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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May 21. 2024

코로나 시대의 국제결혼

우리 집 일본인 #25

한국의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기로 한 것은 1월 넷째 주 토요일이었다. 그즈음에는 엄마와의 관계도 상당히 양호한 상태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한창 유행하던 '온라인 노미카이(飲み会, 술자리)' 형식을 차용하기로 했다. 인터넷 랜선 너머이기는 하나, 서로 술과 안주를 준비해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하면 조금이나마 더 편안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하루 전날,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잠깐 전화해도 돼?'


전화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내달렸다.


내용인즉슨, 내가 도쿄에 산다는 걸 3주 전에 알게 된 그의 어머니가 '내일은 도쿄 가지 마. 감염자 수 또 늘었대.'라며 막아섰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될 것이 뻔해 내가 도쿄에 산다는 사실을 숨겨오다가, 직접 만나기 직전에야 털어놓았는데, 그때는 '그게 뭐라고 그런 거짓말을 했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예상대로, 그것도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셨다.


이걸 고민이라고 하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그냥 짜증이 났다. 이 전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머니가 가지 말라고 해서 못 온다는 것인지, 설득할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는 것인지, 이렇게 되었으니 일정을 다시 짜자는 것인지, 아니면 다 큰 남자가 어머니가 가지 말란다고 안 가면 속된 말로 모양 빠지니 내 입으로 오지 말라고 해주길 원하는 것인지.


나는 집에 막 돌아온 참이니 샤워부터 하고 오겠다고 전화를 끊고는 마음의 일렁임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뜨거운 물줄기를 한참을 맞고서도 이 묘한 기분을 깨끗이 도려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샤워를 다 하고도 연락을 하지 않은 채 저녁을 차려 먹었다. 금요일 밤이라 기분 내려고 사온 참이슬과 방어회였다. 쫄깃한 방어살을 질겅질겅 씹고 소주를 한잔 탁 털어 넣으니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가 뭐 하고 있냐는 표정의 토끼 스탬프를 보내오더니 내일은 예정대로 우리 집에 온다고 한다.


'안 와도 돼. 온라인이니까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 삼자통화로 하면 돼.'

'할 수 있지만 너도 보고 싶고...'


그렇다면 애초에 그 자리에서 담판을 지었어야 했다. 한번 늘기 시작한 코로나 감염자 수는 드라마틱하게 줄어든 적이 한 번도 없다. 감염자가 늘고 있으니 가지 말라는 것은 앞으로도 만나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럼 앞으로도 쭉 만나지 말라고?'라고 바로 받아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약속을 어길 수도 없어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온건한 성품에 이끌렸지만, 우리 둘 사이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흑백을 꼭 가려내야 할 때조차 그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고,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보고 싶어도 참아. 감염자는 계속 늘어날 테니 앞으로도 쭉 참아.'

'못 참아.'

'참아. 코로나 걸리면 내 탓 된다고.'

'혹시 지금 화내고 계세요?'

'기분 탓일걸.'


기분 탓이라 했지만 나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이 맞았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까지 직접 가지도 못하고, 온라인으로 예비 장인장모에게 처음 인사드리는 자리다. 내가 이제까지 엄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 있으면서 왜 자기 어머니에게는 내일이 어떤 자리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인가. 설명을 했는데도 기승전 '가지 마'였던 것일까? 내심 결혼을 반대하고 계신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말 잘 듣는 우리 아들을 시험해 보고 싶으신 것일까? 무엇보다 왜 자기 선에서 컨트롤하지 못하고, 또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약속을 내게 하려는 것일까.


다시 한번 메시지 착신음이 울렸다.


'내일은 꼭 갈 거야. 내일은 나한텐 아주 중요한 날이고 직접 뵈러 가지도 못하는데 어렵게 내주시는 시간이니 너와 함께 나란히 인사드리고 싶어. 아까는 말 안 했는데 실은 '내일 갈 생각이라면 나도 더 이상 너희들을 응원할 수 없다'라고 해서... 그러는데 억지로 뿌리치고 나왔다가 나중에 무슨 소릴 할지 모르니까... 근데 내가 어떻게든 할게.'




다음 날, 그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아침에 '오늘 어떻게 되냐'라고 물었더니 지금 이야기 중이라더니, 20분 후 이제 출발한다는 연락이 왔다. '오늘은 인사드리는 자리라 꼭 가야 한다, 다음 주는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왔다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마음 불편해질 것이 뻔한 이야기를 일부터 캐묻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미리부터 적립하고 싶지 않아 더는 묻지도 않고 화제에 올리지도 않았다. 아침부터 지친듯한 그를 보아도 대충 그림은 그려진다.


우리 부모님과 약속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어린 왕자의 여우는 아니지만 3시쯤부터 우왕좌왕 안정을 못하고 있다가 4시부터 둘이 샐러드볼과 카나페를 만들고 차갑게 식혀둔 참이슬을 꺼냈다. 와인이나 맥주가 어울릴 것 같은 메뉴지만 도수가 높은 참이슬이 들어가야 긴장을 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상통화를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는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아빠는 그런 거 없지만 엄마는 원래 표정이 무뚝뚝한 사람이니 화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 것, 흉터에 대해 스트레이트로 물어볼 수도 있는데 동요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또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결혼할 때 경제력도 본다고 하니 통장에 돈은 모았나, 집은 어떻게 할 건가, 부모님 경제력 이런 거 물어볼 수도 있는데 당황하지 말라고 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우리 부모님에게 누굴 보여주는 건 처음이라 잔뜩 긴장했지만 나까지 긴장한 티가 나면 그가 더 긴장할 것 같아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나는 작은 우체국 EMS 박스를 테이블에 올리고 그 위에 노트북을 얹어 카메라 높이를 맞추었다. 얼추 준비를 끝낸 뒤, 가족 카톡방에 준비되었냐고 묻고 영상통화를 걸었다.


낯익은 신호음이 들리고 곧이어 화면에 아빠가 나왔다. 뒤에는 강아지들이 소파를 차지하고 대자로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2층 다락방의 큰 티브이에 화면을 연결했다고 했다. 그의 인중의 상처도 선명하게 비추어졌을 것이지만 아빠는 딱히 아무 말도 없었다.


잠시 후, 1층에서 음식을 가지고 올라온 엄마가 화면에 등장했다. 엄마는 우리를 보더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곤니치와'라고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내가 결혼 소리만 하면 이상하리만치 날이 서있던 엄마와는 다른 모습이라 오히려 내가 놀랐다.


엄마도 자리에 앉고, 우리 넷은 카메라를 향해 건배를 했다. 우리는 소주를, 부모님은 와인이었다. 안주는 부침개라고 했다. 서로 바꿔먹으면 좋을 뻔했다.


현해탄 건너가 아닌,

지척에 있다면.


그런 생각을 안 해볼 수가 없었다.




만약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입국제한도 풀리고 조금 더 안전하게 결혼에 당도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꼭 이 시점에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아무 날도 아닌 날보다 서로 알게 된 그날을 평생 기억할 결혼기념일로 하고 싶었던 것과,


두 번째는 편도 2시간 거리에 떨어져 사는 나와 그가 함께 하려면 둘 중 하나는 일을 그만두어야만 하는데 그는 그의 일에 만족하고 있었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내 일의 프로젝트는 한번 시작되면 1년은 빠져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퇴사 타이밍으로도 적기였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결혼식을 하지 않을 핑계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혼식이 싫었다. 멀리서 바쁘다는 이유로 근 10년은 안부조차 묻지 않고 살던 내가 결혼식 때문에 '어휴,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제가 이번에요.' 하며 친인척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것도, 그렇게 그러모은 친척들 앞에서 어색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짓는 것도 스스로가 뻔뻔하게 느껴져 도저히 하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결혼식에는 양가 친척들 앞에서 배우자를 소개하고, 일일이 드려야 할 인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는 기능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국제결혼은 '어디서 하느냐', '누구를 어떤 방법으로 모시느냐', '어떤 언어로, 어떻게 진행하느냐'도 생각해야 할 문제라,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서 하든 큰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해낼 자신도 없었다. 여태까지 안 먹고 안 쓰며 모아 온 돈을 단번에 태우고 싶지도 않았다. (*개인의 가치관일 뿐, 결혼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초대객들이 나와 그를 보고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어릴 때부터 몇 번이고 보아왔다. '저렇게 큰 딸이 있어? 근데 식을 지금 해?', '높은 군인까지 한 집에서 왜?', '형수, 내가 저쪽에서 들었는데 형수 조카신부가 재혼이야?' 그는 한국어를 모르지만, 알면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들을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혼인신고를 결혼으로 보기 때문에, 식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일은 없지만 결혼식을 결혼으로 보는 한국이 문제였다. 그냥 '안 한다' 하면 우리 친척들이 이상하게 보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왕래도 못하고, 웨딩홀 대여도 어려워 '피치 못하게' 결혼식을 할 수 없는 지금이 내게는 최고의 결혼 적령기라 느껴졌다.


이유를 전부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에게도 결혼식을 하지 않을 것임은 미리 밝혀 두었다. 피로연 정도는 열어도 되겠지만 결혼식은 내겐 맞지 않고 일본에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도. 내가 허례허식이라 생각한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하면서도, 마을회관에 식사자리를 여는 건 어떠냐고 농담을 한 것으로 보아 귀촌한 마을의 보는 눈이 은근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무슨 집성촌도 아닌데 처음 보는 마을사람들은 왜 모으냐 했더니 이야기는 사라졌지만.




한국식 주도를 드라마에서 배운 그는, 내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몸을 돌려 술을 마셨다. 아빠는 그거 어디서 배웠냐고 호탕하게 웃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부모님과 나, 그 4인의 대담이 시작되었다. 혼인신고 언제 할 거야? 어느 동네에서 살 거야? 집은 구했어? 언제 이사가? 회사는 어쩔 거야? 같은, 결혼을 기정사실에 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어닥쳤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돈이 어쩌고, 집이 저쩌고 하는 질문은 하나도 없었지만 엄마 아빠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고, 나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번갈아 가며 통역하느라 뭘 먹지도 못했다. 잔뜩 얼어붙은 채로, 말을 고르기까지 하느라 그의 대답이 늦어지는 사이, 아빠는 참지 못하고 또 다른 질문을 했고, 엄마는 아빠의 질문에 부연설명을 했다. 대혼란 파티. 그래도 모두가 즐거워 보였고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일본어도 모르는 엄마가 일본어로 인사해 줬다는 것이 매우 감동적이었던 듯, 내 부모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따스함을 느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는 예전에 일본어 가르쳐 주는 야학에 잠깐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며, 일본어의 오십음도(가나다 같은 것)를 외워 보였다. 나는 웃긴데,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느라 그렇게 오래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화를 끊고 보니 두 시간 정도 흘러있었다.


"다 끝났다."


양가 부모님에게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오피셜리 하게 약혼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한결 마음은 편안했지만 내겐 아직 켕기는 것이 있었다.


그날, 커다란 티브이 화면으로 우리를 보았을 부모님은 그의 흉터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고, 눈빛이 흔들리는 일도 없었다. 처음부터 축하와 환영 무드였던 것에 오히려 의문이 들어, 나중에 넌지시 물어보니 엄마는 '지들이 좋다는데 어쩌냐'라고 했다. 손의 상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인중의 흉터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한참 지나고 나서야, 전화를 끊고 진이당고모부 이야기를 했었다 말했다. 결혼식을 할 필요는 없지만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든다고도 했다.


이제까지를 뒤돌아 보면, 나는 항상 뭘 부모님 희망대로 해온 적이 없었다. 바꿔 말하면, 나의 가치관을 이유로 부모로서 느끼고 누려볼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게 해 온 것이 아닐까. 대놓고 나를 원망하거나 '그거 하고 싶었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서운한 부분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자식은 또 나 하나뿐이다. 그래서 결혼식이라도 했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아직도 가끔 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엄마 아빠는 결국 자식의 행복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 주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잘 살아야 한다. 잘 사는 것으로 보답해야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다음 주에는 가지 않기로 약속하고 왔다'는 그는, 다음 주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도쿄에 놀러 왔다. 현관에서 마주쳤는데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전히 도쿄의 코로나 감염자 수는 증가추세에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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