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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ug 23. 2024

여름날을 견디는 다육이들

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12

옛날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천체를 관측해 달력을 만들고, 공통된 기상 법칙을 발견해 절기를 정할 생각을 다 했을까? 어제는 처서. 전날 저녁부터 바람이 귀신같이 바람이 차가워지더니 오전 중엔 선풍기도 필요 없을 정도로 선선했다. 오늘은 다시 더워졌지만 짧지만 달콤한 한여름밤의 꿈 덕분에 조금만 더 있으면 가을이 올 것이라는 희망도 갖게 되었다. 우리 집은 지금 가을이 절실하다.


다육이들은 그간 고된 시간을 보냈다. 깍지벌레에 당한 골든카펫은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발디는 잎에 검은 줄이 생기며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약을 뿌려 보았는데도 별 차도가 없어 다른 아이들과 격리해 지켜보고 있다. 


휘어버린 핑크베리

늘어난 에어컨 사용량이 다육이들의 활동반경을 줄이기도 했다. 발도 없는 식물이 무슨 활동인가 싶겠지만, 사실 이들은 해나 날씨에 따라 창가와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하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특히 베란다는 유일하게 종일 해가 드는 곳이라 다육이를 위해 여름 햇볕을 부드럽게 해 줄 차광막도 달아두었다. 그런데 베란다엔 실외기가 있어 에어컨을 쓰면 뜨거운 열기로 차기 때문에, 차광막을 단 보람은 사라지지만 다육이들은 창가에서의 붙박이 생활을 시작하고 햇빛도 아침해만 받게 되었다. 


한동안은 별 탈 없이 지나갔는데, 어느 날 핑크베리 둘이 풀썩 쓰러졌다. 다육이들이 햇볕에 버틸 수 있는 힘은 평소 저장한 물을 소모하면서 나오는 것이라 환경에 따라 물 주기의 양도 가감해야 하는데 여름이라고 무조건 덜 주는 것만 생각한 것이 원인이었다.


다행히 줄기가 상한 것은 아니라 다시 심어주고 (한 줄기 뽑아봤다) 철사로 버팀목을 만들어 주고 물을 주었더니 다시 제 힘으로 서게 되었다. 다행이긴 한데, 그 과정에서 생때같은 잎들이 열 장이나 떨어져 주섬주섬 모아 화분 위에 올려놓았다. 싹을 틔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퍼플헤이즈 

흙에 올려놓은 지 한 달을 훨씬 넘긴 이 친구들도 지금 이제 겨우 가느다란 뿌리가 나온 정도라서. 봄에는 2, 3주 정도로 새싹이 돋은 것 같은데 여름엔 역시 잎꽂이도 쉽지가 않다.


다육식물을 기르기 전에는 다년생 식물의 일 년을 '봄에는 싹이 나고, 여름에 쑥쑥 자라, 가을엔 내리막길, 겨울은 휴면'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봄가을을 생장기로 삼는 대부분의 다육이들은 여름에는 성장이 더뎌지고, 겨울을 휴식기로 삼는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어, 이 기간 동안은 새로운 번식활동은 피하고, 물 주기 양과 빈도에도 고민을 해야 한다.


작년엔 그걸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이번엔 그때와는 다르다. 다육이 대부분을 잃어버린 그때의 기억은 '여름이 만만한 계절이 아님'을 각인시켰고, 다육이들의 생활환경이나 상태도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게 했다. 뼈아픈 실패라도 어떤 방향으로 가져가느냐에 따라 그냥 실패가 아니라 다음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는 걸, 다육이를 기르며 다시 떠올렸다.


7월 17일 / 8월 22일

이런 혹독한 여름이지만, 다육이들도 나름의 활약상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름 모를 파키피튬 두 그루와 용월의 모체는 제 역할을 다하고 사라졌거나 사라져 가는 중이지만, 새싹은 이만큼이나 크게 자랐다. 불과 한 달 사이에.


핑크베리 (with 퍼플헤이즈) 잎꽂이들


6화에서 소개되었던 잎꽂이 친구들 역시 꿋꿋이 살아남아 가을을 준비하는 중이다. 이런 쬐그만한 잎으로 물을 모아봤자 얼마나 넣어둔다고. 그런데 그걸 하더라. 하기사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스스로의 구조를 바꾸어 잎에 물을 저장하는 시스템으로 바꾼 녀석들이지. 아무리 힘들고 고된 계절이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시들지 않는다. 먹이 피라미드 제일 아래에 자리하고, 움직일 수도 소리를 낼 수도 없는 식물이지만, 어쩌면 삶에 대한 의지는 그 누구보다 강한 것 같다. 


하... 이런 얘네도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이토록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나는 뭔가. 삶에 별 접점도 없다가 가끔 씩 나타나 제멋대로 구는 시누와 시모 때문에 열이 받네 마네 하고 속상해서 말술을 마시고 앓아누워 생각하던 연재일을 미루는 짓을 하고 말았다. 내 삶의 기쁨과 목표는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마음에 동요가 일어날 때에는 다육이들을 떠올려야겠다. 나도 묵묵히, 내 삶을 기쁘고 풍요롭게 하는 것에 집중을 해야지.


왼쪽 둘이 이전은 재출연이다

7화에서 소개했던 잎꽂이 친구들은 이제 어른이 다 되었다. 오른쪽 아래는 (또) 주워온 프리티인데 처음엔 잎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볼품도 없고, 잘라낸 긴 목대까지 붙어있어 좀 기괴한 매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 이 여름을 겪으며 이만큼 통통하고 반짝이는 잎을 갖게 되었다. 


퍼플헤이즈는 살아남았다

더위가 시작되자마자 폭삭 녹아버렸던 퍼플헤이즈 역시 건재하다. 가느다란 녹색 줄기는 요즘 새로 자란 부분일까 싶고, 큰 줄기가 드리우는 그늘 사이로는 작은 아가잎도 자라고 있다. 며칠 전에 준 리키다스 (활력제)와 그간 에어컨을 팡팡 틀어놓고 살아서 얘가 계절을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식물들을 매일 꼼꼼하게 지켜보면서, 원인과 결과를 따져보는 시간은 다육이를 기르며 느낄 수 있는 아주 즐거운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육이들을 지켜보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은 '흡사 크레이지 사이언티스트의 모습과 같다'라고 평하지만 아무렴 뭐 어때. 원래 사랑은 크레이지다.


바람 쐬는 다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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