄팍한 심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가르쳐 주었다. 그 친구들이라면 내가 더 이상 선생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본에서의 첫 직장 생활 중에 곤란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 후 2년이 지났는데 별 큰일은 없이, 아직까지 잊지 않고 가끔 안부를 묻곤 한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고맙고 반갑기만 한 연락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불편함의 비중이 커져가고 있다. '선생님, 보고 싶어요, 몇 월 며칠에 홈파티 할 건데 와 주세요' 하는 연락이 올 때가 특히 그렇다. 1년에 서너 번은 그렇게 오는데, 거긴 우리 집에서 편도로 4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에 있다. 그 친구들이야 근방에 사니 괜찮겠지만 12시 집합에도 나갈 채비를 합쳐 6시에는 이불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는 계산이 선다.


6시. 어디서 많이 보던 시간이라 했더니 학교 출근하던 시절의 기상시간이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매일 가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번. 마음만 먹으면 못 갈 일도 없는데, 그 '마음'이 도무지 생기지 않는다. 매정하게 들리겠지만 내 우선순위는 이미 바뀐 지 오래다. 


당시의 나는 그 친구들이 원하는 골-일본 취업-에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삶의 보람이자 목표였기 때문에 이를 위해 내 개인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도 주저가 없었다. 졸업생들은 그런 나를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담임, 때론 무서운 엄마 같은 사람 정도로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불친절하고 폭력적인 시간이었다. 지금의 나는 나와 내 가정이 어찌하면 더 즐겁게 살 수 있을지에만 집중하며 자연인처럼 살고 있는데 이제 와 다시 담임으로서의 모습을 끄집어내고, 나에게는 괴로웠던 시간 역시 함께 떠올려야 하는 그 자리가 부담스럽다. 2년간의 유대감은 어디까지나 담임과 학생으로서 쌓아 올린 것이지 내 개인적인 모습이나 감정을 드러낸 적도 없고, 이제부터 오픈해서 부족한 인간성을 드러내고 싶지도 않다. 간 일본어는 늘었는지, 일본 사회에 잘 적응했는지, 과거의 뿌리 깊은 책임감이 움찔거리지 않는 것은 아니나, 주말에 8시간을 길바닥에 내버리고 불편한 시간을 스스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마음의 갈등이 일어난다. 




언젠가 다른 기수 졸업생에게 '멀어서 좀 어렵겠다'라고 했다가 '먼 게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거잖아요, 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마음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마음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게 있다'라고 얼버무렸지만 정곡을 찔렸다. 진짜 멀기도 멀지만 마음도 없는 건 맞으니 할 말이 없었다. 


이후, '멀다'는 이야기는 직접적인 '싫어. 안가'로 들려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것 같아서,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게 되었다. 선약 (마트에 장 보러 가야 함)이 있다거나, 일시귀국을 한다거나 (정말이었음), 집에 일이 있다거나(일은 항상 있음)이라고 둘러대고 있는데 내년 즈음에는 '저 사람은 어차피 안 오니까'하고 더 이상 홈파티에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 에둘러 거절하지 않아도 되니 묘한 양심의 가책도 사라지겠지만 정작 아무 연락도 오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섭섭할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유지할 의욕은 없으면서 다만 얇고 길게 지속되길 바라는 건 너무 뻔뻔한 거겠지. 내 쪽에서는 노력도 않고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 하다니, 변명할 여지도 없이 놀부심보다. 


그런 나는 정말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싶긴 한 걸까? 


시간이 지나면 관계도 변화한다. 상대방이 원하고 있을 내 모습, 내가 원하는 내 모습에 연연하지 말고 나는 좀 더 이 시간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저 은사 포지션을 유지하고 싶은 것뿐이라면 어설픈 욕심은 버리고 잠시 잠깐은 서로에게 상처겠지만 용기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앞으로도 이 연을 소중하게 이어나가고 싶은 것이라면 반가운 연락을 불편하게 받으며 심란해 말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추구할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지금 막연히 떠오르는 방안으로는 좀 더 솔직하게 '어후, 우리 집 멀다고 말한 거 잊었어? 4시간 걸려. 무리무리' 너스레를 떨며, 늙어가는 선생님 오라 가라 하지 말고 줌으로 온라인 동창회 하자고 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것이 모두에게 기쁜 결말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몇 살이 되어도, 어떤 상황이 되어도, 

인간관계는 쉽지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미비아 옹달샘에도 토끼가 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