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4
"와, 라인업이 아주 충실한데?"
나는 지금 일본 다이소의 원예코너 앞에 와 있다. 어느 점포를 가도 제일 안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어 딱히 눈에 띄지도 않고 사람들이 많이 가지도 않는 바로 그 코너. 딱 한번, 아주 예전에 하이드로 볼을 사러 왔을 뿐 그 이후론 스칠 일조차 없었는데 마음먹고 둘러보니 생각보다 상품구성이 아주 충실하다. 화분, 영양제, 물뿌리개 같은 낯익은 것들부터 화분선반, 차양막, 원예가위, 원예용 로프, 지지대, 호미, 낫, 샤워 노즐처럼 야외 가드닝에 필요해지는 것들까지 꽉꽉 들어차 있다. 흙도 관엽식물용, 야채용, 화훼용 등 용도에 맞춘 배합토들이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어 홈센터 원예코너 못지않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흙 바로 옆에는 제초제가 놓여 있던 점이었다.
식물의 삶과 죽음에 관여하는 것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는 모습은 어쩐지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어떤 식물은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데 어떤 식물은 죽여야 할 대상이 된다니.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말이다. 더 크게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식용 가축의 도살, 제3세계 기아문제, 인종차별도 같은 맥락인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엔 진짜 해결되지 않은 고민거리들이 참 많구나. 아아,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다이소에 와서 하고 있는 걸까. 브레이크도 걸리지 않는 뜬금없는 감성 폭발로 사지도 않을 제초제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으니 같이 간 남편이 불안한 목소리로 한마디 거든다.
"그건 왜 보고 있는 거야? 설마..."
미스터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남편을 '아니 아니, 오늘은(?) 아니야'라고 안심시킨 뒤, 화분 쪽으로 눈을 돌렸다. 특별히 아주 예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실용적으로 보이는 다이소의 화분들. 요즘은 깡통에 리메이크를 하거나 예쁜 식기에 구멍을 뚫어 화분으로 사용하는 법도 유튜브에 많이 소개되어 있어 잠깐 혹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오늘은 안전하게, 바닥에 구멍이 뚫린 토분을 살 것이다. 화분 자체에도 물을 흡수하는 힘이 있고 통기성이 우수해 흙이 마르는 데 도움을 주며, 아주 더운 여름에는 다른 화분들보다 외부온도에 영향을 덜 받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물을 머금으면 무거워지는 것이나 표면에 하얀 가루가 생기는 백화현상이 단점이지만 토분이 물과 온도를 컨트롤할 수 있는 힘에 더 큰 점수를 주기로 했다. 일본의 찜통더위와 다육식물에 물 주는 낙(*낙으로 삼으면 다육이 골로 보내기 딱 좋다)으로 사는 나의 손아귀에서 다육식물들을 지키는 데에 조금이나마 공을 세워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은 화분뿐 아니라 내 새로운 다육이들을 돌볼 아이템을 모으러 왔다. 이전엔 그냥 다육식물용 흙과 배수층이 될 하이드로볼만 사면 집에 있는 빈 잼병에 담아 분무기로 물을 주어 기르면 된다고 여겼었는데, 다육이들을 더 잘 돌보아주고, 살식(殺植) 리스크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면 그래도 최소한의 도구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우리 집 다육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리스크는 나의 존재였지만, 음, 뭐, 음....
그렇게 장바구니에 토분을 넣고, 미리 여기저기서 리서치해둔 초보용 아이템들을 찾아 다이소 이곳저곳을 누볐다.
분갈이용 흙과 화분 바닥망(주방 삼각코너망을 이용할 것이다), 가위는 집에 있는 걸 쓰려고 따로 구매하지는 않았고, 지금도 이것들로 다육이들을 돌보고 있고, 다육식물을 기르려는 초보 식집사는 딱 요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분갈이삽의 필요성에 대해선 약간 의문도 있는데, 화분에 흙을 부을 땐 비닐에 든 채로 입구만 조금 뜯어 우르르 쏟아 넣고 다육이 주변에 흙을 메울 때에만 쓰고 있는데 화분이 작으니 플라스틱 스푼 정도로 해결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반면, 물뿌리개와 핀셋은 아주아주 대만족 중인데,
빽빽하게 군집한 다육이들 사이에 떨어진 잎이나, 잎 사이에 끼인 돌을 집어낼 때, 줄기가 가는 골든카펫을 꺾꽂이할 때, 여기저기 옮기다가 위치가 엇나간 잎꽂이 잎을 제자리로 돌릴 때에도 핀셋의 활약이 대단하다. 끝이 뾰족한 것은 쓰다가 다육 잎을 상처낼 수도 있다 하여 마감이 둥글게 처리된 것, 그중에서도 끝이 약간 휜 것이 쓰기 좋다 하여 믿고 따라 샀는데, 아직 사용법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가 힘을 덜 받는 것 같은 느낌에 일자로 된 핀셋이 나았으려나, 싶기도 하다.
또 이 물뿌리개는 좀 더 빨리 만났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다육 잎은 물이 묻은 채로 시간이 지나면 시들시들 녹아 없어지기도 하는데 이 물뿌리개를 사용하면 정확히 흙에만, 원하는 양을 조절하며 물을 줄 수 있어 특히 잎꽂이 한 잎에 물을 줄 때 아주아주 편리하다. 병이 크다는 게 단점인데 일반 페트병에 뚜껑만 갈아 끼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있어 그걸 쓰는 사람도 있고, 실리콘 소스병을 물뿌리개로 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하기사, 꼭 원예용품이라고 쓰여있는 걸 쓸 필요는 없지. 우리 주위에서 구할 수 있고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활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렇게 도구들도 챙기고 나니 한층 더 내가 식집사가 되었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반면, 혹시라도 다육이들의 급사로 나의 다육생활이 조기종영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쩌면 흙 기르는 토분, 녹슨 핀셋, 먼지 뒤집어쓴 물뿌리개가 될 이것들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지 상상해 보면 정신 바짝 차리고 다육이들을 돌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채 만원도 들지 않았지만 이 소비의 본질은 그저 싸게 사모으는 것이 아니라 다육이를 잘 돌보기 위한 것이니까.
많은 햇빛, 충분한 바람, 가끔가다 한번 흠뻑 주는 물, 물이 잘 빠지는 화분과 흙, 그리고 키우는 이의 애정.
이 다섯 가지 힘을 하나로 모으면 캡틴 플래닛.. 다육식물을 건강하게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말이야 쉽지 '딱 좋은 정도'를 모르는 초보 식집사에게는 어느 하나 녹록지 않게 느껴지지만 그래서 더 의욕이 샘솟는 것일지도 모른다.
샘솟다 못해 철철 넘치는 의욕을 분출할 찬스는 집에 가자마자 찾아왔다. 비닐포트의 다육이들을 새로 산 토분으로 옮겨주는 것. 다육 뿌리에 벌레가 붙어있는 경우도 있다는데 내 다육이들은 괜찮을까? 아니 그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난 괜찮을까? 나는 벌레가 질색팔색이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벌레를 잘 보려고 해가 잘 드는 베란다 옆에 비닐을 깔고, 쭈볏쭈볏 비닐포트 안의 다육이들을 꺼내려고 만지작하는데 긴장이 된다. 저 옆에 뒹굴고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해 볼래?"
"(한국어로) 아니."
"...........(대체 왜 이런 거만 한국어가 유창한 거냐고)"
어쩔 수 없이 혼자 눈을 질끈 감고, 핑크베리의 비닐포트를 꾸욱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