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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May 16. 2024

죄 많은 초보 식집사의 변명

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3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다육식물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떨어진 잎에서도 새싹을 틔워내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언젠가는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


골든카펫, 핑크베리, 퍼플헤이즈. 이 이국적인 이름의 다육포트들을 새 식구로 맞이하면서 나는 갑자기 구 남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새벽 2시 즈음, 감성과 알코올에 취해 이미 진즉에 다 끝난 인연에게 아련한 한마디 '자니...?'를 보내보는 그 구차함과 찌질함. 스스로도 그렇다는 걸 알지만 문득 생각난 과거의 연인에게 잘해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하고, 떠나게 해서 미안하고, 미화된 과거사가 새록새록 떠오르며 마냥 안타깝고 그리워지는 그런 마음. 


나는 삽시간에 완벽히 구남친화 되었다. 새 다육친구들이 생겨 한껏 들떠있었으면서도 내 나름의 사랑과 관심으로 키워왔다고 생각했는데 시름시름 앓다 죽어간 그 친구들의 길게 뻗은 줄기, 헐렁한 잎 매무새가 떠올랐다. '내가 만약 〇〇했었더라면' 이런 후회가 가득했지만 언제까지고 과거만 돌아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나는 오늘 뻔뻔하고 구차하고 찌질하고, 또 망한 이야기 온 퍼레이드에 정말 정말 부끄럽지만, 옛 다육이들에게 범한 나의 죄상을 소상히 밝혀보려고 한다. 그렇게 나의 엇나간 사랑을 반성하고, 새 다육이들을 키우는데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싶다.


첫 다육이들. 반년만의 비포 앤 애프터


죄목 1. 과도한 물 주기

 

다육식물을 들인 직후, 나는 이틀에 한 번씩, 다육이들에게 분무기로 물을 주었다. 식물원 기념품샵에서 데려왔는데 누가 심어져 있는지, 기를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뭐가 있는지, 그런 설명도 하나 없었지만 식물이니 당연히 해는 좋아할 것이고, '물은 조금만 주면 된대'라는 귀동냥으로 들은 정보만 가지고 '분무기면 조금 주는 게 되겠지' 하고 화분을 360도로 돌려가며 잎에 칙칙칙 신나게 물을 뿌렸다. 


물을 주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사람도 씻고 나오면 생기 있어지는 것처럼, 내 눈엔 다육이들도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너무 자주 주면 안 된다 하니까 이틀에 한 번이란 페이스는 꼭 지키도록 노력했다. 나의 노력은 허망하게도 다육이들은 처음 데려올 때와는 점점 다른 모습이 되어갔다.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물은 바짝 말린 다음 넉넉히 주었어야 했다. 흙이 완전히 마른 뒤, 잎에 탱글탱글함이 사라져 약간 쪼글거림이 느껴질 즈음. 흙 속의 뿌리에도 수분이 닿을 만큼 주어야 뿌리가 제 기능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참았다고 참은 거지만 더 참았어야 했고, 분무기는 습도가 낮은 겨울철에 주위 습도를 놓이기 위한 용도 정도로 사용했어야 했다. 두어 번 칙칙 뿌리는 분무기 물은 잎에만 가닿고 뿌리까지 가기엔 턱없이 적었다. 잎은 과습 상태가 되고 뿌리는 약해져 수분과 양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채, 점점 키만 비쩍 자란 약골 체질이 되어갔다.



죄목 2. 햇볕 불지옥


식물에게 햇볕은 에너지원을 합성시키는 중요한 자원이지만 나의 경우, 분무기로 물을 뿌린 다음, '자, 물 마셨으니 이제 해 쬐서 광합성하자'라고, 화분을 바로 직사광선이 닿는 창가에 두기를 반복했다. 물방울이 이파리에 고여있는 채로 해를 쬐면 그 자체로 볼록렌즈 역할을 해 잎에 열상을 입히기도 하고, 장시간 같은 장소에 물방울이 맺혀있으면 그 부위가 무르기도 한다. 


또, 실내에서 햇빛을 잘 받지 못하던 다육이가 갑자기 직사광선을 쬐여도 좋지 않다고 한다. 기념품 샵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내 생활을 하던 다육이는 처음엔 밝은 그늘에서 시작해 햇빛에 서서히 노출시켜야 했는데, 이건 냅다 물을 끼얹더니 이글대는 직사광선을 쬐이니 얼마나 고문이었겠는가.


뿌리가 순서대로 죽어나가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우리 집 남향이라 햇빛이 너무 센가? 일본은 자외선도 강하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나는 그날로 다육이들을 창가에 가지고 나가길 그만두었다. 다육식물은 한여름을 제외하고 최소 하루에 4시간은 햇볕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건 최근에야 알았다. 그만큼 햇볕을 많이 쬐어줘야 다육이가 예쁘고 튼튼하게 자라나는데, 복합적인 사인(死因)에 햇빛이 센 것만 문제라고 생각해 다육이의 약골 체질을 더욱더 가속화시키게 되었다.



죄목 3. 유리병 감옥


봄이 되자 화분이 비좁아 보였다. 그래, 사람도 작은 집 살다 보면 큰 집 가고 싶은데 식물도 그러하겠지. 동네 카인즈 (생활용품, DIY용품, 원예용품 등을 파는 홈센터)에 가서 다육식물 전용 흙을 샀다. '선인장 화원에서 만든 흙'이라는 표찰이 붙은 그 흙은 선인장과 다육식물들을 오래 돌본 전문가가 물 빠짐과 영양상태를 고려해 배합했다고 한다. 마치 곱게 간 원두커피처럼 깔깔한 이 흙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잼과 소금이 담겨있던 작은 유리병을 찬장에서 꺼내와 쪼르륵 흙을 부었다. 투명한 유리병이라면 커피알갱이 같은 흙과, 싱그러운 초록 다육이가 돋보일 것 같았다.



유리화분이 예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화분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수분 조절이 어렵다는 것이다. 유리병은 우수한 밀폐성으로 음식물 보존에도 두각을 발휘하지만, 배수성과 통기성이 좋지 않아 물을 주면 안에 물기가 오래 남는다. 유리화분을 썼다고 해서 분갈이하자마자 다육이가 픽 꼬꾸라지는 건 아니지만, 금방 마르지 않고 젖은 흙에서는 꿉꿉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피기도 하며, 공기의 온도차에도 물방울이 맺혀 최악의 경우 안에서 뿌리가 썩는다. 초보 식집사에게는 명확한 선택 미스였다. 



죄목 4. 웃자람 방조


그래도 다육이들은 강하다. 분무기로만 목을 축여도 키는 꾸준히 컸다. 나는 이것이 건강의 증표라고 착각했다. 잎이 빽빽하게 나고 키가 작아야 예쁜데, 크면 클수록 어째 점점 더 못생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 자신이 그랬듯) 아기 때 예뻤다고 어른이 될 때까지 역변 없이 예쁠 거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그런 건 줄 알았다. 


이 불균형한 성장은 보기만 안 좋은 것이 아니었다. 줄기를 기르는데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새로 난 이파리들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시들시들, 볼품없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중간에 뚝 끊어서 새로 심을 수도 없고.


어? 잠깐. 다육이는 '그게' 되잖아?


비실, 비실


죄목 5. 실패할 수밖에 없던 꺾꽂이


기일게 웃자란 다육식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거나, 줄기 중간을 잘라 자른 줄기에서 뿌리를 키워 심는 꺾꽂이를 시도해 볼 수 있겠다. 게다가 원래의 모체에서도 새싹을 틔울 수 있어 나, 너,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원플러스 원.


때는 '여름'이었다. 여름은 생장이 멈추는 종이 많아 화분갈이나 꺾꽂이, 물 주기 같이 부담이 만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매일 실내온도가 36도를 웃도는 한여름에 꺾꽂이를 했다. 사람도 기진맥진 더워서 맥을 추는 계절에, 기없는 다육식물을 소독도 안 한 쪽가위로 억지로 힘주어 짓이여 가며 잘랐다. 본체를 살리고 싶다면 본체에 잎을 남겨두어야 줄기 끝까지 물을 빨아들이는데 이파리가 붙은 곳을 전부 잘라내고 말았다.


잎이 한 장도 남지 않은 본체는 죽.. 는.. 다..


생장이 어려운 계절에, 이미 상태가 좋지 않은 다육을, 세균 감염 위험이 있는 쪽가위로, 생장점을 짓이겨 망가뜨려가면서, 본체까지 한큐에.


더 늦기 전에 예쁘게 잘 살려보겠답시고, 아직 살아있던 다육이를 살식(殺植)하고 말았다.


물이 든 병에 이렇게 꽂아두면 뿌리가 금방 난대서 따라는 해봤건만


줄기에서 새 자구가 나오기도 했는데, 물이 홀랑 쏟아져서 뿌리부터 썩어 버린 비운의 다육이


죄목 6. 부주의


뿐만 아니라 그 혹독한 여름과 겨울을 견디고 겨우 살아남은 이 녀석. 아래 줄기에서 힘겹게 자구를 내보냈는데 최근에 '분무기로 물을 주는 건 부적절하다'는 걸 새로 배우고, 분무기 뚜껑을 열어 물을 조금 따라준다는 것이 손이 미끄러져 울컥 쏟아졌다. 아, 이걸 어쩌지, 얼른 해가 닿는 곳에 두고 물이 증발하기를 기대했지만 빠른 속도로 뿌리부터 시커멓게 썩어 올라왔고 다음 날 새 자구들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일로 다육이들은 뿌리남게 되었다.)




다육식물에 대한 무지가 돋보이는 행적,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다육이 다시 기르기에 앞서 새 다육식물들에 대해 조사부터 했다.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물은 얼마나 줘야 하는지. 그리고 실패했던 이전의 식물생활에서 얻은 피드백으로 나의 문제 행동과 시행착오를 수정해 가기로 했다. 


아, 이거 어째 옛 연인과의 실패를 거울삼아 새 연인에겐 잘하려고 결심하는 연애랑 좀 비슷하다. 나는 아직도 다육식물 계의 구 남친, 아니, 구 식집사 언저리를 서성대고 있는 것이겠지만 새 반려식물들과의 생활을 통해 얘네가 물 달라 말하고 싶을 때 딱 맞춰 물 주고, 그늘로 가고 싶다 말하고 싶을 때 알아서 옮겨주는, 그런 찰떡호흡을 자랑하는 식집사로 거듭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하의 주의사항들을 지켜나가기로 마음먹었다. 


1. 물: 봄/가을엔 1-2주에 한번, 흙이 완전히 마르고 다육이가 기운 없을 때 급수, 여름/겨울엔 기본적으로는 단수하고 정말 쪼글거릴 때 급수, 물을 준 다음엔 잎에 물기가 맺혀있지 않도록 티슈로 훑거나 바람으로 날려 보내기.

2. 햇빛: 매일 충분히 해를 보여주기, 날이 더운 날에는 물 주고 직사광선 쬐는 거 금지.

3. 바람: 창가에 놓을 때는 창문도 열어 충분히 통풍하기

4. 분갈이할 화분은 배수성과 통기성을 고려하기

5. 분무기 급수는 그만두고 다른 방법 생각하기


1부터 3까지는 지금부터 하는 것이라 해도, 4, 5는 도구가 필요한데, 화원 같은 데 가는 건 좀 부담스럽다. 그...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나는 또 실패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뭐든 다 있소,라는 다이소에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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