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5
자력으로 앞 구르기를 할 수 있게 될 때까지의 몇 번이고 어질어질하던 시계, 한창 키가 클 때 매일같이 욱신거리던 무릎, 아이돌을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깨닫고 상심했던 나날들. 이제까지와는 다른 나는 그냥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없던 것을 하게 되고, 어른처럼 키가 커지고, 마음이 성장해야 할 때마다 나는 아팠다. 성장의 바로 전 단계에는 항상 주저와 두려움, 괴로운 성장통이 먼저 찾아왔다.
어쩌면 분갈이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수 있다.
비좁은 비닐포트 안에서 열심히 자라온 다육이를 영양 가득한 새 흙이 들어있는, 마음껏 뿌리 뻗어갈 넓은 화분으로 바꾸어주는 것은 다육이의 더 긴 식생(植生)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단계. 게다가 이 봄, 3월에서 5월은 생장기가 봄가을인 다육이들에게 있어 절호의 분갈이 적기다. 분갈이는 흙이 마른 상태에서 하는 것이 좋다 하여 우리 집에 온 뒤로 물 한 방울 얻어마시지 못하고 다육이들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가마니처럼
얘들아, 이제 다 왔어. 그러니까 떨지 마.
어, 근데 왜 내 손이 떨리고 있냐.
내가 성장할 때마다 성장통을 겪었다는 것을 다육이에게 적용시킨다면, 지금 두렵고 아파야 하는 것은 다육이일 텐데 어째서인지 떨리는 것은 내 손이다.
분갈이 비슷한 것은 해본 적 있다. '비슷한 것'이라 하는 이유는, 작은 컵 안에 옹기종기 살던 다육이들을 뽑아 한, 두 뿌리 씩 다른 유리병 안에 꽂아주는 아주 간단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쑤시개로 화분의 흙 여기저기를 꾹꾹 찌른 다음 살짝 기울여 동체를 잡고 흔들면, 좁은 컵 안에서 뿌리를 길게 펼칠 새도 없던 다육이들이 아주 쉽게 쏙쏙 뽑혀 나왔다. 그리고 새 흙을 담은 유리병에 나무젓가락으로 흙을 움푹 파이게 한 뒤 꽂아주면 분갈이 비슷한 것은 금방 끝났다.
이번에는 같은 종류끼리 군생하고 있는 것을 다른 화분에 통째로 옮기는 것이니 그렇게 쑥 뽑아서 꽂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리 분갈이 동영상도 보긴 봤지만 베테랑들은 어째 하나같이 '그림을 그립시다'의 밥 로스냐. 말하면서도 슥슥 익숙한 손놀림으로 쉽게 하고는 '참 쉽죠?' 하는데, 내가 할 때는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분갈이 중에 뿌리에 붙어있던 벌레가 발견될 수 있다는 선량한 초보 식집사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정보만 현실감 있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우리 집에서 분갈이를 할 사람이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책임져야 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핑크베리의 비닐포트를 꾸욱 눌렀다.
이번 분갈이는 이렇게, 물 빠짐과 뿌리 부분의 통풍을 좋게 하기 위한 배수층을 먼저 깔아주고, 다육이들의 양분과 지지대가 되는 다육 전용 배양토를 넣을 예정이다. 화분이 작으면 배수층은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데, 물 주기 좋아하는 나를 믿지 못하겠어서 조금이라도 배수와 뿌리 썩음 방지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배수층을 만들기로 했다. 배수층에는 입자가 굵은 경석을 쓰는데 겸사겸사 집에 사둔 하이드로볼(수경재배 시 쓰는 입자가 큰 인조흙)을 쓸 것이다. 비율은 하이드로볼이 1이라면 배양토는 2.5~3 정도로. 배양토는 홈센터에서 샀는데 '선인장 재배업자가 만든 다육식물 전용흙'이라는 선전문구에 끌려 손에 넣었다. 이걸로 우리 다육이들은 가정집에 살면서 전문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든다. (내가)
제일 먼저 화분에 망을 깔아주었다. 흙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외부에서 벌레가 들어가지 않도록 넣는 것이라는데 이번에 산 토분은 바닥 물구멍이 정말 코딱지 만해서 이걸 정말 넣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집에 있던 싱크대 삼각코너용 거름망을 잘라 넣었다. 그 위에 순서대로 하이드로볼, 배양토를 부었다. 배양토는 처음부터 다 부어주지 않고 다육이 높이에 맞추어 뿌리가 시작될 지점 정도까지만 부어주고 잠시 대기.
여기서부터가 진짜 분갈이다.
전체적으로 가볍게 주물러 굳은 흙을 부드럽게 한 비닐포트를 엄지와 검지로 살짝 누르며 옆으로 뉘었다. 오른손으로는 다육이의 머리를 가볍게 쥐고, 왼손에 쥔 포트를 살살 흔들며 조심스럽게 꺼냈다.
비닐포트에서 갓 나온 다육이들의 뿌리는 저들끼리도 엉겨있고, 포트 안의 흙을 잔뜩 움켜쥐고 있었다. 오, 이거야 이거. 이거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었던 거지. 얼핏 보니 벌레 같은 건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
나는 조금 대담하게 손가락으로 다육이를 잡고 뿌리를 탈탈 털어가면서 얽힌 뿌리와 흙을 풀어냈다. 이 단계에서 검게 죽은 뿌리는 제거해 주고 너무 긴 뿌리도 조금 잘라주는 것이 뿌리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데, 이때 생때같은 잎들이 열 장도 넘게 후드득 떨어져 내려 그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난 침착하게 잎들을 한쪽에 그러모았다. 핑크베리가 잎꽂이가 아주 잘 되는 친구라는 것을 앞선 호구조사로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땜빵은 좀 생겼지만, 첫 분갈이의 훈장으로 치자.
이윽고 자유의 홀몸이 된 다육이들을 집어 화분 안에 자리를 잡아주고 나머지 배양토를 부었다. 흙과 흙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화분을 톡톡 쳐서 빈틈을 없애주고 가볍게 다져주며 분갈이를 마쳤다. 배양토는 끝까지 부어주지는 않고, 1센티 정도 빈 공간이 남을 만큼만 부었다.
해충이 걱정될 때에는 이때 완효성 살충제 과립을 흙 위에 올린다 한다. 물을 줄 때마다 흙에 녹아들어 다육식물이 이를 흡수하고, 벌레는 잎을 깨물었다가 살충제즙을 마시고 저 세상으로 향하는 시스템인데, 즉시 벌레를 보내버리는 스프레이 타입보다 예방, 보호 작용에는 더 탁월하다는 듯하다. 하지만 작년에 뭣도 모르고 다육이를 길러 볼 때에도 벌레는 생기지 않았으므로 우리 집 다육식물들에게는 이 과정을 패스했다. (이후, 나는 이 행동을 후회하게 된다.)
핑크베리에 이어, 퍼플헤이즈와 골든카펫도 같은 방법으로 저마다 새 자리를 잡아주었다. 다만 골든카펫은 뿌리가 비닐포트 안에 꽉 차 흙과 엉겨있었던지라 거의 풀어주지 못하고 그대로 새 화분에 넣고 흙만 보강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이 역시 나중에 (정확히는 오늘) 후회하게 되지만 그 사실을 알리가 없는 3월 말의 나는 무사히 분갈이를 마쳤다는 것이 마냥 기쁠 뿐이었다.
뭔가 어설픈 분갈이이긴 했지만, 토분에 심긴 나의 다육식물들은 검은 비닐포트에 들어있을 때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는, 말 그대로 '우리 집 애들'이 된 것 같다. 이후 바로 물을 주지는 않고, 일주일간은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밝은 실내에 놓고 새 흙에 적응기를 가졌다.
분갈이를 하며 떨어진 핑크베리의 잎들은 전 주인들이 돌아가시고 비어있던 화분 위에 얹어두었다. 이렇게 하면 저절로 새 잎과 뿌리가 난다고 했다. 100%는 아니고, 뿌리만 나온다거나 (오징어라고 한다나), 잎만 나오는 경우도 있고, 최악의 경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한다. 이미 데려올 때부터 떨어져 있던 두 장을 포함, 총 열다섯 장 중 몇 장이나 발아해 줄까? '혹시 오늘은?!' 하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육잎 인큐베이터 앞으로 뽀로로 달려가길 몇 날 며칠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다육잎들은 심드렁하게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평소와 다른 낌새를 발견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