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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May 31. 2024

이 여름, 우리 둥지를 살릴 냉면

일본에서는 후루루 냉면

5월 말의 일본은 슬슬 그것이 시작된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훅 다가오는 잘 달구어진 공기에 이 집 거주자 두 사람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창문부터 열어젖히게 하는 더위. 그렇다. 여름의 트라이얼버전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우리 동네는 위로는 군마, 아래로는 쿠마가야에 인접해 있다. 일본에서 덥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동네들이다. 일본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동네 랭킹 이런 명예로운 것들도 많은데 하필 일본에서 제일 더운 동네라니. 그래서 1등이라도 해야 덜 억울할 것 같은가, 자기들끼리는 군마가 제일 덥다, 쿠마가야가 제일 덥다 난리지만 그 사이에 끼어 똑같이 더우면서 동네 이름조차 유명하지 않은 나는 왠지 좀 억울하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혼조시를 기억해 주세요. 여름엔 덥고, 때때로 야생사슴과 멧돼지가 출몰하고, 집 나온 중학생들을 데려다 성적 확대한 아저씨가 살고 (몇 년 전 한국에도 짤 돌던 그 뉴스 맞다), 관동대지진 때 죄 없는 조선인들을 학살한 악랄한 인간들의 후손들이 아직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동네..., 어, 되게 흉흉하네.

이사 갈까.


이야기가 탈선했지만, 어쨌든 벌써부터 덥고 입맛이 없다.

밤이야 창문 활짝 열고 삼겹살이라도 구워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소주와 함께 곁들이면 '크아, 더위가 다 무어뇨, 지금 이 순간이 극락이로세'겠지만 한낮에는 온기가 있는 것을 입안에 넣고 싶지가 않다.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어 소바를 삶아 멘쯔유에 찍먹 하는 것이 주말 점심식사의 암묵적 룰이 되는 이 계절이지만, 올해는 이것이 대세가 될 것 같다.


후루루 냉면

어디서 많이 본듯한 느낌이라면 맞다. 

이름만 다르지 둥지냉면이다.


패키지 리뉴얼 전의 둥지냉면


지금은 물냉은 파란색, 비냉은 빨간색으로 패키지가 바뀌었는데 어째서인지 일본 판매용은 이전의 패키지 디자인에 가까운 것을 쓰고 있다. 이름도 '후루루 냉면'이 되었는데, 친절하게도 아래쪽에 의미도 쓰여있다.


둥지냉면이 나온 지도 꽤 오래되었건만, 정작 한국에 있을 땐 먹어본 적이 없다. 집에서 먹는 냉면은 냉장코너에 들어있는 것을 사서 미리 얼려둔 육수를 살얼음이 살짝 끼어있을 만큼만 녹여 갓 삶은 냉면에 말아먹는 것이 왕도이자 정도라 생각했기 때문에, 봉지라면들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인스턴트 냉면은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일본에 오고 나서 딱 한번 호기심에 사 먹어 본 적이 있지만 딱히 맛있다는 감흥도 없었다. 누군가 장바구니에 넣고 있는 걸 보면서 일본인들은 뭘 몰라서 후루루를 먹겠지만 오리지널의 맛을 아는 나는 이런 쟈도(邪道, 올바르지 않은 것)는 취급하지 않지롱 같은 기분도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드럭스토어에서 신라면을 사는데 고 옆의 후루루 냉면을 보고 1월에 한국 갔을 때 천서리 막국수를 먹었던 생각이 났다. 나는 비빔막국수, 남편은 동치미막국수를 먹었는데 너무 매워서 눈물콧물 짜면서 먹었던 추억 때문인가 나도 모르게 물냉면에 손을 뻗고 말았다. 그땐 남편한테 이맛저맛 보여주고 싶어 비빔막국수를 시켰지만, 사실 난 동치미 국물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그 맛이 비슷한 맛이라도 느껴보고 싶어 두 개를 손에 들었다.


처음엔 금요일밤의 파티 후에 시메(음주 후에 먹는 탄수화물)로 먹을 생각이었다. 시원한 동치미국물과 함께 메밀면을 후루루 삼키고 나면 숙취가 쌓일 틈도 없이 흘러내려가 버리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뉴진스 컴백으로 한껏 흥이 올라 어깨춤을 추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냉면은 먹을 새도 없이 뻗어버리는 바람에 30도 가까이 오른 다음 날 늦은 점심상에 오르게 되었다.


물탄 스프를 차갑게 식히는 대신 얼음을 두어 개 퐁당퐁당 떨어뜨리고, 끈적하게 우러난 메밀면수 사이에서 건져 올린 면을 찬물에 씻어 물기를 탈탈 턴 뒤, 한 움큼씩 집어 육수그릇에 담았다. 급하게 삶은 계란과 야채실의 오이가 고명의 전부였지만, 훌훌 넘어가는 부드러운 면발과 겨자와 식초를 넣은 시원한 국물이 덥고 늘어지는 주말 오후를 몸 안 쪽에서부터 짜릿하게 깨워 일으켰다. 일본식으로 뜨거운 면수에 멘쯔유를 풀어 식후에 마셔 차게 식은 속을 달래주니 그건 그것대로 별미였다.


멘쯔유에 찍어먹는 소바도 좋고, 쫄깃한 면발의 히야시츄카도 좋지만, 이 상큼하고 깔끔한 냉면. 이걸 이제까지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아직까지 팔리고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나 보다.


"이거 왜 이렇게 맛있지?"

"매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쟈도를 취급하지 않았던 나는, 새로이 후루루에 반한 어느 일본인과 함께 드럭스토어에 가, 또 똑같이 둥지 물냉면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두 번째는 농심의 계획대로 단단히 걸려들었다. 이것이 설령 최고의 물냉면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리 둥지의 여름 나기를 책임질 귀중한 자원이 되어줄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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