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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n 04. 2024

최선이 아닌 최고

우리 집 일본인 #27

"트리트먼트 하시겠어요? 이건 머릿결을 보호해 주는 건데 완전히 상하지 않는 건 아니고요. 이쪽은 프로텍트와 모질 개선에 탁월해요. 이 가운데 거는 그 중간 정도고요. 보통은 비싸도 이쪽을 고르세요."


자본주의 사회의 판매자들은 젠가에 능하다. 가장 완벽한 것에 가장 비싼 값을 매기고 (당연하지만), 블록을 하나 둘 적당히 빼가면서 상품은 뭔가 하나씩 모자라지고 가격은 싸졌다.


이 트리트먼트만 해도 그렇다. 말만 번드르르하지 '이건 싼 게 비지떡이고요, 가운데 건 그냥저냥이고요, 제일 비싼 이게 트리트먼트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아닌가.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제대로 효과가 있는 걸 하거나, 아예 트리트먼트는 거절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지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미미한 효과를 선택하고 말았다.


"그럼 이거로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메뉴판을 치우는 미용사의 손이 어딘지 모르게 맥 빠진 것처럼 느껴진다. 갑작스럽게 들이밀어진 트리트먼트 공격에 '싼 게 비지떡'을 고른 나는, 안 해도 되는 걸 굳이 해버린 호구 같기도 하고, 그들의 유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유유히 잘 빠져나간 안 호구 같기도 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소비생활에서 나타나는 선택지 앞에서, 나는 항상 최고가 아닌 최선을 골랐다. 나라고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판매자들은 영리하고 내 통장은 가벼웠으니까. 월급은 내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1/5이 세금과 사회보험으로 녹아내리고, 남은 것 중 절반 이상이 집주인과 휴대전화 사업자, 인터넷 회선 사업자, 전기, 가스사업자, 지역 수도국의 호주머니로 호로록 들어가 버린다.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먹고살아야 하니 타협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 난리를 치며 살고 있는 걸까.

일본 정부기관, 민간기업, 그리고 건물주를 먹여 살리려고 일을 하는 건지, 나를 건사하려고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을 즈음, 옷장에는 유니클로 같은 싸고 튼튼하고 멋대가리 없는 옷들만 늘어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그 옷들을 꺼내 박스에 눌러 담고 이사를 해야 한다.


그와 나의 결혼생활이 시작될 집이 정해지고 나면.




나의 역대 집들. 도쿄 분쿄구(1K) - 치바 야치요시(1LDK) - 도쿄 이타바시구(1DK)


기숙사와 새 집을 왔다 갔다 손으로 짐을 날랐던 첫 이사를 시작으로, 일본에서는 세 번의 이사를 경험했다. 이전 집과 새 집, 양쪽으로 월세가 나가는 기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타이트한 스케줄로 퇴거신청을 하고 집을 찾아도, 운 좋게 비성수기 시즌에 걸려 매번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렇다고 집 찾기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자본주의 사회의 판매자처럼 건물주들도 이익 계산에 밝았다. 역에서 가까울수록 집은 비싸지거나 좁아졌고 쥐콩만한 설비라도 달아놓고 나면 집세를 올렸다. 이 위치에 왜 이런 싼 집이 있나 하고 보면, 나이가 아빠 뻘이라 지진이 오면 힘없이 픽 쓰러져 버릴 것 같거나, 하루종일 해가 들어오지 않거나, '사고물건'이라 불리는, 이전 거주자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집이었다. 거기에 외국인이 집을 빌리고 싶다 하면 빌려주기 싫다고 거절하는 건물주도 많았다.


이사할 때마다 돈과 시간, 체력에 정신력까지 소모하기 때문에 근시일 내에 또 이사해야 할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안전함과 생활의 쾌적함을 중시해 지진에 강하고 방음이 확실한 철근 콘크리트 맨션, 이유 모를 음침함이 느껴지지 않는 아늑한 집, 공동현관에 오토록이 있어 외부인이 우리 집 현관문 바로 앞까지 들어올 수 없는 집, 무거운 짐도 쉽게 옮길 수 있는 엘리베이터, 저렴한 도시가스, 전철역 도보권, 이것만큼은 철통처럼 지켜왔다. 쿠마가야에 마련하기로 한 우리의 첫 집을 찾을 때에도 그런 조건들을 붙여 찾아다녔다.


집을 산 순간부터 집값이 떨어질 일밖에 없고, 매매냐 임대냐 하는 선택지밖에 없는 일본에서 우리는 그의 직장까지는 차로 1시간 조금 안 걸리고 도쿄 통근권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방 두 개짜리 집을 빌릴 생각이었다. 퇴사해도 일은 계속해서 하고 싶지만 거기서는 커리어를 살릴 방법이 없어 도쿄로 통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하루에 네 시간을 길거리에 쏟아버리고 있으니 이제까지와 별 다를 바 없고, 1인 가구 시절보다 인컴은 늘어나니 내가 버는 돈은 그대로 저축으로 돌리면 둘이서 통장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그런데 들어갈 집이 없다.




시기가 나빴다.

코로나의 맹위는 여전했고, 일본은 3월이 가장 극성수기 이사철이다. 부동산에 갈 때에도 예약을 해야 했고, 그나마 원하는 일시에 예약을 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그 사이에도 괜찮은 물건은 빠르게 빠져나갔다.


또, 지방의 주거 인프라는 도쿄 도심과 달라 내가 원하는 조건의 집은 적고, 이사를 가려는 사람도 없었다. 3월 말부터 들어갈 수 있는 집은 죄다 철골조로 된 벽 얇은 아파트에, 기본요금만 2000엔 가까이하는 비싼 LPG 가스를 써야 하고, 오토록은 고사하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역까지 차로 다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나마 성수기라 집세도 싸지 않았다.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네에 살아야 하는 이유는 오직 나의 미래의 통근 때문인데 적합하지 않은 집을 골라 굳이 여기에, 그 집세를 내고, 그가 아침 6시에 출근하게 하는 건 좀 아니다 싶어 고민 끝에 아예 그의 직장 근처로 방향을 틀었다. 네거티브 한 내가 '찾아보면 거기서도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없으면 만들면 되고!'같은 근본도 없는 포지티브 사고로 밝게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의 미래 자체가 내게 있어서는 최선이 아닌 최고의 선택이라는 확신과, 번아웃으로 상심한 내가 또다시 무리한 사회생활로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 그의 배려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리어를 바꿨다 해서 갑자기 여기다 싶은 집이 '저요, 저!' 하고 툭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인구의 이동이 적어서 그런 건지, 내가 안보는 사이 물건이 팟하고 나타났다가 탓하고 사라지는 것인지, 퇴근 후 매일 부지런히 부동산 어플을 보고 있어도 눈에 보이는 집들은 하나같이 '이유가 있는 집'이었다. 살고 있는 집은 3월 말로 퇴거신고를 했기 때문에 시간도 넉넉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관리회사에 연락해 '퇴거일 조금만 늘려주시면 안 되나요' 눈물로 호소해 볼까. 하지만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한들 늘어난 기한 안에 집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일에는 그 혼자 부동산에 들리고 내람도 했지만 마땅한 집이 나타나지 않은 채 어느덧 3월이 되었다.




우리 동네가 된 동네


"사방에 벽 있고 위에 뚜껑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비바람과 벌레만 피할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래, 우리가 함께 하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중요한 거니까. 정 안되면 내 짐은 본가 빈방에 넣어놓고 잠깐 네 방에서 신세 져도 될까? 어차피 낮에는 강아지 밖에 없잖아. 불안과 비례해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지고 반쯤 체념에 가까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을 무렵, 그가 괜찮은 집을 발견했다며 링크를 보내주었다. 차 없이는 불편한 동네인데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에 드럭스토어가 있고, 멀기는 해도 역까지 못 걸을 거리는 아니라는 것 또한 매력적이었다.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는 수동적으로만 보이던 그가 능동적으로 보였던 첫 사건이기도 했다. 나는 여러모로 아주 기뻤다. 왜 기쁜지 설명은 하지 않은 채 다만 기뻐하는 나를 보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부동산에 문의를 하고 주말에 함께 내람을 하러 갔다.


먼저 물건을 보유하고 있다는 부동산에 가 어떤 집을 찾고 있는지 앙케트 같은 것을 적고 나니 내람을 할 집 말고 다른 집도 함께 보여준다고 했다.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지만 들어서자마자 여긴 아닌데, 싶은 어두움. 게다가 여기가 베란다인가? 하고 베란다 문을 열었더니 내 집, 네 집 울타리도 없이 그냥 뻥 뚫려있는 마당이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옆집 사람과 옆방처럼 마주칠 수 있는, 방범력 제로의 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쉽게 계약으로 가져가려던 부동산의 수법이었던 것 같다. 바로 그다음에 우리가 선택했던 집을 보여주었는데, 집에서 느껴지는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좋았다. 대면형 키친이라 내가 이제까지 살아본 적 없는 일본 가정집 같은 느낌도 신선했다. 아까 그 집보다 집세도, 중개수수료도 더 비쌌지만 나는 '이 타이밍에 이 집이 나타난 것은 운명이다!'라고, 그를 만날 때에도 해본 적 없던 생각을 했다. 벽과 뚜껑이 있는 집이라도 괜찮았던 것은 집도 절도 없는 상황의 최선의 선택일 뿐이지 우리의 새로운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선택은 아니다. 기왕이면 최고의 선택을 하고 싶다. 이제까지 충분히 다음, 다음, 다음으로 밀었던 그 최고의 선택을. 


나는 그를 돌아보자 눈이 마주쳤다.

아마 그도 같은 마음이었던 듯,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여기로 하겠습니다."




이후의 입주신청서 작성, 계약서 작성 등은 그가 계약자가 되어 처리했다.


내가 혼자 집 찾으러 다닐 때에는 항상 부동산 직원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에 산지 오래된 한국 국적의 여성분이고, 일본어도 문제없고 직장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집을 빌려주실 수 있겠냐고 확인부터 받아야 했다. 때로는 '어떤 외국인이든 외국인은 좀 곤란합니다'라고 거절당하기도 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때 집을 빌렸던 외국인들이 짐도 빼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가 건물주들이 후처리로 크게 데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원래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종종 '〇〇인들은 시끄럽고 어쩌고'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실제 겪어본 그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어떤 이들에게는 김치국물을 벽에 발라가면서 매일 동족들을 모아 김치파티라도 할 것 같이 생각되었을 것이다. 억울하다. 우리 집엔 공기청정기도 있는데. 그들도 그랬을까.


이번에는 집을 찾을 때까지가 어려워서 그랬지, 계약에 이르기까지는 이제까지 중에 가장 쉬웠다. '계약자의 혼약자'라는 명칭으로 한국인인 나의 인적사항도 함께 적히게 되었지만, 계약자는 일본인, 보증인은 같은 일본인인 그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이제까지처럼 '외국인에게도 빌려주시냐'라고 임대인에게 확인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기대어 이득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0년 만에 처음이었다.

내 나라였으면 느끼지 않아도 될 감정들,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으면서도 꼿꼿하게 살려 노력했던 나의 10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어울리지 않는 허무함이 일렁였지만, 그런 해묵은 상념에 잠겨 있을 틈은 없었다.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기기 위한 희망찬 준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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