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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n 11. 2024

치사해서 일본인이랑 결혼하겠나

우리 집 일본인 #28

 '국적, 한국, 주소, 도쿄도 이타바시구...'


이삿짐 박스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는 노트북을 켜고 '선서서'라는 이름의 파일을 열어 그 안에서 요구되는 대로 나의 인적사항을 적고 있다. 며칠 후, 혼인신고서를 제출할 때 함께 내야 할 서류였다.


내가 기재해야 할 내용을 다 적은 후, 아래에 이어지는 본서 내용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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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현재 혼인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1. 저는 본국 법에 의거해 혼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1. 저는 혼인신고서의 각 서류에 거짓 기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번에 뫄뫄와 결혼함에 있어 상기 사항에 거짓이 없음을 자기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선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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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보아도 참 익숙해지지 않는다.

대체 몇 번을 거짓말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치사해서 어디 일본인이랑 결혼하겠냐고.




그즈음의 내 마음엔 몇 개월 만에 강 같은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최종출근일을 받아두어 매일매일 자유의 디데이를 세는 맛에 아침엔 눈이 절로 떠졌고, 양가 가족들과의 관계도 원만해졌으며, 이사 갈 집도 정해졌다. 이사방법에만 좀 과제가 남아있었지만 대부분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잘 모르는 시골동네에서 직업도 없이 지내야 한다는 불안을 완전히 떨구어 낼 수는 없었지만, 최근의 이런저런 문제들이 해결된 지금은 그 불안감을 포함하더라도 걷는 걸음걸음은 마치 솜사탕이라도 밟고 있는 듯 포근하고 달게 느껴졌다. 남은 것은 3월 26일과 27일, 양일 간에 걸쳐 이사를 하고 27일 중에 우리가 살 지역의 시청에 가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는 것뿐이었다.


3월 27일은 일요일이었지만 시청 경비실에 혼인신고서를 내면 그 날짜로 혼인처리를 해준다 했다. 그날은 우리가 처음 알게 된 날, 그러니까 그가 어플에서 처음 내게 메시지를 보내온 날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날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만나본 적도 없던 때지만)이라 결혼기념일로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의미가 큰 날이다.


하지만 전제로는 '서류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 따라붙었다. 국제결혼의 경우엔 혼인자격 증빙을 위해 준비해야 할 서류가 늘어나고, 국적이나 시청에 따라 요구 서류가 늘어나는 경우가 있어 사전에 제출 관청에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고 들어 시청에 국제결혼 시 필요 서류에 대해 문의 메일을 보냈다.


채 2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결혼 축하합니다'라는 따뜻한 인사로 시작하는 답메일이 도착했다. 나는 가끔 내가 빨리빨리의 민족이긴 하구나, 라 느낄 때가 있는데 이런 문의메일을 보내놓고 나면 언제 답이 올지 불안초조하게 계속 메일함을 열어볼 때가 그렇다. 며칠씩 걸리는 일도 다반사인데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시청이다. 이사도 가기 전에 호감도가 올라갔다. 답변에는 한국 국적자의 혼인요건을 심사하기 위해 혼인신고서 외에도 기본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여권과 각각의 번역본, 그리고 시청 전용포맷의 진술서, 선서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심사? 진술서? 선서서?


단어들이 어째 하나같이 무시무시하다. 내가 어떤 기분으로 그 단어들을 보고 있을 것인지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시청 직원은 성명, 생년월일, 국적, 혼인가능 연령인지의 확인과 초, 재혼의 구별, 부모성명을 확인하는 것이 심사 내용이며 진술서와 선서서는 첨부파일로 붙여두었다는 부연설명을 적어두었다. 심사라고는 해도 별 건 아니구만. 약간 불편했던 심기를 누그러뜨리고 메일 안에 첨부된 파일을 클릭했다. '혼인요건구비서류'를 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기본, 가족관계, 혼인관계증명서로 갈음한다는 진술서와, 앞서 기술한 선서서가 한 장으로 묶여 있는 문서가 모니터에 떠올랐다.




외국인은 일본에 호적이 없기 때문에 일본은 내가 어떤 루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때문에 내가 중혼은 아닌지, 거짓된 정보로 결혼하고 제2의 삶(?)을 누리려 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보다 더 많은 서류가 필요해지는 일에는 충분히 납득하고 있다. 내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아마 우리나라 역시 외국인이 한국인과 결혼을 할 때에는 비슷한 내용의 서류를 요구할 것이고.


그런데 머리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묘하게 심사가 뒤틀린다.


아니, 둘이 좋아 결혼하겠다는데 뭔 진술서를 써야 하고 (내용은 둘째치고 문서 제목이 좀 거부감이 들지 않는가), 나의 서류와 혼인상황, 인적사항에 대해 내 양심까지 걸고 선서를 해야 하다니. 이제까지 선서라곤 '국기에 대한 맹세'와 운동회 시작 전에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것을 선서합니다. 청군백군 야야야'밖에 해본 적 없는 사람한테 말이다.


그럼 적어도 남편 될 사람한테도 '저 외국인과의 결혼은 진짜입니까?'라든가, '서류 다 봤습니까? 본인이 알고 있는 사실과 변함이 없습니까?', 이 정도는 확인받으면 좋을 텐데 나만 '너 혹시 선량한 우리 일본인 속이고 위장 결혼하려는 거 아니지?'같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에 뒷맛이 영 개운치 못하다. 지방 소도시에 어떤 부류의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왜 이런 서류를 요구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도 얼추 그림은 그려지지만 정작 선서서를 읽고 쓰며 찔려해야 할 사람들은 내용조차 파악지 못한 채 평온한 얼굴로 누가 '여기 나.마.에' 하면 이름 적고 '여기 히.즈.케' 하면 날짜 적고 땡일 것이다.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자 안타깝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맞을 것이라 했다. 사실 회사에 결혼예정임을 보고하면서 외국인 배우자의 경우 부양서류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물어봤더니 그의 상사가 농담 반 진담 반 "설마 뭔가에 속고 있는 건 아니죠? 영주권이나 돈을 목적으로 한다거나"라고 물었는데 "객관적인 조건으로만 보면 제가 상대방을 속이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웃긴데 씁쓸하다. 그 지역에서 외국인에 대한 인상은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인간이든, 나는 그런 외국인이 되는 것이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결혼을 해야 하나?"

"무슨 소리야?!"

"그럼 너도 뭔가 하나 양심에 걸고 선서해 봐. 결혼은 같이 하는데 나만 하면 왠지 억울하니까."

"평생 소중히 대하고 사랑하겠습니다."

"그렇게 빨리 대답하면 오히려 거짓말 같은데."

"에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이런저런 가벼운 심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결국 진술서와 선서서는 다 썼다. 아자부쥬방에 있는 영사관에서 미리 떼온 내 신분서류들도 모아 한꺼번에 클리어파일에 넣고 가방에 넣었다. 영사관에 간 날은 최종출근일이었다. 오전 근무만 하고 오후부터 유급휴가에 들어가는 형태가 되어 퇴근길에 영사관에 들리기로 했는데, 잔짐을 가져오려고 가져간 백팩이 생각지도 못한 선물들로 꽉 차고 손에는 꽃다발까지 들게 되었다. 영사관에 들어갈 때 X선 검색대를 통과하고 가지고 있는 짐도 전부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해야 했는데 꽃, 샴페인 글라스, 바스솔트, 조미료세트, 손수건세트... 영사관에 일 보러 온 사람치고는 너무 방물장수 같아서 검사하는 사람은 의문스럽고 검사받는 나는 좀 부끄러운 날이었다.


'짐 다 쌌어?'

'아니!'

'...? 내일 이산데 언제 하려고...?'

'목이 아직 덜 나아서... 괜찮아! 밤새 싸면 돼!'


이사하기 전에 침대 같이 앞으로 쓰지 않을 불용품을 먼저 버렸는데, 온수매트만 깔고 자다가 목에 담이 걸렸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지가지하고 있는 나였다.


그런 나는 내일, 달콤하고 살벌했던 나의 도쿄와 안녕을 고한다.

오늘 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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