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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09. 2024

아무리 남편이래도 이런 상황은 어색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10시의 가라오케 주차장. 평일의 이른 시간인데도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얼마 없을 정도로 차가 들어차 있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가라오케를 좋아하는 것인가.


남편은 유급휴가를 낸 날이다. 쉬는 날이 아닌 날에 쉰다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들뜨게 하는 날. 나야 유급휴가도 뭣도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남편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그 공기, 그 햇살, 그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뭘 해야 근처에서도 재밌게 놀았다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봤다.


나의 첫 브런치북 우리 집 일본인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우리는 옛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첫 데이트에도 가라오케에 갔고, 그 이후도 종종 낮에 들어가 저녁 무렵 목이 쉬어 나오는 '가라오케의 날'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사는 곳은 도보로 40분은 걸어야 가라오케가 나오는데 차를 타고 가면 술을 못 마시고 (맹숭맹숭해서 덜 즐겁다), 걸어가거나 버스나 택시를 타고 나가는 것도 귀찮아 가라오케 대신 집에서 술 한잔 걸치고 유튜브를 보며 음소거로 뻐끔뻐끔 '부르고 싶어 병'을 달래고 있었다.


그래서 가라오케에 가자는 안을 내놓았다. 평소에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제일 휴가기분이 날 것 같아서.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낮술을 즐기며 노래를 부르고, 저녁 무렵에 나와 근처 호르몬(ホルモン, 일본 곱창) 집에 가 배를 채운 뒤 슬렁슬렁 밤산책 하듯 집으로 돌아오자는, 내가 낸 안 치고는 아주 활동적인 안에 남편은 끝까지 '과연 이 계획은 실현될 것인가?' 하고 의심했다.


그런 남편의 의심은 조금 다른 방향이지만 적중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린 것이다.

 


비가 와도 가라오케는 가자는 데 합의한 우리는 일정을 변경해 오전 중에 가라오케에 가기로 했다. 차로 갈 거라 술은 못 마시지만, 생각해 보면 우린 맨 정신에도 미친 사람 같을 때가 있다. 우리 안에 내재된 흥을 믿어보기로 했다.


"몇 시간 하실 건가요?"

"아침 코스로요."

"지금부터 13시까진데 괜찮으세요?"


지금 10시잖아요. 물론 괜찮습니다.


가라오케 직원이 음료 컵과 아이스크림 컵, 그리고 그것들이 딱 들어가 움직이지 않는 전용 트레이를 건네주었다. 우리 방 전표와 함께. 222호실이었다.  




음료수와 아이스크림부터 담고 방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주스와 아이스크림을 들고 무슨 중세 계단처럼 생긴 계단을 올라가는 우리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지만 이것도 포함해 재미있게 느껴졌다. 자, 오랜만의 노래방이다. 전사여, 노래란 노래는 전부 불러주자꾸나.


222호실

"방을 잘못 들어왔나 봐."


문을 열자마자 우리가 마주한 것은 옷걸이 붙박이장이었고 그 옆으로 넓은 파티룸이 펼쳐져 있었다. 뒷걸음질로 나와 방 번호를 다시 살펴보았다.


"여기 맞는데?"

"방이 너무 커."


방 정경

그렇다. 테이블 4개, 족히 10명은 앉을 소파에 그것도 모자라 1인용 보조 소파까지 2개나 들어간 완벽한 파티룸이었다. 에어컨 세 개, 대형 모니터와 벽면을 가득 채우는 빔 프로젝터까지 달려 있었는데 사람은 둘인데 과도하게 큰 방이다. 회식 좋아하는 회사 다닐 때도 가라오케는 자주 갔지만 이렇게 큰 방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왜 두 명에게 이런 방을?"

"실수인가? 나중에 여기 아니라고 옮겨달라 하는 거 아냐?"

"만실이라 이거밖에 없었던 거 아닐까?"

"비어있는 곳도 있었는데?"

"어쩌지?"


방금 전까지의 전의는 순식간에 상실되었고, 순진한 부부의 소심한 전전긍긍이 시작되었다. 결국 '最近私は日本語下手だから、日本人のノが聞いてみて(난 요즘 일본어 이상하잖아, 일본사람인 네가 물어봐)'라는 종용에 남편이 인터폰을 들었다. 직원의 착오도 아니고, 그냥 편하게 쓰시면 된단다.


저희는 안 편한 것 같은데요...

처음엔 정말? 와 신난다, 춤추면서 부르자 하면서 테이블을 한쪽으로 전부 밀어버렸다. 근데 막상 멍석이 깔리자 아무리 그래도 아침 10시부터 맨 정신에 그러기엔 좀 그래서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어디에 어떻게 앉아도 뭔가 이상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던가. 감투를 씌우면 그 감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는 말일 텐데 그 자리라는 것이 물리적인 자리도 말하는 것이었나 보다.


마주 앉아도, 대각선으로 앉아도, 끝에서 끝으로 앉아도. 이제까지 몇 날 며칠을 한 이불 덮고 살아온 남편인데 왠지 모르게 멋쩍고 어색한 공기를 자아냈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익숙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공간에 압도당해 익숙한 사람에게도 멋쩍은 기분이 든단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던 그날의 가라오케도 이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크기는 이 방의 반의 반쪽만 한 크기였는데.


방귀도 뿡뿡 뀌고 트림도 개의치 않게 되어버린 우리에게 이런 부끄러움이 아직 남아있었다니.

오히려 이제까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너무 방만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에 또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이 일었다. 앞으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늙고 보잘것없어지겠지만 얼굴을 팽팽하게 하는 것이나 배가 나오지 않게 관리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익숙함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 일지도 모른다. 가라오케를 나가면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를 적당한 거리낌과 수치심을 찾아와야겠다.



그래도 부를 건 불러야겠단 생각에 너 테이블 한 개, 나 테이블 한 개, 이렇게 나란히, 그러나 조금 떨어져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첫 곡은 요즘 우리에게 아주아주 핫한 뉴진스의 버블검이었다. 버블버블버블 하는 곳에 가타가나로 바브르 바브르 바브르라고 쓰여있어서 나도 모르게 바블바블 하고 불렀더니 옆에서 폭소가 터졌다. 잘 모르는 곡인데 젊어 보이려고 눌러서 이상하게 부르고 있는 배 나온 과장님 같다나. 가상의 인물이지만 과장님 정도 연차면 나랑 동년배일 것이고, 배가 나온 것도 사실인 데다, 뉴진스의 휠링을 아줌마가 어떻게 살리냐고 오기가 생겨 계속 바블바블 불러줬다. 저는 어떻게 부르나 마이크를 건넸더니 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가창실력을 뽐냈다.


방도 어색하고, 공기도 어색하고, 노래도 어색하고.


그 와중에 한 가지 성과라면, 우리는 장난 삼아 영탁의 찐이야 안무를 외운 적이 있는데 넓은 방에서 안무를 붙여 완곡에 성공한 것이다. 남편은 한국어도 잘 모르면서 찐이야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영탁의 악센트를 살려 꽤나 잘 불렀고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부르고 춤을 췄는지 둘 다 땀범벅이 되었다. 아아, 그래도 이 방이라 다행이야. 우리 집에선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벌벌 떨며 쓰는 에어컨도 팡팡 틀 수 있고.


시간이 지나고 어색함과 민망함에도 익숙해질 무렵, 시간이 다 되어 가라오케를 나가야 했다.

12시 50분, 222호실을 떠나며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今日歌ってて一番気持ちよかったのはやっぱ찐이야だった(오늘 부른 노래 중에 제일 신나게 불렀던 건 역시 찐이야였어)"


K-트로트의 우수함과 더불어 3년 차 부부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 유급휴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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