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일본인 #29
17년 전.
가본 적도 없었지만 일본에서의 삶을 동경했다. 우리 집 형편에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방법을 찾다 보니 워킹 홀리데이를 가게 되었다. 난생처음 타보는 비행기에선 기내식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고, 내릴 땐 시트벨트도 못 풀어 낑낑대고 있으니 옆자리 일본인 아저씨가 말없이 풀어주었다.
일본영사관에 낸 계획서에는 1년 동안 일본 곳곳을 여행할 것처럼 써냈지만 아르바이트가 구해지자 생활에 치여 여행 생각은 쏙 사라졌다. 도쿄에서만 9개월을 보내게 되었다.
"손님 없는 날엔 가만있으면 집에 가라 하니까 뭐라도 해야 해."
선배 알바생이 손걸레 하나를 쥐어주고 창틀을 닦자고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깔깔 웃음소리가 나 뒤돌아 보니 나만 창틀을 붙들고 있고, 다른 애들은 키친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일본에 오고 나는 바보가 되었다. 얇게 썰어 양념장까지 끼얹은 소고기는 그게 그거로 보여 음식을 내갈 때마다 이게 뭐냐 매번 되물었고, 메추리알 껍질을 수완 좋게 벗기지 못해 매끈해야 할 메추리알을 반 이상 엉망진창으로 만든 일도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을 한 적도, 잘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일 못함'에 정당한 사유는 되지 않는다. 때때로 김상이 어쩌고 하는 걸 보아 저들은 지금 저마다 간직한 '찌질한 김상'의 무용담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들리지 않는 척 걸레질을 계속했다.
여기는 '나의 세계'가 아니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전부 다 별 것 아니게 느껴졌다. 나보다 두 달 늦게 들어온 알바생이 900엔 받고 일하는 걸 알았을 때에도 (나는 시용기간이 끝나고도 계속 850엔이었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돈이 아니라 일본에서의 경험을 벌기 위해 온 거니까.
모르는 척 '뭐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하고 다가가니 그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 그냥 잡담. 슬슬 일해야겠다' 하고 아까처럼 일을 찾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난 설거지나 하려고 일본에 온 게 아니야!"
상황이 바뀐 것은 점장 친구라는 료가 새 알바로 들어온 이후였다. 어느 순간부터 매니저처럼 굴기 시작한 료는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나와 일하는 날에는 '홀은 내가 볼 테니, 너는 내가 시키는 것만 해'라며 그릇이 몇 장 쌓이지도 않은 아라이바(洗い場, 설거지 개수대) 앞에 끌어다 놓았다. 뭣보다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말본새였다. 너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으니 설거지나 하라는 듯한.
사회의 때가 덜 묻은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해맑고 순수했으며 분노 조절도 더 못했다. 어느 날, 인내의 한계에 달해 홀에서 열 살이나 차이나는 료에게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손님들에겐 정말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다들 내게 상냥해졌다. 알고 보니 모두 료가 싫다고 했다. 敵の敵は味方(적의 적은 우리 편)라는 말이 있다. 순식간에 나는 그들의 원 안에 들어갔다.
모두가 아주 잘해주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친절이란 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쏟아져 내리고 거둬질 수도 있는 것이라니.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모든 이가 내게 진심을 다하고 있는 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처음 깨닫게 된 것이 일본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인들이 유독 그런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곳에 크게 실망했고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2006년 7월 5일, 하네다 공항에서 김포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느꼈던 그 해방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런 거지 같은 나라, 두 번 다시 오나 봐라.
그 거지 같은 나라가 그리워지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은 빠른 속도로 과거를 미화시켰다. 야비하게 느껴지던 일본인에 대해서도 '소박한 안분지족의 자세는 배울만함'으로 재평가하게 되었다. 도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기회는 쉬이 오지 않았다. 리먼쇼크로 취업시장이 얼어붙었고 일본취업 역시 지금보다 문이 좁았다.
다시 오는 데 6년이 걸렸다. 도쿄는 여전히 차갑고 쓸쓸한 도시였고 나는 또다시 검정도 하양도 아닌 열외자, 회색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10년을 겪는 사이 나는 이 도시를 사, 사, 사...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뭐 그 나름대로 좋아하게 되었다. 한밤중에 가슴이 답답할 때 자전거로 내달리던 네즈, 아침마다 닭튀김을 사 먹던 편의점, 친구 집에서 내려다보던 스미다가와, 벚꽃이 예쁜 우에노 공원, 호수의 밤풍경을 보며 맥주를 마시던 미츠기공원, 8년 만인데도 바로 알아보고 반가워 해준 사람이 있고, 인생선배이자 상사로서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도, 못난 나를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는 친구가 있고, 뭘 해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해 준 곳.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도돌이표처럼 다시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니시신주쿠에서 쪽방살이를 하던 스무 살의 내게는 없었던 것들이 지금은 있다. 그런 도쿄를 떠난다는 것은 소중한 것들과의 결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부 감수하고 귀국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서운하다.
원한다면 언제든 쉽게 가볼 수 있겠지만 나는 나의 도쿄를 익숙함이 아닌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언제 이런 게 생겼지? 언제 이렇게 변했지? 하면서. 나 역시 지금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냐. 그냥. 캐슈너트 먹을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산 캐러멜 캐슈너트는 어느새 절반이 내 입안으로 사라져 갔다. 미안함에 운전 중인 그의 입에도 두 알을 밀어 넣었다. 뒷좌석을 눕혀 트렁크로 만든 자리에는 뒷유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짐이 쌓여있었다.
'죄송합니다. 12만 엔 이하는 어렵겠어요.'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3월은 이사 극성수기다. 이사비용도 '그래봤자 2,3만 엔 더 드는 정도겠지'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비슷한 거리에 3만 엔이던 것이 15만 엔이 됐다. 저렴하게 해 주겠다는 곳도 12만 엔이 마지노선이었다.
살림을 합치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다. 내 벌이가 없어지는 판에 불필요한 지출은 최대한 아끼고 싶었는데 이삿짐센터 부르는 게 이렇게 비싸서야. 그가 큰 짐만 용달업자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그의 차로 직접 옮기자고 했다. 몸은 좀 피곤하겠지만 기름값, 톨비, 용달비 다 합쳐도 절반 이상 싸졌다.
"정말 괜찮겠어? 좀 미안한데."
"뭘. 이건 내 일이기도 한데."
박스와 이불커버를 사 짐을 꾸리는 동시에, 혼자 쓰던 침대와 낡아서 삐걱거리는 가구를 몇 개 버리고 나니 방이 금방 휑해졌다. 내가 여길 떠난다는 것도 더 크게 실감이 났다. 다시 도쿄로 돌아오는 건 어쩌면 이전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 내 마음을 헤아린 듯, 그는 내게 산책을 가자고 했다. 이삿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근처에 자주 가던 곳을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되새겼다.
"여름에 여기, 기억나?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막 뛰었잖아."
"아, 기억나지. 청춘영화처럼 낭만적이었어."
"그땐 몰랐지. 그 사람이랑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찬스인데, 어떻게 할까?"
"찬스는 잡아야지. 없던 일로 할까?"
"어... 농담인데 그렇게 진담으로 받으면..."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이삿날 아침, 그는 아침 일찍 부동산에 들러 집 열쇠를 받고, 들어갈 집 상태를 확인한 뒤 80킬로를 달려와 주었다. 나란 인간은 냉장고 비운다고 계란을 삶아 먹고 있던 때였다.
"생각보다 엄청 빨리 도착했네. 계란 먹을래?"
"아니. 짐은 다 쌌어?"
그의 손에는 회사에서 빌려온 접이식 수레가 들려 있었다.
"아니, 아직 좀 남았는데... 싱크대 하나 분량만큼."
그의 눈에 약간의 어이없음이 스쳐 지나갔다.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침대 없이 딱딱한 바닥에서 자다가 담이 걸려 며칠간 움직일 수 없었던 것과, 이삿짐 싸다가 '이건 버려야지', '이건 계속 써야지' '이건 어쩌지?' 이런 고민과 그 물건에 깃든 추억도 방울방울 생각나고. 먼지는 좀 닦고 박스에 넣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작업이 더디 진행되었다.
그런데 나 같으면 '으이그, 출근 안 한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대체 뭘 하고 있었냐'며 한마디 쓴소리라도 할 법한데, 이 착한 친구는 싫은 내색 하나 않고 같이 남은 접시를 싸주고 무거운 짐도 착착 실어주었다. 원래도 다정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내일부터 남편이 된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믿음직스럽고, 가슴을 옥죄는 듯한 고마움, 그리고 죄책감까지 들었다.
사실은 내가 이 사람을 키우는 포지션이 될 것이란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채울 수 있는 만큼 꽉 꽉 채우고 출발했다. 두 번째 왕복까지 다 끝내고 나니 8시를 훌쩍 넘겼다. 새 집엔 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그날만 그의 본가에 묵기로 했다. 둘 다 녹초가 되어있었지만 달달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혼인신고서를 꺼냈다. 내일은 3월 27일. 시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할 것이다. 그리고 한번 더 옛집에 가서 짐을 싣고, 용달업자에게 냉장고와 세탁기를 인계하면 도쿄에는 더 이상 갈 일이 없다.
혹여 실수라도 할까 싶어 혼인신고서는 한 획 한 획,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썼다. 손글씨를 안 쓴 지도 한참 되어 좀처럼 예쁘게 써지지 않았지만, 내가 혼인신고서를 쓰고 있는 자체도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개발새발 쓴 글씨도 버튼 하나만 딱 누르면 또르륵 예쁜 글씨로 변해있을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 비현실적인 시간이 끝나자, 그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나와 결혼해 줄래?'라 말했다. 순간 눈물이 고일 뻔했는데, 생각해 보니 정식으로 각 잡고 결혼해 달라 소리는 지금 처음 들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도로 쏙 들어갔다. 그런데도 혼인신고서 가져와서 (전출신고 하려고 구청에 간 김에 가져왔다) 너 써, 나도 쓸게, 한 나는 대체 뭘까.
'결혼할 사람은 뭐 느낌이 막 오고 그래? 전기가 통하는 것 같다던가.'
'아니. 그런 거 전혀 없어.'
'근데 무슨 확신으로 결혼까지 간 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결혼식장에 있더라.'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것들이 이제야 알겠다.
모든 것은 그렇게 물 흐르듯 흘러간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혼인신고서를 쓰고 있었고, 내일 우리는 부부가 된다.
1년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