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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n 25. 2024

어플에서 만난 그 남자는 우리 집 일본인이 되었다

우리 집 일본인 #30 에필로그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근래 이어진 맑은 날 중에서도 가장 날씨가 좋은 오늘이야 말로 운동화를 빨자. 세제를 푼 물에 꾀죄죄한 신발을 담그고 세탁솔로 한참을 박박 문지르자, 나의 회백색 운동화는 겨우 본래의 모습-흰색-을 되찾았다. 신을 때마다 '아, 이번 한 번만 더 신고 빨아야지' 했는데. 대충 헤아려보니 그런 식으로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다. 징하다, 징해.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음 운동화에도 손을 뻗었다.



햇볕이 잘 드는 에어컨 실외기 위에 신발들을 나란히 널고,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운동화를 보며 어쩌면 나는 신발 세탁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 홀가분한 기분으로 주방에 가 커피를 내렸다. 내린 커피를 얼음을 가득 담은 유리컵에 따라 거실 테이블 앞으로 돌아왔는데 걸을 때마다 유리컵 속의 얼음이 카랑카랑 예쁜 소리를 냈다.


자리에 앉아 지금은 거의 OTT에 접속하는 용도로밖에 쓰지 않는 노트북을 켰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자 낯익은 바탕화면이 나왔다. 문득 오른쪽 아래 날짜를 보니 오늘은 4월 10일.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무슨 날인지 말할 수 있는 낯익은 숫자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을까.


넷플릭스 바로가기 아이콘을 향하던 마우스 커서를 돌려 하얀 창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2년 전 그날의 풍경과 기분을 단숨에 써내려 갔다.


2021년 4월 10일 토요일 13시 15분.  
나는 JR아카바네 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 있었다.

막 벚꽃이 진,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차가운 공기가 불어오는 계절이었는데 오랜만에 공들인 메이크업에 마스크까지 얹고 나니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한낮의 햇볕은 뜨거웠다.

버스는 야속하게도 그늘 한 점 없는 양지바른 도로로만 달렸다. 아, 안돼. 모처럼 찍어 바르고 나왔는데 땀으로 다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손에 든 손수건을 펄럭여 작은 바람을 일으켜 보았지만 더위를 식히기에는 택도 없었다.

버스 안은 부카츠(部活, 부 활동)를 끝내고 돌아가는 듯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중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저마다 상기된 얼굴로 즐거운 듯 재잘거리고 있었는데, 나는 꼭 버스 안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까지 쓰고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내가 그때 정말 집으로 돌아갔다면? 그런 도타캰(ドタキャン, 갑자기 약속을 캔슬하는 것)은 흔하다. '역시 만나볼 마음의 준비가 안 됐으니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한마디라도 남기면 양반이지. 보통은 갑자기 모든 연락수단에서 블록을 건 뒤 사라져 버린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없었던 것처럼.


그랬다면 오늘처럼, 볕 좋은 날에 땀방울을 흘리며 나와 그의 운동화를 빨고, 아이스커피를 옆에 두고 노트북을 켜 그러모은 기억을 글로 엮어내는 일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그날 만난 누군가-어플에서 만난 그 남자-는 이제 '우리 집 일본인'이 되었다.




2022년 3월 27일 정오 조금 넘긴 시각, 우리는 막 시청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기예보에는 비가 온다 했고 아침부터 잔뜩 흐렸었는데 잠깐 반짝 해가 났다. 전날의 풀리지 않은 피로로 퉁퉁 부은 얼굴에 눈이 부셔 인상까지 쓰고 있으니 도저히 못 봐주겠는지 그가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시청 홈페이지의 안내대로 휴일접수처로 가 혼인신고서류를 제출했다. 간단한 확인절차까지 거쳤는데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데에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인륜지대사의 행정절차가 이렇게 간단히 처리되다니. 허탈하고 설렜다. 이해가 가는가? 진짜 허탈한데 설렌다. 결혼반지도 아직 맞추지 않아 반지도 없었는데 갑자기 왼손 약지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기분. 백 퍼센트 기분 탓인데 그걸 알면서도 뭔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이제 부부라니.


'앞으로 잘 부탁해' 하고 악수를 나눈 뒤, 우리는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주차장에서 시청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다. 평일에는 시청에 별도로 마련된 코너를 배경으로 직원이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는데 휴일제출이라 그런 서비스는 없다. 시청이 나오게 찍으려면 해를 쳐다봐야 했다. 인상 찌푸리지 않고 눈 뜨느라 진땀을 뺐다. 그리고 잠시 고양되어 있을 틈도 없이, 우리는 남은 이삿짐을 옮기기 위해 다시 도쿄로 향했다. 마지막 짐들을 차에 싣고, 냉장고를 실으러 온 용달기사님께 짐을 인계해 우리의 새 집으로 가면 이틀간의 길었던 이사도 끝이 난다.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도쿄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별 볼 것 없는 고속도로를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우리가 1년도 채 되지 않는 연애기간, 그나마 거리두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동안 해본 것보다 못해본 것이 더 많았음을 깨달았다. 그 흔한 영화조차 보러 간 적이 없다. 혼인신고 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웃기지만, 얼마 사귀지도 않고 용케 결혼할 결심을 다 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채팅어플을 통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종류의 강아지를 기르고, 우연히 들어간 이상한 라멘가게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뜬금없이 손금을 봐주고, 잔디밭에 떨어뜨린 이어커프를 그가 찾아다 주고, 둘이 같이 가챠를 돌리면 항상 제일 가지고 싶은 것이 나오고, 함께 있으면 일어나는 크고 작은 행운과 사건들, 그는 '그럴 운명이었던 거야.'라 하고, 나 역시 '운명이란 건 이런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던 시기도 있었다. 우리는 설정과다 커플이었으니까, 운명론에 힘이 실렸다. 어플만남, 국제연애, 중장거리 연애, 만혼, 내외적 문제들. 뭐 이렇게 다 겹쳤냐 하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그냥 다 운명이라 해버리면 약간 좀 억울해진다. 나는 그 정해진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해탄까지 건너 좋은 때엔 외노자로 10년을 고생하다 종국엔 백수가 된 사람이고, 남편은 이 운명을 위해 어릴 땐 놀림받으며 크다가 나이 먹고 나서는 근무 중에 사고를 당해 결혼까지 생각하던 전 여자친구에게 차이게 되는데, 이거 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모두에게 정해진 운명 같은 게 존재한다면 누군가 다른 이에게 할당되었을 20대에 대기업에서 연봉 1억 받는 운명, 나도 그런 달달한 운명을 배당받고 싶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흰색만 밟고 건너면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자기 최면을 걸고, '요즘 길 가다 보는 자동차 넘버에 조로메(ゾロ目, 1111, 5555등 같은 숫자가 반복되는 것)가 많으니 올해는 반드시 복권에 당첨될 것' 같은 소리를 하는, 상당히, 뭐랄까 생활밀착형 미신에 약한 인간이지만, 우리의 인연을 운명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반항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운명의 장난질로 먼 길 돌아온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반, 또 이미 한참 전에 서비스는 종료되었지만 기념으로 남겨두었던 그 채팅어플의 메시지들을 다시 읽다가 본 '이전의 기록' 때문이다.


이전의 기록은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그가 내게 뭔가 말을 걸었던 흔적이었다. 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아 창은 그대로 닫혀 말을 건 날짜만 남아있었다.



그는 나의 뭐에 꽂혔는지는 모르겠으나 (본인도 기억은 못하고 있다) 몇 번이나 내게 대화를 시도했고, 나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 바빴는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메시지를 무시하다가 벚꽃놀이를 계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건 운명이 아니다. 끈기 있게 메시지를 보내오고 작은 일로 삐지던 내 손을 그래도 놓지 않은 그의 노력이자, 무수한 내적갈등과 고민을 뿌리쳐낸 나의 용기가 맺은 결과다. 만날 사람은 만난다지만 신의 역할은 계기를 마련하는 것뿐 아닐까?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인 우리의 드라마는, 우리가 각자의 노력과 용기로 물을 주고 싹을 틔워내 열매를 맺었으니, 이건 우리 손으로 일군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쪽이 훨씬 더 멋있으니까.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수도 있었던 기회, 막역지우를 얻을 수 있었을 찬스, 더 재미있고, 더 즐겁고, 더 행복하고, 더 활기차게 살 수 있었을 가능성들이 우리 주변에 후두둑 떨어져 있는데 무언가에 눈이 가려진 우리는 이를 캐치하지 못한 채 아무런 노력을 하지도, 용기도 내지 않아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던 것처럼 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모든 것을 그저 운명에 맡기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더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게.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일상의 당연함이나 타인과의 비교를 끌어내리고, 그 뒤에 숨어있을 쬐끄만한 행복의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며, 소박하지만 웃음이 끊이질 않는 우리 두 사람의 세계를 울창하게 가꾸고 싶다.


모든 연애의 끝이 결혼으로 귀결되지 않듯, 결혼 역시 무조건 연애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혼으로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조금 더 확장되었을 뿐, 이제까지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래, 우리의 연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장이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안녕하세요. 김이람입니다.


오늘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한국전쟁 발발일이자, 제가 브런치를 시작한 지 딱 1년째 되는 날이고, 한국에 있는 강아지 하루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집 일본인은 오늘 30화를 마지막으로 완결을 내게 되었고, 이로서 제 첫 브런치 북이 완성되었습니다. 일부러 계산하고 한 건 아닌데 어떻게 날이 그렇게 됐네요.


우리 집 일본인은 '싸웠을 때마다 읽으면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이혼방지용'이라는 사적인 기능도 있었지만, 이 글들을 통해 '평소대로라면 이렇게 행동하고 생각했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인해 생긴 일'들을 다시 한번 추억하고 작은 인연을 키워나가는 모습을 공유하면서, 일상 속에 무수히 떨어져 있을 어떤 종류의 가능성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돌아보는 마음, 인연의 소중함, 사랑의 의미, 사람이 사람으로 치유받아가는 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이밀고 마는 현실의 벽을 그려나가고 싶었습니다. 욕심은 많았는데 제 부족함으로 매끄럽게 드러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도 남습니다.


하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 집 일본인을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여러분 덕분에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한분 한분 이름을 글에 올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이 글묶음이 끝나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분이 한분이라도 계시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불행은 저의 행복, 그런 거 아니에요! ㅋㅋ)


그럼 여러분, 더운 여름 건강하게 나시길 바랍니다.

우리 집 일본인은 끝났지만, 조만간 '우리 집 일본인2 : 단맛쓴맛 국제결혼(가제)'가 시작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래 다른 연재와 비정기 단편들도 앞으로 써 나 갈터이니 시간 되시면 이쪽에도 많은 관심 부탁... 케헥


다육식물 기르는 초보 식집사 이야기 : 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https://brunch.co.kr/brunchbook/succulents


밥 해 먹고 집안일하는 이야기 : 열도의 주부생활

https://brunch.co.kr/magazine/lifeof


집에 온 새 쫓는 이야기 : 오지 마새요

https://brunch.co.kr/magazine/nomorebird


잡다한 일본생활 : 일상의 조각모음

https://brunch.co.kr/magazine/piecesofdays


요, 요건 앞으로 열심히 써야 할 추리소설... : 술래잡기: 악플러

https://brunch.co.kr/brunchbook/f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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