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7
핑크베리 잎들이 한창 으쌰으쌰 싹을 틔워내기 시작할 무렵, 남편이 어디서 다육 잎을 가져왔다. 정확히는 누가 길거리에 버린 다육 잎을 주워왔다. 집에 가져가면 내가 좋아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가 만져본 적도 없던 다육잎을 얼마나 조심스레 집어 들고 티슈에 돌돌 말았을까, 를 상상했다. 마음이 짠했다. 남편의 그 마음이 고맙고 기특해, 그가 가져온 다육이들을 꼭 잘 돌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언제나처럼 먼저 얘네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구글 렌즈로 검색해 보았다. 잎만 있었으면 못 찾았을 텐데 다행히 얼굴이 있어 쉽게 찾았다. 일본명 슈레이, 한국에서는 프란체스코 발디. 세덤만 있던 우리 집에 처음으로 온 세덤 이외의 다육이었다. 봄, 가을에 주로 성장하는 춘추형이고, 더위와 추위에 비교적 강하며 잎꽂이와 꺾꽂이가 되는 올라운더. 게다가 길거리 출신이라니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일 것 같았다. 터프해서 어디 두어도 잘 자랄 것 같은 선입견이 절로 생겼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들은 약골체질이었다. 무자비한 차 바퀴와 발길질을 피해 살아남은 그들은 럭키다육임이 틀림없었으나, 한참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 얼굴은 쪼글쪼글하고 잎 여기저기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어쩌면 본체에 붙어있을 때 병에 걸려, 다른 개체에까지 번지기 전에 주인이 톡톡 자르고 뽑아 저기 담장 너머로 휙 내다 버린 아이들일 가능성도 제로는 아니다.
나였다면 그런 상상을 먼저 해버리기 때문에, 길거리에 버려진 이름도 모를 다육 잎을 차마 주워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내 생각해서 가져왔다 생각하면 '어차피 길에서 주운 것'이라 가볍게 여길 수 없어 이 친구들에게 반드시 인생 2막을 선사해주고 싶은 의지가 샘솟았다. 그래서 앞서 잎꽂이를 한 핑크베리나 퍼플헤이즈보다 더 자주 들여다 보고 더 손꼽아 새싹을 기다렸다. 이러면 빨리 나올까 저러면 빨리 나올까, 흙에 꽂았다 꺼냈다 주위에 물을 뿌렸다 별 짓을 다 했다.
그런 노력을 보상이라도 해주듯, 이 못난이들은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웃음을 안겨주기도 했는데,
흙 속에 집어넣었다 꺼냈더니 난데없이 얼굴이 생긴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짙은 눈썹에 입을 아 하고 벌리고 있는 듯한 모양새라니, 짱구가 따로 없다.
게다가 입에는 새싹을 물고 있다.
이틀 뒤 새싹은 완전히 고개를 내밀었고, 이 즈음, 나는 뿌리라 믿고 있던 것이 이 잎이 본체에서 떨어질 때 뜯겨 나온 섬유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새 잎이 나왔으니 조만간 뿌리도 나오겠지. 싹이 나온 뒤의 안심감은 남다르다. 순식간에 다 키워놓은 기분이 든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이 잎은 옆 친구보다 한 박자 느리게 싹이 텄는데, 목이 얼마나 말랐는지 좁쌀만 한 새싹들을 삐죽 내놓자 마자 뿌리 생성에 온 열을 쏟았다.
일단 물을 주었다.
한편, 큰 몸을 가지고 뿌리는 하나밖에 내지 않는 다육이는 실험실로 향했다.
작은 유리병에 뿌리에 닿지 않을 만큼 물을 담고 랩을 씌운 뒤 작은 구멍을 뚫고 그 위에 다육이를 얹어놓았다. 다육이 밑동만 물을 향하게 해 놓으면 뿌리가 빨리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정말일까?
정말이었다.
뭐야, 너도 하면 할 수 있잖아.
하루하루가 다른 성장 스피드를 보이며 흰 뿌리가 힘 있게 뻗어나갔다. 이쯤이면 되었다 싶어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뿌리를 틔우느라 잎 안의 물과 영양분을 소진한 다육이는 이제까지 이상으로 낯빛이 좋지 않았지만,
뿌리가 흙에 닿아 물과 영양분을 들이켜기 시작하더니, 불과 4일 만에 바싹 움츠러 있던 잎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잎의 쪼글거림도 사라지고 나날이 통통해져 가는 가운데, 그 옆에 누워있던 잎의 새싹들은 어느샌가 저들 나름의 규칙을 갖추어가며 자라났다.
여기서 나는 발디라고 생각했던 이들 중 하나는 다른 종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와아아아 하고 한꺼번에 동글동글한 싹들이 튀어나오는 것까진 같았지만, 잎이 나는 모양새가 하나는 로제트형 (장미모양 배열), 하나는 여전한 와아아아형 (뭐라고 이름 붙여야 좋을까)이었다. 와아아아형 새싹이 나는 붉은색 도는 잎이 발디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싹만 가지고는 판별을 할 수가 없어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는 잠시 묻어두고, 더이상 시간이 흐르기 전에 커다란 친구를 정식거처로 옮겨주려 분갈이를 했다. 이 친구가 몸을 뉘었던 화분은, 사실 빵에 발라먹는 단팥 페이스트 용기다. 비닐포트보다는 두껍지만 이 역시 소프트한 재질이라 살살 눌러주면 단단했던 흙들이 부드럽게 조각나며 식물을 뽑아내기 쉬워진다.
화분에서 끄집어낸 발디는, 12일 만에 뿌리가 이만큼이나 자라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사람 불안하게 하더니, 다육이 제일 꼭대기에 있는 얼굴을 뎅겅 자른 것이라 그런가, 잎 한 장짜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파워다. 뿌리가 아직 얕을 것이라 생각해 화분에 미리 흙을 많이 담아놓았었는데 다시 퍼냈다. 이런 두벌일이라면 춤을 추면서 하지요.
분갈이는 둥지냉면 용기 위에서 진행되었다. 요즘 자주 신세 지는 둥지냉면. 면은 먹고 그릇은 다육식물 분갈이 도우미, 화분받침, 다육용품 보관함으로 다방면으로 활약 중이다. 정말 아낌없이 주는 둥지냉면이 아닐 수 없다. 발디는 잎이 불균형하게 뜯겨 있던 것이라 어쩐지 불안정한 모양새지만 벌려진 안쪽 잎 사이로 새 잎들이 피어오르면 좀 예뻐질 것이라 기대해 본다.
이후, 이 아이는 이렇게 쑥쑥 자랐다. 처음 화분에 옮겨 줄 때는 12장이던 잎이 한 달 만에 17장으로 늘어났고, 지탱해 줄 잎이 부족해 어쩐지 삐딱했던 모습도 많이 안정을 찾은 모습이다. 더운 날 햇빛을 너무 받아 잎은 다시 쪼글쪼글해졌지만 이 여름만 잘 나고 나면 한결 더 예쁘게 자라줄 것이다.
그리고 단팥통 화분에 남은 다육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고 하니,
이렇게나 예쁘게 자라주었다. 백조가 된 미운 오리새끼의 다육식물 버전, 미운 다육새끼(어째 욕 같다). 길에서 주운 비실거리고 상처투성이 잎에서 이렇게 곱고 건강한 새 잎이 돋아났다. 만약 남편이 주워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들에게 누워 지낼 곳을 마련해 주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을 모습이다.
귀엽고 예뻐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있지만, 나는 이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시각적인 즐거움 이상으로 큰 희망을 얻고 있다. 어쩌면 남들이 보기엔 울퉁불퉁 못나고 하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한 언젠가는 이 아이들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말이다. 내게는 이 친구들의 존재 자체가 그 희망의 성공사례다.
스스로에게 물을 주고, 햇빛을 주고, 바람을 주자.
저마다 취미가 될 수도 있고, 일이 될 수도, 친구와의 교류, 가족과의 사랑, 꿈을 위해 도전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의 삶에 그렇게 물과 햇빛과 바람을 불어넣어 주려는 시도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렇게 예쁜 싹을 틔워내는 날이 올 수도 있고, 그렇게 꾸준히 살다보면 예쁜 싹은 못 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다음 스텝을 위한 두엄 정도는 되어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