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11
우리 집 뒤에는 방치되고 있는 땅이 있다. 그늘도 없이 한여름엔 사람 키만한 잡초가 자라나는 노지고, 위치 상 잡초들은 우리 집 베란다에서 받는 것과 비슷한 양의 햇빛을 받고 있을 것이다. 잡초가 아무리 질기다지만 물 저장 능력도 없는 것이 저 정도이니 우리 다육이는 더 잘 버틸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잎과 줄기를 태워먹었다.
이후, 다육이 화분을 담은 와이어 바스켓을 바깥에 내놓을 용기가 사라졌다. 광량이 부족한 실내생활이 길어지는 동안, 아주 오랜만에 준 약간의 물에도 녀석들은 기가 막히게 반응했다. 웃자람이 시작되었다.
이 정도는 웃자람이 아닌 성장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핑크베리는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웃자람이 진행되었다.
모체의 영양분을 아낌없이 뽑아다 천장까지 자랄 기세인 새싹도 있고, 전체적으로 난리다, 난리.
웃자람은 줄기만 멀대같이 키우고 새 잎들이 충분히 크지 못해 다육이를 볼품없게 만든다. 이미 전적이 있어 이번만큼은 웃자람을 막아보고자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눈치도 챌 수 없을 만큼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나의 다육정원은 어느새 웃자람에 지배되고 있었다.
나는 이 웃자람으로 언젠가 남편이 백종원의 요리방송을 보고 한 말을 떠올렸다.
"왜 맨날 '없으면 안 넣어도 된다', '있으면 약간만 넣어주세요' 해? 안 넣어도 되는 거야? 넣어야 하는거야?"나는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융통성 넘치는 한국요리 레시피가 외국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지금의 나는 남편의 그 아리송함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대체 여름철에 햇빛은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일까. 해를 너무 쬐면 죽고 덜 쬐면 웃자라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 걸까. 남편이 보는 백종원 레시피도 넣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그런 거였을까? 멈추지 않는 알쏭달쏭에 고뇌하는 사이에도 다육식물들의 웃자람은 절찬 진행 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가을즈음엔 잭과 콩나무를 보게 될 것이다. 뭘 하긴 해야 할 것 같아 큰맘 먹고 집 밖에 뭘 달아보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종일 해가 드는 베란다에 햇빛을 막는 차광막을 달 것이다. 해가 필요한 다육이들을 위해 해를 막아야 한다니 아이러니하지만.
차광막에는 막을 수 있는 햇빛의 양이 퍼센티지로 표시되어 있고, 보통 40%에서 60% 사이의 것을 고르면 된다. 모 다육농장 사장님은 다육식물의 여름 차광에 대해 ‘남이 하라는 대로 무조건 따라 하지만 말고 자기 환경 안에서 실패도 해보고 답을 찾으라. 다육 잎 좀 태워먹으면 어떠한가, 그것도 경험이다'라는 명언을 남기셨는데, 사장님, 나는 한번 태워먹은 정도로는 답이 찾아지지 않아요. 그래서 몇 퍼센트짜리 차광막을 사면 되나요.
고민을 거듭하다 50% 한장, 70% 한장을 샀다. 크기가 작아 두장을 이어서 써야 했고, 이렇게 차광률이 다른 것들을 나란히 설치해 두면 상황에 따라 다육이를 옮겨 놓아두면 되지 않겠냐는 계산이었다.
사온 차광막은 베란다의 걸쇠를 이용해 설치했다. 베란다에는 세탁건조봉을 끼워 넣어 빨래를 널 수 있게 하는 걸쇠가 붙어있다. 차광막에 뚫린 구멍에 노끈을 꿰어 두장을 서로 연결해 주고, 걸쇠의 큰 구멍마다 노끈을 걸어 차광막이 ㄱ자로 떨어지게 얹었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양옆은 테이프로 고정했더니 꽤 그럴싸한 그늘이 만들어졌다. 차양막 색상 선택지가 없어 흰색과 녹색 두장을 연결해 좀 정신사나워 보이는 것 말고는 만족스럽다. 얼기설기한 차광막에 막혀 햇볕이 약해지는 시스템인데, 차광 50% 쪽 그늘이 확실히 더 여리여리해 보인다. 베란다 바닥에서 반사되어 들어오는 햇볕도 꽤 있었는지 집도 덜 더운 것 같은 의외의 효과도 있었다.
차광막을 쳤어도 맨바닥에 두면 전도열로 화분이 뜨거워질 것 같아 깨진 욕실 의자도 씻어다 놓아 두었다. 하필 한낮의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간 더운 날에 작업하느라 땀으로 흠뻑 젖고 말았지만, 다육이들의 생육복지를 생각하면 이깟 고생이 뭐 대수겠는가.
그런데도 아직 다육이들은 아직까지도 거의 집안에 있다. 차광막을 단 후의 날씨가 줄곧 이랬기 때문에.
비를 맞으면 과습으로 인한 곰팡이병이 생길 수 있어 비가 오는 날은 실내에 들여다 놓고 보니 일주일 넘게 집안에만 두게 되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아 이제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지만 차광막이 활약할 날이 멀지 않았다. 바로 오늘, 내가 사는 관동지방이 츠유아케(梅雨明け, 장마 종료)를 공식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장맛비 덕분에 좀 선선했는데 앞으로는 해가 나는 날이 많아지고 35도 이상의 혹서가 계속될 예정이다.
아직도 '적당한 햇빛과 물의 양'을 찾지 못해 다육식물들의 여름 나기는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웃자라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하는 다육이들을 보면, 유일하게 손발 달린 내가 벌써부터 쉽게 어렵단 말을 뱉어선 안될 것 같단 기분이 든다.
하기사, 내 삶에서 매뉴얼대로 'A를 넣어 B가 딱 떨어져 나온 경험'이 얼마나 있었는가. 이런 나지만, 아니 이런 나니까 다육이들과 함께 고민해 봐야겠다. 혹시 아는가. 그래도 저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헤아려 준 다육이들이, 숨겨둔 다리로 슬금슬금 이동해 적당한 그늘 아래 숨는 일도 생기고, 남은 물은 퉤퉤퉤 화분 밖으로 버려주는 일이 생길지.
아, 그런 일까진 안 생긴다고? 후후후, 나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