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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pr 24. 2024

길에서 주워 온 남편의 마음

어제저녁, 퇴근한 남편은 줄 것이 있다고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얼른 날짜를 헤아려 보았지만 헤아린 것이 무색할 만큼 아무 날도 아니었다. 남편은 입꼬리를 실룩실룩 하며 겉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수줍게 내민 남편의 손바닥 위에는 티슈로 조심스럽게 싼 다육 잎들이 들어 있었다. 


겉에 상처가 있는 잎 하나, 시들어 잘라내 버린 듯 물컹해진 얼굴 하나. 


우리 집 기존 다육 잎들의 지난주 토요일(왼쪽)과 오늘(오른쪽) / 4일 만에 쑥쑥 자란 것이 눈에 보인다


다육식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진 내가 매일 새 잎이 얼마나 자랐는지 브리핑을 하는 사이, 남편도 어느새 자주적으로 다육식물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느 날, 남편은 근처에 다육식물을 많이 기르고 있는 집을 보았다고 했다. 항상 지나던 길인데도 보이지 않다가 시점이 바뀌니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다 어제, 여느 때처럼 지나다가 길가에 잎이 몇 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어차피 그대로 두면 자동차 바퀴에 짓눌려 버릴 것 같아 주워왔다고 했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일요일에도 그냥 왔고."


그날은 지역 마르쉐 이벤트에 다육식물을 사러 가기로 했던 날이었지만 오전 중에 미뤄둔 가계부 정리를 하다가 돈과 가계부가 맞지 않는 오류를 발견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이벤트 종료 시간에 쫓겨 집을 나섰는데 그런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그냥 돌아온 것을, 남편은 '사고 싶은 것을 가계부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 사지 못했다'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다 길가에 버려진 다육 잎을 보고 내가 기뻐할 것이라 생각해 주워온 것이다.



비록 버려진 것이었다 하더라도, 다육 조각을 주워와 준 남편의 순수한 마음이 내겐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꼭 무슨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뭔가 비싸고 좋은 것이 아니더라도 서로 떨어져 있는 일상 속에서도 남편이 나를 떠올리고, '이거 가져가면 좋아하겠지?' 하며 조심스레 잎을 줍고, '가만, 이대로 가져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싶어 티슈에 돌돌 말아 가져왔다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랑이 느껴진달까. 때때로 (피차 마찬가지겠지만) 그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화가 나고 짜증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럴 때야말로 그의 허물에 덮여 보이지 않을 이 순수한 마음을 떠올려 보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순간의 분노에 본질을 잊지 않도록 말이다. 


날이 밝고, 흙 위에 임시로 올려둔 녀석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붉은 기를 띄고 있는 녀석은 가느다란 실뿌리가 하나 나와있어 희망적이지만 자구가 나와주려나 모르겠고, 머리는 잘린 곳에서 그대로 뿌리가 나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어찌 되려나. 어쨌든 간에 나는 주워온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이들을 최대한 잘 돌보아 보기로 마음먹었다. 주운 사람의 마음도 갸륵하지만, 나는 이 이파리들이 남편의 고운 마음 그 자체인 것 같아 어떻게 해도 허투르게 볼 수가 없다. 


잎 모양과 색깔을 인터넷상의 사진들과 하나하나 비교해 보고, 이것이 슈레이(秋麗), 한국에서는 프란체스코 발디라 불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비교적 기르기 쉽고 튼튼한 품종이라 한다. 만약 이 봄에 기적이 있다면, 길에서 주운 남편의 따뜻한 마음이 무사히 싹을 틔워내고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집 키친카운터 위 작은 다육정원을 한층 더 화사하고 따뜻한 시간이 흐르는 공간으로 꾸며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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