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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May 28. 2024

후련한 헤어짐

우리 집 일본인 #26

"이나바 상, 제 메일 보셨나요?"

"아, 아아... 봤어요. 안 그래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번 주 시간 됩니까?"


메일을 읽었을 학교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내가 운을 띄우고 나서야 면담을 잡자고 했다. 내가 말을 하기 전까진 최대한 모른 척 하려고 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회사를 세 군데 다녔는데 어디든 항상 이런 식이었다. 관리자는 면담을 최대한 늦게 잡으려 하거나 '너무 놀라우니 내게도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시간을 끌었다. 이런 것엔 익숙했다.


[3월 말을 기해 퇴사하려고 합니다.]


서로의 가족들과 만날 계획을 세우던 연말, 나는 그해 마지막 출근일에 관리자 앞으로 메일을 보냈다. 새해가 지나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룹교 관리자인 이와타니 상이 내년 일로 상담할 것이 있다며 말을 걸어온 것이 방아쇠가 되었다.


그녀는 학과 통폐합을 앞두고 졸업반만 남은 그 학교 일도 내가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앞으로 함께 일할 사람들끼리 미리 합도 맞출 수 있지 않겠냐고. 나는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듯한 미간을 숨기려 눈을 반쯤 감으며 (이러면 눈웃음처럼 보인다) 말했다.


"학과 통합은 반가운 일이지만... 글쎄요, 신규 입국이 어려워 신입생 수가 적어졌다고 해도 취활할 학생들이 많아서요. 그쪽이야말로 수가 적으니 혼자 보시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래도 복귀하자마자 무리를 시킬 순 없어서..."


저쪽 학과일을 다 맡아하던 분이 퇴사하고, 입사 반년 만에 출산, 육아휴가로 2년 반 자리를 비웠던 분이 단축근무를 하며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지만 공백은 불 보듯 뻔했다. 합 어쩌고는 핑계고 그 공백을 메꾸려는 것이 본심이었을 것이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인력확보와 복귀자에 대한 배려, 둘 다 중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미 두 명분의 일을 혼자 소화하며 뼈 없는 순살치킨처럼 잘근잘근 갈려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 따윈 없었다. 소속도 다르고 관리자도 아니고 내 코도 석자인 내가 왜 다른 학교 복귀자를 서포트해야 하는가. 나는 무리해도 되나? 나의 무리는 누가 커버해 주지? 명분이 없는 일을 제안하면서 보상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져있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단 교육사업부뿐 아니라, 다른 사업부문에서도 통역을 해달라느니, 외국인 채용자 비자 서류를 만들어 달라느니 하며 나를 찾았지만 업무 외 업무는 당연하게 부탁하면서 보상은 없었다. 채용 당시에 했던 '이전 회사에서 받았던 급여는 보장될 것'이라는 말도 지켜지지 않았다. 내 연봉의 일부를 인질처럼 붙들고 있는 상여 시즌에만 어려워지는 회사. 그렇게 어려우면 무리한 사업 확장은 그만하고 자산만 정리해도 훨씬 나아질 텐데 그건 죽어라고 안 한다.


내가 얼마나 나를 갈아 넣어도 회사는 그것을 모르고, 알려하지도 않았다. 알면 평가를 해야 하고 그럼 돈을 더 주어야 하니까. 좋은 사람들은 지쳐 떠나거나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개똥 같은 것들만 남아 어떻게 하면 덜 일하고 돈은 더 받을까를 생각했다. 우리는 다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팔아 사는 사람들이니 덜 일하고 돈 더 받기를 고민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나만 잘 먹고 잘 살려고 다른 노예의 열정을 착취하고 그것을 자신의 성과인 척 훔쳐가는 건 나쁜 짓이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착실히 관리자로 커나갔다. 그 일에 대해 경력이 있는 사람보다도 학생 때부터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러 사업부문을 돌며 나쁜 것을 배운 사람들만 승진하고 보상받는 적폐가 계속되었다.


그래도 참을 수 있던 것은 '일의 보람' 때문이었는데 그것도 3년이 계속되니 이젠 보람이고 나발이고 잘 모르겠다. 조금만 느슨하게 풀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날이 늘어났다. 내가 가진 달란트가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책정되어 일방적으로 뜯어 먹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직장을 떠올리면 화가 치밀어 올랐고, 어떤 이의 이름에 들어간 한자는 어디 길 가다 간판에서 보기만 해도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전철을 갈아타려 줄을 설 때 나쁜 생각이 든 적도 있고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 즈음, 그가 내게 회사를 그만두고 결혼하자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실시한 직장 스트레스 체크에서는 2년 연속으로 최고 수준의 결과가 나와 산업의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멘탈 헬스를 이유로 휴직권고를 받으면 의료보험에서 나오는 상병수당 받아가며 마음 편한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었겠지만 궁극적인 문제 해결과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산업의에게는 '그냥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아도 된다'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우리 선조들이 말한 '절과 중의 상관관계'에 의하면 부동산인 절은 움직일 수 없으니 발 달린 중이 나가는 게 맞다. 대대손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고.


아, 그러고 보니 옛날 어느 시대 사료에 '왜(倭)와는 상종을 말라'고 기재되어 있다는 걸 얼핏 본 것 같은 기억도 든다. 이게 왜 이제야 생각났을까? 10년 전에 떠올렸어야 했다.


그럼 그와도 만나지 못했으려나.

그건 좀 싫은데.




"연말에 사람 깜짝 놀라게 하기 있어요? 메일 열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니까."


상담실에 앉자마자 이나바 상이 너스레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빨리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조금도 죄송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이유는 뭔가요?"


결혼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간 여기 일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결혼 소리 한마디 잘못했다간 그냥 고토부키타이샤(寿退社, 결혼을 이유로 퇴사하는 것)로 치부되어 버릴 것이다. 퇴사 이유로 내뱉는 말들의 90%가 조직에 대한 불만, 나머지 10%가 결혼이라고 해도 '결혼해서 그만두는구나? 축하해요'라고 할 사람이다.


나의 괴로움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고 해서 조직이 짠하고 변한다거나 못된 인간들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할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또, 퇴사로 인해 커리어의 불안을 얻고 영주권 신청을 몇 년 뒤로 미루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에 의한 결과물일 뿐이지 회사가 책임져야 할 사항도 아니다.


하지만 이 결정에 이르기까지 겪은 수많은 고통과 번뇌까지 가벼이 여겨지고 싶지는 않다. 나의 노동에 걸맞은 평가가 이루어졌었다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또 그 외 이유로 다른 이들이 하지 않는 타 사업부의 업무까지 해야 하는 게 당연시되지 않았더라면 일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는 나머지 연애를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즐겼을 수도 있고, 내가 벌어 먹일 테니 몸만 오라고 그를 퇴사시키고 도쿄에 자리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1학년들을 졸업까지 봐주지 못하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다. 전부 나의 선택이지만 더 좋은 선택지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 존재한다.


여기에.


이나바 상과의 면담에서 업무의 양적, 질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걸 개인 시간 쪼개가며 소화하고 싶을 만큼의 열정도 이미 내겐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적절한 인원 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루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평가가 따라오지 않는 것, 은근슬쩍 구슬려 타교 일까지 맡기려 한다는 것이 나를 더 낙담하게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신년도부터는 주임도 건너뛰고 학과장을 시켜주겠다는 둥, 졸업식 끝나면 좀 쉬다 와도 된다는 둥, 이와타니 상의 학교에 서포트로 들어가는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나같이 현실감 없는 이야기라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중에 가장 웃겼던 것은 그만두면 비자는 어떻게 할 거냐는 이야기였다. 아니, 내 비자는 여기서 준 것도 아니고 다른 회사에서 받은 것으로 전직해 왔을 뿐인데 갑자기 왜 내 비자를 걱정하는 척인가. 그럼 내가 벌벌 떨거라 생각한 건가. 흥, 남이사.


좀처럼 설득되지 않자 이나바 상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했다.

대신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과 자신의 제안과 함께, 내가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고려해 보겠으니 날을 다시 잡자고 했다.


하지만 내 결심은 그리 말랑말랑한 것도 아니었고 내 인생의 새로운 스타트를 끊기 위해서는 나는 이 지긋지긋한 회사를 떠나야 했다. 며칠 후에도 내 대답은 같았다.


"많이 생각해 봤지만, 역시 그만두겠습니다."

많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요. 안타깝네요. 내 계획 안에는 항상 김상이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전혀 감사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퇴직원은 데이터베이스 안에 있는 전용 포맷을 써야 하는데 경로는 나중에 알려줄게요. 거기서 다운로드해서 작성한 후에 내면 됩니다."

"네."

"그런데 정말 그만둘 건가요? 김상이라면 학과 통합 후의 커리큘럼 재편성은 어떻게 할 건가요? 또 우리 조직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더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내 귀를 의심했다.


"그건 떠나는 제가 아니라 남은 분들이 생각하셔야 할 문제 같습니다. 학과 통합 등에 대해서는 보고서로 제언을 드린 상태고요. 그 이상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음 직장이 이미 정해진 건가요?"

"아니요. 당분간은 좀 쉬고 싶어요. 지쳤습니다."

"그럼 비상근으로 근무하는 건 어때요?"


사람 말을 대체 어디로 들은 건가.


"저 되게 멀리로 이사도 갈 거예요."




며칠 뒤에는 이와타니 상이 '제 경솔함 때문에 괴롭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라고 사죄의 메일을 보내왔다. 이봐라, 내가 90% 어쩌고 10% 어쩌고 했잖은가. 스치듯 한 한마디가 내가 퇴사하는 주된 이유가 되어 관리자들 사이로 흘러나갔다. 퇴직원 다운로드 경로를 알려주겠다던 이나바 상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아 나 스스로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찾아낸 퇴직원에는 퇴사의 이유를 기입하는 란이 있었는데 이것저것 할 말은 많지만 어차피 의미 없을 것 같아 '一身上の都合により(개인적인 이유로)'라 적었다. 퇴직원을 내밀자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한 이나바 상은 퇴직원을 받고 제일 먼저 그것부터 확인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금방 다시 덮고는 수첩 사이에 끼워 넣었다. 다행이네요. 별 말 쓰여있지 않아서.


그곳에서의 3년 간이 완전히 최악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즐겁고 감동적인 기억도 있고, 성취감을 맛보았던 날들도, 좋은 동료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어쩌면 내가 경험한 세 개의 회사 중에서 가장 폐쇄적인 일본사회의 민낯을 잘 드러낸 곳이 아니었을까. 덕분에 내가 일본이랑 안 맞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10년 만에 새로 알게 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따뜻함이 더 독보적으로 마음에 스며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징글징글한 곳과도 안녕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내겐 항상 어렵고 낯선 것이었는데 이렇게 신나고 후련한 이별은 또 처음이다. 그것은 탈출의 짜릿함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감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근데 좋아만 하기는 일러. 우리... 알지?"

"응... 알지..."


이삿날은 정해졌는데 이사 갈 집이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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