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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12. 2024

여름은 잔혹하다

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10

늦은 아침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아침부터 화창했기 때문이다. 나는 식물도 아니면서 날이 좋으면 아주 활기차지는 버릇이 있다. 때로는 의욕에 넘쳐 평소 안 하던 짓 -예컨대, 아침 7시에 대청소를 한다거나-을 할 때가 있는데 오늘이 딱 그랬다. 자리 한번 앉지 않고 욕실 바닥 청소다 주방 기름때 청소다, 몸 쓰는 일만 하고 난 뒤에 밥까지 먹었으니, 노곤노곤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부지런 떠는 것도 체력이 받쳐줘야 되는 거구나 생각하며 30분만 눈을 감으려 했는데, 일어나 보니 3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3시간이나 잤는데도 아직 이렇게나 밝다니! 뿌듯해하는 것도 잠시, 베란다에 내어둔 다육이들 생각이 났다.


우리 집은 정남향이라 겨울엔 거실 깊숙이까지 해가 들어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이 얇아 춥다) 여름엔 반대로 해가 짧게 들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이 얇아 덥다) 햇빛이 많이 필요한 다육식물들을 와이어 바스켓 안에 넣어두고, 더워지기 전인 오전 시간에만 베란다 발코니에 내어놓고 들여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낮잠으로 다육이는 아직 베란다에 있었다. 생각나서 다행이라고 콧노래를 부르며 다육이 바스켓을 들고 들어와 언제나처럼 놓아두는 동쪽 창가에 두었다. 여긴 낮에는 직사광선이 들지 않고 바람은 잘 통해서 좋다.


물 준 직후의 퍼플헤이즈

골든카펫이 깍지벌레의 습격에 당했지만, 나의 다육이 정원, 와이어 안쪽의 세계는 전체적으로 호조였다. 깍지벌레는 다른 화분에 옮겨가지 않았고, 핑크베리가 조금 웃자라기 시작했지만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다. 퍼플헤이즈는 여전히 왕성하게 잎을 틔워나갔다. 물을 주면 고 새끼손톱 1/6 정도 크기 밖에 안 되는 이파리들이 일제히 포동포동해지는데, 아, 정말 개구지고 거침없는 친구들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잎 바로 옆에서 또 새 잎이 나온다


그랬던 퍼플헤이즈가 수시간 만에 시들어 버렸다.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잎과 줄기가 상했다. 마치 정수리 탈모처럼.

여느 때처럼 오늘 하루도 잘 놀고 있는지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퍼플헤이즈 화분 한가운데가 휑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잎이 누렇게 뜨거나 시들어 쪼그라들어 있었다. 아까까진 안 이랬는데. 아, 잠깐, 내가 오늘 화분들 들여올 때 애들 상태를 봤었던가? 혼란스러웠다. 확실한 건 아침까진 안 이랬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된 원인은, 뜨거운 햇볕을 너무 오래 쬔 것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핑크베리와 발디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깍지벌레 때문에 격리되어 있던 골든카펫과 다른 화분 그늘 밑에 있던 잎꽂이 새싹들은 화를 면했지만, 핑크베리와 발디도 아랫잎들부터 쪼글쪼글해져 있었다.


어쩌다 한번 햇볕이 뜨거웠던 정도는 별 것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허를 찔렸다. 햇볕의 세기와 시간, 잎에 저장된 물의 양, 바람 등 변수가 있어 그런 일도 벌어지는 모양이다. 어쨌든 물은 먹여야 할 것 같아 물을 주고 다음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데, 집에 온 남편은 내동 화분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삐졌다. 아오, 안 그래도 속상한데 브루투스, 너마저.


잘 모를 때 거의 항상 하는 '추이를 지켜봄' 카드를 쓰기로 했다. 퍼플헤이즈의 마른 줄기를 들춰보니 공중뿌리 (*줄기에서 가느다란 실뿌리가 난 것)가 나 있는 게 보였다. 이것도 뿌리니 이대로 놓아둬도 되지 않을까. 줄기를 조금 눌러 흙에 도닥도닥해주고 지켜보았다. 베란다에 차광 대책을 세우기까지 모든 다육이들은 베란다 외출을 금지하고 동쪽 창문에서 아침해만 쬐이기로 하고.


그러는 사이에도 브루투스가 자꾸 신경을 긁어 그날은 결국 설거지를 하다 숟가락을 싱크대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여담이다)


잘라야 했다

실낱같던 공중뿌리들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마른 줄기가 점점 더 위쪽으로 오는 결과만 낳았다. 마른 밑동을 잘라내고 꺾꽂이를 하기로 했다. 여름에는 생육이 느려져 잎꽂이, 꺾꽂이, 분갈이 다 좋지 않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었다.


잘 보니 하나 말고 전부 다 잘라야 되게 생겼다. 골든카펫을 꺾꽂이할 땐 인위적으로 수를 늘리기 위해 했는데 이번엔 살리기 위한 꺾꽂이라니 초보 식집사에게 강제로 굿닥터 박시온의 영혼이 빙의된 것 같았다. 살려야 합니다, 그냥 두면 퍼플헤이즈는 죽습니다. 병변을 잘라내야 합니다. 손이 푸들푸들 떨렸다.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아직 매달려 있는 아기잎들을 잘라내야 했던 것이다. 그냥 놔두어도 시들어 버리겠지만,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꼭 안락사 같아서. 또 줄기가 어디까지 시들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이런 경우 얼마큼 자르면 좋을지 알 수 없어 전체적으로 짧게 자르고 아랫잎까지 떼어주다 보니 말짱한 잎들도 많이 떼어버려야 했다. 최대한 조심히 만졌는데 저절로 떨어지기도 했다. (*잎이 잘 떨어지는 것은 잎꽂이가 잘되는 종류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길이가 짧아지니 그나마 자연스러워 보인다

작업이 끝나자 이렇게 콤팩트한 화분이 되었다.

퍼플헤이즈는 여름의 직사광선도 주의해야 하지만, 빽빽하게 들어차 바람이 통하지 않으면 그대로 물러버리기도 해, 여름 전에 일부러 솎아주기도 한다고 한다. 그럼 이렇게 된 김에 공간을 여유롭게 하자. 띄엄띄엄 심고 다른 화분 옆자리에도 세를 내 심었다.


(왼쪽) 가위 성능을 실험해 보려고 이전에 뿌리내기 실험 해본 것

노랗게 녹은 걸 봤을 땐 정말 놀랐지만 퍼플 헤이즈는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집에 있던 문구용 가위를 써도 될까 싶어 알코올 물티슈로 닦고 퍼플헤이즈를 잘라 뿌리를 틔워보는 과감한 실험을 한 적 있는데 그때도 가느다란 실뿌리 하나를 내고 그 상태로 심어졌는데도 뿌리를 잘 내렸다.


사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다.

'괜찮을 것 같다' 해놓고 안 괜찮으면 나중에 무안해질 것 같아 방금 하나 뽑아봤는데 (*이러면 안 됨) 뿌리가 나 있더라. 원래 공중뿌리 나 있던 걸 심어놓고 그리 생각하는 걸까 봐 하나 더 뽑아 보았는데 (*이러면 안 됨) 그것도 뿌리가 나 있었던 걸 봐선 아마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해, 바람, 물 관리는 잘해야겠지만 말이다.


눕눕

떨어진 친구들은 이제까지 많은 잎꽂이를 배출해 온 베테랑 인큐베이터에 눕혀두었다. 이 때문에 원래 여기 살던 새싹들은 새 보금자리로 이사시켰다. 긴장되는 작업 속에 티셔츠가 땀에 흠뻑 젖었다. 고생스럽기가 갑자기 쫓겨난 애들만 하겠느냐마는. 오는 이도, 가는 이도 다들 무사히 자라라고 빌면서 옮겨주었다.


하나하나 간격을 두고 올려주기도 버거워 겹치지만 않게 퍼뜨렸다. 수가 꽤 된다. 이것들 전부 다 싹이 난다면 그거야 말로 전화위복, 우리 집 다육계는 퍼플헤이즈 파가 꽉 잡게 될 것이다.


세상 일은 원래 엎치락뒤치락하며 밸런스를 맞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달이 차면 기울지만 또다시 차오르고,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처럼. 식물들에게 넘치는 생명에너지를 주는 봄이 가고, 미친듯한 햇볕과 더위를 몰고 여름이 와 우리 집 퍼플헤이즈들이 수난을 당했다. 도태와 죽음이 따라오는 고난이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퍼플헤이즈들 사이에는 틈이 생기고 바람이 통하고 식집사 김이람도 이 친구들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남은 여름은 (집사가 보필만 제대로 한다면) 퍼플헤이즈에겐 아주 나쁜 상황만은 아닐 것이다.


꼭 우리 집 다육식물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이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잔혹한 여름은 우리를 죽여 씨를 말리려 하고 있는 아니라, 음, 그래, 특별강화훈련, 그런 거라고 소리내어 와하하, 함께 크게 웃어주고 싶. 지금 힘들어 놓으면 엎치락뒤치락, 다음은 편안한 시간도 오는 날이 오겠지. 지금을 견딘 당신은 더 견고하고 튼튼한 방패를 갖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너무나도 안락하고 평안한 일상에 젖어, 여름의 불맛이 알싸하게 맴돌던 지금을,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그리워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부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당신도, 나도, 우리 다육이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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