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6
떨어진 다육식물의 잎은 두 번에 걸쳐 빈 화분 세 개에 나누어 잎꽂이했다. 그 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인큐베이터 앞을 기웃거렸다. 봄가을형 다육식물들에게 봄은 성장의 계절, 식집사의 보필에 뭔가 하자가 있더라도 약간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을 정도로 생명 에너지가 활발한 시기다. 그래서 잠깐 안 보는 사이에 뾰로롱 싹이 돋아나 있을 것 같아 몇 번이고 다육잎들을 들여다보았다.
예전에 구피를 기를 때가 그랬다. 알 밴 암컷 구피를 발견하면 산란통에 넣어두고 이제나 저제나 하고 지켜보았지만, 대부분은 내가 보지 않을 때만 골라 낳았다. 다육이의 발아도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불쑥' 찾아올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림. 약속장소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택배를 기다리는 것도, 집에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뭔가의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것도, 내게 있어선 사실 좀 싫은 순간들이다. 그 조마조마해하는 기분이 별로고, 별로라 하면서도 기대하고 목을 매는 내가 싫어서다.
하지만 잠잠한 다육잎을 들여다보면서, 새롭게 피어날 생명을 기다리는 일은 장르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구피가 그랬던 것처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핑크베리 심은 데엔 핑크베리가 나올 것은 뻔한 일인데도 매일 같은 헛걸음은 기대로 화했다. 아, 빨리 내일이 왔으면, 매일 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다육 잎들은 꿈적도 않고 열흘이 지났다.
이변은 4월 2일에 일어났다. 잎 하나가 평소와 좀 다른 모양새였는데, 옆에 있던 남편은 잘 모르겠다고 원래 이런 거 아니냐고 했다. 그, 그런가? 자신이 없어져 입맛만 쩝 다시고 원래 자리에 놓아두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이틀 후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두고 줌을 당겨 사진을 찍어보았다. 거기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작디작고 작디작고 작디작은 밤양ㄱ... 새 잎과 뿌리가 선명하게 돋아나 있었다. 역시 이틀 전의 이상한 낌새는 막 싹을 틔워낸 것이 맞았다. 16일 만의 쾌거다. 같은 방법으로 사진을 찍어 보니 다른 인큐베이터의 잎들도 싹 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 첫 잎들보다 성장 스피드가 빠른데 그 사이 온화해진 날씨 덕분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싹이 튼 잎은 조금 눌러 흙 안에 묻고 급수를 시작했다. 겉흙이 살짝 젖을 정도로만 주고 흙이 마르면 또 주었다. 4월 중순에 접어들자 완연한 봄날씨가 되었고, 그즈음부터 조금씩 햇볕에 내놓기 시작했더니 흙이 젖어있을 틈이 없었다. 싹이 자랄 때는 물을 많이 마시고 싶어 한다는데 날씨까지 도와준 덕분에 나의 뿌리 깊은 '다육이 물 주고 싶어 근질근질 병'은 올바른 방향으로 발산시킬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온화한 시간을 보내던 중, 몹쓸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뿌리는 잘 자라고 있을까?'
흙에 심은 다육이를 자꾸 꺼내어보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지만 너무 궁금해 핀셋을 쥐고 말았다. 잎을 살짝 집어 들자 아직 깊게 자리잡지 못한 다육잎은 쉽게 딸려 올라왔다. 다육식물을 돌보면서 몇 번인가 식물의 위대함을 느꼈는데 이날의 기억 역시 그중 하나가 되었다. 새끼손톱만 한 이파리 한 장에서 틔운 실낱같이 가느다란 뿌리다. 그런 것에 무슨 힘이 있다고, 본체보다 더 큰 흙덩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살겠다고 말이다.
생각해 보면 다육식물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해 온 녀석들이다. 환경을 바꾸지는 못하니 살기 위해 저 스스로를 바꾼 이들이 약할 리가 없다. 나는 다육이를 기르며 눈에 하는 소소한 변화를 재미있어하고, 누군가를 돌본다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데 우린 누가 누굴 돌보는 중인 걸까. 시골집에서 두문불출하며 글월이나 읽고 쓰다 가끔가다 다육이를 쿡쿡 찔러보는 나는 저들에겐 어떤 식으로 비치고 있을까. 문득 숙연해진다.
이후, 다육잎들은 두 번 더 자잘한 이사를 해야 했다. 환경을 자주 바꾸는 것 역시 좋은 일은 아닐 텐데 다행히도 잘 따라와 주었다. 자라는 속도는 저마다 달랐지만 15장 중 15장, 100%의 발아율이었다. 그렇게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다육잎들에게는 5월이 되자마자 갑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왔다.
항상 그렇듯, 원인은 나다. 오너 리스크라 하던가. 여긴 집사 리스크다. 비가 오는 날 안일하게 물을 준 것이 화근이었다.
'흙이 말랐네. 비도 곧 그친다 하니 괜찮겠지.'
물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비도 곧 그칠 것이라니 언제나처럼 금방 마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비는 멈췄어도 해가 나오지 않아 습도는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고, 다육 잎에 튄 물도 마르지 않은 채 그대로 몇몇 이파리에 검은곰팡이가 슬고 말았다.
햇볕을 쬐어주면 소독(?)이 되어 좀 나을까 하여 햇볕 아래 두고 낫기를 기다려보았지만, 이미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검게 된 부분은 빠르게 힘을 잃고 쪼그라들었고, 물을 빨아들여 통통했던 본체가 새카맣게 녹아 사라지는데 채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이 사고로 핑크베리뿐 아니라 화분수 줄이려고 옮겨 놓은 퍼플헤이즈 잎도 피해를 입었다. 본체만 녹고 새 잎은 살아남은 것으로 보였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집을 여기저기 바꿔주고, 아직 어린잎을 뜨거운 봄볕에 닿게 했는데도 건재했던 그들이,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결국은 작고 여린 식물이다. 왜 우리 집 집사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냐는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물 좋아하는 식집사의 띨빵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곰팡이는 더 번지지 않고 종식되었다. 자력해결이 아닌 하늘의 도움으로 끝났다는 것이 좀 부끄럽지만 어쨌든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핑크베리 14장, 퍼플헤이즈 2장, 생존자들은 안정적으로 자라고 있다. 특히 맨 처음에 잎을 틔웠던 녀석은 에이스 자리를 줄곧 놓치지 않고 있다. 잘 자라는 다육잎은 수분을 충분히 빨아들여 새로 나고 있는 잎뿐 아니라 본체까지도 통통하고 반들반들하게 광택이 난다. 볼 때마다 마음이 뿌듯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곧 여름이 온다. 물 마를 새 없는 장마철과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나는 이 강하지만 여린 식물들을 지켜내야만 한다. 조만간 물뿌리개를 어딘가로 치워버려야겠다. 어떤 종류의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은 아예 본능을 발현시킬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