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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May 07. 2024

예비 시부모를 웃기려고 하지 마

우리 집 일본인 #23

거기 웃기러 가는 거 아니다. 넌 그냥 웃고만 있어.

알았지? 절대 웃기려고 하지 마.


그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 했을 때 오래된 친구 중 하나가 내게 당부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녀가 내 생각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음에 내심 놀랐다. 


고향은 서울이지만 김포에서 공주, 증평을 거쳐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적을 둔 국민학교는 4개나 된다. 가장 빠른 전학은 입학 1주일 뒤. 곧 이사를 가야 하는데 입학은 해야 한다 해서 그리 되었다. 새 학교 교장실에서의 대화는 지금도 생생하다. 인자하게 '3학년이니?' 물으신 교장선생님.


'1학년인데요.'

'이야, 키가 커서 3학년인 줄 알았다.'

'태어날 땐 작게 태어났는데 할머니가 분유를 많이 주셔서 이렇게 컸나 봐요, 헤헤'

 

그땐 정말 천둥벌거숭이였다. 겁도 없고 세상은 다 내 편으로만 가득하다 믿었다. 전학 오자마자 쭈뼛거리는 기색도 없이 웃기는 소릴 하던 나를 순박한 시골 어린이들은 금세 친구로 끼워 주었다. 뭘 잘 모를 때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적극적이고 재미있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맛보며,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이를 항상 좋게 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웃게 하려다 자칫 나 자신이 우스운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지만 사람을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계속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후회스러울 것이란 걸 알면서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나를, 나는 나의 '광대근성'이라 부르며 싫어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오랜 친구는 그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친구야.

내가 안 웃기려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건 시작부터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오늘은 그의 여동생과 동거 중인 그 남자친구까지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과는 구면이었는데, 우리가 정월 연휴에 인사 간다 하니, 자기들도 5월에 가려다 흐지부지 됐는데, 같이 만나면 부모님 시간 조정도 따로 안 해도 되어 좋을 것 같다며 가도 되냐고 물었다. 우리는 결혼 인사를 하러 가는 것인데 그렇게 우르르 만나면 의미가 옅어질 것 같아 탐탁지 않았지만, 본인이 본인 집 가겠다는데 내가 허가를 하고 말 입장도 아닌 것 같아 편한 대로 하라 했더니 이렇게 되었다.


개인실로 된 료테이 타입의 이자카야는 오후 4시 반에도 이미 만실이었다. 지나는 이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벽에 붙어 기다리다 대기가 세 팀 남았을 때 전화를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가 오셨고, 어찌해 볼 틈도 없이 그의 여동생과 그 남자친구가 득달같이 달려가 어머니를 에워쌌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와타나베라고 합니다. 따님께는 항상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인사도 없이 동거부터 시작하게 되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장소가 협소해 그 뒤에 서 있을 수도 없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아아, 선수를 빼앗겼네."




이전에 그의 집 앞에서 어떤 차량과 조우한 적이 있다. 차 빼기를 기다려주는 동네 아주머니라 생각했는데 차가 스쳐 지나가는 찰나 그가 '우리 엄마'라 가르쳐 주었고, 나는 이미 반쯤 지나간 차 운전석을 향해 당황스럽 고개를 숙였다. 뭔가 상당히 찜찜했다.


"안 되겠다. 여기 카시오리(菓子折り, 선물용 과자) 파는 데 없어? 지금라도 들고 가서..."

"괜찮아. 우리 엄마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 아니야."

"다들 그렇게 말하는데 그럼 세상에 고부갈등이 왜 있겠어? 우리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뭔가 불안해. 인사도 안 하는 애라고 생각하실 거야."

"진짜 괜찮아. 만나면 어디 사냐고 물어볼 거고 도쿄인 거 알면 나갈 때마다 코로나 걸린다고 가지 말라 난리일 거야. 갑자기 찾아가면 엄마도 당황할 거고."


하기사,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가 오버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도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럼 그냥 믿어보자 했는데,


"여자친구냐 묻길래 그렇다고 했어."

"그랬더니?"

"인사도 안 하던데,라고..."


아아, 그러게 내가 뭐랬어. (삼십 년 넘게 같이 살면서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 나이 서른 넘은 아들 상대가 도쿄 산다는 거 만으로도 못 만나게 할 거라는 사람이 아들 여자친구 흠부터 잡으려는 그런 사람 맞지, 뭐가 그런 사람 아니야) 분명 이렇게 될 것 같았어. 다 내 잘못이다. 네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인상만 나빠졌잖아.


(괄호 안의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속사포로 내뱉는 내 말에도 그는 태평했다.


"인사했는데 안 보였을 거라고 걱정하다 갔다고 했어. 아,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놀라더라. 한국 드라마 좋아하거든."


아버지는 한국을 싫어하시고, 그나마 한국 드라마 좋아하시는 어머니에게는 어른을 보고 인사도 안 하는 애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이야말로 인사, 그놈의 인사를 아주 똑 부러지게 해서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만회해야 할 것이 있는 와타나베 군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사이, 어머니의 시선이 힐끗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목례를 했지만 이번에도 어머니는 보지 못했다. 와타나베 군이 비켜선 틈을 타 그는 '지금이다! 가라!'라고 속삭였다. 무슨 포켓몬과 트레이너도 아니고. 똑 부러지게 하려던 인사는 안녕하세요, 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담배를 다 피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안내된 곳은 호리코타츠(堀こたつ, 바닥을 파 의자처럼 앉을 수 있게 한 것)가 놓여있는 방이었다. 한쪽에 부모님, 한쪽에 아들딸과 그 파트너까지 줄지어 앉으니 자연스레 나와 그가 어머니를, 여동생과 남자친구가 아버지를 담당하는 듯한 느낌이 되었다.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그저 웃고만 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얼굴 근육은 실룩이고 목덜미는 땀으로 촉촉해졌다. 밉보이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너무 나대서도 안 되는 어려운 시소게임. 아버지 쪽은 오랜만에 온 딸이 재롱을 부리고 남자친구는 잔 빌 틈 없이 술을 따르며 하하 호호하고 있는데 이쪽은 말 수 없는 아들이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맥주만 홀짝이고 어머니는 이 분위기에 혼자 웬 정식을 시켜서 식사를 하고 계신다. 뭔가 말을 걸어 볼 분위기도 아니다. 간간히 한국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를 물어보셨지만 그뿐이었다.


마치 그의 여동생 커플이 메인이고 나는 '그 김에 걔도 볼까'해서 겸사겸사 데려온 듯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아들이 결혼한다고 데려온 사람한테 이렇게 궁금한 게 없지? 그는 오늘 이 자리를 뭐라고 하고 만든 것일까?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듯한 예감이 들었다. 속이 탔다. 차라리 술이라도 맘껏 마실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구려, 백제, 신라 아나?"


드디어 한국을 싫어하는 그의 아버지가 멀리서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거셨다.

일순, 그게 뭐지 하는 눈빛으로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내게 관심이 몰렸다.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아, 네, 삼국시대. 그런데 코-쿠리, 쿠다라, 시라기(*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본식 명칭)라 안 하시고 고구려, 백제, 신라라고 하시네요?"

"내가 역사를 좋아해서 한국 역사책도 읽고 드라마도 보고 했거든. 아, 왕건도 재미있었어."


네, 아버님. 사실 왕건 그 사람이 신라시대엔 장보고였고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기도 하답니다. 현생에선 최수종이란 이름으로 시청률의 제왕을 하고 있고요.


「안돼, 웃기려고 하지 마, 넌 그냥 웃고만 있어. 」


모처럼 다가온 말할 찬스에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머릿속에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에 애써 말을 눌러 담았다. 잠시 한국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 후에도 나 자신에 대해서나, 이제부터 둘은 어찌할 거냐는 질문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홀짝홀짝 마시던 맥주가 동이 났다. 빈 잔을 눈치챈 그가 글라스를 가져다주어 아버지가 병째로 주문하신 보리소주를 함께 마시게 되었다. 예비 시부모 앞에서 말술을 마시는 것도 좀 그렇지만 나도 더는 맨 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어 못 이기는 척 잔을 받았다.


소주는 역시 맥주 나부랭이와 다르다. 자리가 자리라 찔끔찔끔 아껴 마셨는데도 금세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동시에 이 시간을 이렇게 미소만 짓고 한국 위키피디아 노릇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 그의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했다.


"한국을 싫어하신다고 들어서 솔직히 걱정했는데, 아까 고구려, 백제, 신라 이야기로 공통화제를 찾아 주셔서 좀 기뻤어요. 용기가 없어서 아까는 말을 못 했는데 취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의 아버지는 멋쩍은 듯 잠깐 웃으시더니 정부의 외교정책이 싫은 것뿐이지 한국사람 개개인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며,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은 아니라고 하셨다. 


"근데 저 녀석이 이상했던 이유를 좀 알겠더라고. 이제까진 내가 한국 이래서 별로다, 하면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치던 놈이 언젠가부터 '한국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묘하게 한국 편을 들면서 거북해하더라."


도쿄 올림픽 때, 선수촌 숙소에 내건 '신에게는 아직 오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있사옵니다'란 현수막을 일본 쪽에선 반일이라느니,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와 그건 혐한에 의한 과대해석이란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한국인이란 말은 못 했지만,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한국을 덜 싫어하게끔 그런 이야기를 하며 물밑 작업을 하고 있던 것이다.


"뭐 괜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는 퉁명스레 술을 한 모금 마셨고, 그의 아버지는 갑자기 손을 내미셨다.


"이 녀석을 잘 부탁한다."


아마 그즈음부터 갑자기 취하신 것 같다. 헤어질 때까지 몇 번을 악수를 했는지 모른다.




그는 아버지에게는 방금 전, 같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서 결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모임의 중후반까지, 아버지는 아들 여자친구는 말 그대로 인사차 데려온 것일 뿐, 당장 동거 중인 딸과 그 남자친구 (*일본은 한국보다 동거에 관대하고 흔하다) 쪽이 더 현실감 있는 관계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한국 사람을 처음 봐서 대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을 것이고, 인사도 안 하고, 아들보다 나이도 두 살이나 많고, 어떻게 꼬드겼는지 주말마다 아들이 집을 붙어있지 않게 하는 한국 여자란 부정적인 사전정보도 날 어렵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 역시 불편한 카드를 잔뜩 쥐고 있었다. 어머니의 '인사도 안 하더라'도 그렇지만, 한국 사람과 사귄다는 것을 안 아버지가 '본고장 국밥을 먹어보고 싶으니 언제 한번 만들어 오라고 해봐'라 하셨다던가, '네 여자친구는 내가 못 걷게 되면 기저귀 갈아줄 만한 사람이냐?'같은, 별 뜻 없는 농담이겠지만 적어도 같은 세대 한국인들보다 훨씬 더 구시대적이고, 듣는 귀 없다고 쉽게 말씀하신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굳이 안 전해도 될 말까지 전해 향후 고부갈등을 심화시킬 역할을 충실히 할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런 그를 낳고 맘씨 곱게 길러준 분들이니까, 만나기 전에 느꼈던 부정적인 면모에는 애써 눈을 감으려 노력했다. 내 귀로 직접 들은 것도 아니니 그 말의 뉘앙스나 무게감도 채 가늠할 수 없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상상보다 어렵고 나쁜 분들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부모님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아들이 좋다고 하니 딱히 뭘 묻지 않으셨을 것이다. 일본의 가족관계는 한국보다 훨씬 드라이한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이렇게 허락도 반대도 없는 상태로 그의 집에서 우리의 결혼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답게'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한번 만나서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눠본 것 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부모님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서로 다 알 수도 없는데 왜 그렇게 거리낄 것이 많았는가 싶다.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나를 솔직하게 드러냈다면 그의 부모님이나 여동생과의 관계형성에도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아쉬움이 든다.


그런데 우리 엄마 아빠도 딸이 좋다면 좋다고,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까?


함께 도쿄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한시름 놓았다며 홀가분한 얼굴을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사실 좀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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