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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n 06. 2024

다육식물의 첫 이사, 분갈이

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5

자력으로 앞 구르기를 할 수 있게 될 때까지의 몇 번이고 어질어질하던 시계, 한창 키가 클 때 매일같이 욱신거리던 무릎, 아이돌을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깨닫고 상심했던 나날들. 이제까지와는 다른 나는 그냥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없던 것을 하게 되고, 어른처럼 키가 커지고, 마음이 성장해야 할 때마다 나는 아팠다. 성장의 바로 전 단계에는 항상 주저와 두려움, 괴로운 성장통이 먼저 찾아왔다.


어쩌면 분갈이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수 있다.

비좁은 비닐포트 안에서 열심히 자라온 다육이를 영양 가득한 새 흙이 들어있는, 마음껏 뿌리 뻗어갈 넓은 화분으로 바꾸어주는 것은 다육이의 더 긴 식생(植生)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단계. 게다가 이 봄, 3월에서 5월은 생장기가 봄가을인 다육이들에게 있어 절호의 분갈이 적기다. 분갈이는 흙이 마른 상태에서 하는 것이 좋다 하여 우리 집에 온 뒤로 물 한 방울 얻어마시지 못하고 다육이들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가마니처럼


얘들아, 이제 다 왔어. 그러니까 떨지 마.


어, 근데 왜 내 손이 떨리고 있냐.


덜덜덜


내가 성장할 때마다 성장통을 겪었다는 것을 다육이에게 적용시킨다면, 지금 두렵고 아파야 하는 것은 다육이일 텐데 어째서인지 떨리는 것은 내 손이다.


분갈이 비슷한 것은 해본 적 있다. '비슷한 것'이라 하는 이유는, 작은 컵 안에 옹기종기 살던 다육이들을 뽑아 한, 두 뿌리 씩 다른 유리병 안에 꽂아주는 아주 간단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쑤시개로 화분의 흙 여기저기를 꾹꾹 찌른 다음 살짝 기울여 동체를 잡고 흔들면, 좁은 컵 안에서 뿌리를 길게 펼칠 새도 없던 다육이들이 아주 쉽게 쏙쏙 뽑혀 나왔다. 그리고 새 흙을 담은 유리병에 나무젓가락으로 흙을 움푹 파이게 한 뒤 꽂아주면 분갈이 비슷한 것은 금방 끝났다.


이번에는 같은 종류끼리 군생하고 있는 것을 다른 화분에 통째로 옮기는 것이니 그렇게 쑥 뽑아서 꽂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리 분갈이 동영상도 보긴 봤지만 베테랑들은 어째 하나같이 '그림을 그립시다'의 밥 로스냐. 말하면서도 슥슥 익숙한 손놀림으로 쉽게 하고는 '참 쉽죠?' 하는데, 내가 할 때는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분갈이 중에 뿌리에 붙어있던 벌레가 발견될 수 있다는 선량한 초보 식집사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정보만 현실감 있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우리 집에서 분갈이를 할 사람이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책임져야 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핑크베리의 비닐포트를 꾸욱 눌렀다.



이번 분갈이는 이렇게, 물 빠짐과 뿌리 부분의 통풍을 좋게 하기 위한 배수층을 먼저 깔아주고, 다육이들의 양분과 지지대가 되는 다육 전용 배양토를 넣을 예정이다. 화분이 작으면 배수층은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데, 물 주기 좋아하는 나를 믿지 못하겠어서 조금이라도 배수와 뿌리 썩음 방지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배수층을 만들기로 했다. 배수층에는 입자가 굵은 경석을 쓰는데 겸사겸사 집에 사둔 하이드로볼(수경재배 시 쓰는 입자가 큰 인조흙)을 쓸 것이다. 비율은 하이드로볼이 1이라면 배양토는 2.5~3 정도로. 배양토는 홈센터에서 샀는데 '선인장 재배업자가 만든 다육식물 전용흙'이라는 선전문구에 끌려 손에 넣었다. 이걸로 우리 다육이들은 가정집에 살면서 전문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든다. (내가)



제일 먼저 화분에 망을 깔아주었다. 흙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외부에서 벌레가 들어가지 않도록 넣는 것이라는데 이번에 산 토분은 바닥 물구멍이 정말 코딱지 만해서 이걸 정말 넣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집에 있던 싱크대 삼각코너용 거름망을 잘라 넣었다. 그 위에 순서대로 하이드로볼, 배양토를 부었다. 배양토는 처음부터 다 부어주지 않고 다육이 높이에 맞추어 뿌리가 시작될 지점 정도까지만 부어주고 잠시 대기.


여기서부터가 진짜 분갈이다.

전체적으로 가볍게 주물러 굳은 흙을 부드럽게 한 비닐포트를 엄지와 검지로 살짝 누르며 옆으로 뉘었다. 오른손으로는 다육이의 머리를 가볍게 쥐고, 왼손에 쥔 포트를 살살 흔들며 조심스럽게 꺼냈다.



비닐포트에서 갓 나온 다육이들의 뿌리는 저들끼리도 엉겨있고, 포트 안의 흙을 잔뜩 움켜쥐고 있었다. 오, 이거야 이거. 이거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었던 거지. 얼핏 보니 벌레 같은 건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


나는 조금 대담하게 손가락으로 다육이를 잡고 뿌리를 탈탈 털어가면서 얽힌 뿌리와 흙을 풀어냈다. 이 단계에서 검게 죽은 뿌리는 제거해 주고 너무 긴 뿌리도 조금 잘라주는 것이 뿌리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데, 이때 생때같은 잎들이 열 장도 넘게 후드득 떨어져 내려 그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난 침착하게 잎들을 한쪽에 그러모았다. 핑크베리가 잎꽂이가 아주 잘 되는 친구라는 것을 앞선 호구조사로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땜빵은 좀 생겼지만, 첫 분갈이의 훈장으로 치자.


이윽고 자유의 홀몸이 된 다육이들을 집어 화분 안에 자리를 잡아주고 나머지 배양토를 부었다. 흙과 흙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화분을 톡톡 쳐서 빈틈을 없애주고 가볍게 다져주며 분갈이를 마쳤다. 배양토는 끝까지 부어주지는 않고, 1센티 정도 빈 공간이 남을 만큼만 부었다.


해충이 걱정될 때에는 이때 완효성 살충제 과립을 흙 위에 올린다 한다. 물을 줄 때마다 흙에 녹아들어 다육식물이 이를 흡수하고, 벌레는 잎을 깨물었다가 살충제즙을 마시고 저 세상으로 향하는 시스템인데, 즉시 벌레를 보내버리는 스프레이 타입보다 예방, 보호 작용에는 더 탁월하다는 듯하다. 하지만 작년에 뭣도 모르고 다육이를 길러 볼 때에도 벌레는 생기지 않았으므로 우리 집 다육식물들에게는 이 과정을 패스했다. (이후, 나는 이 행동을 후회하게 된다.)





핑크베리에 이어, 퍼플헤이즈와 골든카펫도 같은 방법으로 저마다 새 자리를 잡아주었다. 다만 골든카펫은 뿌리가 비닐포트 안에 꽉 차 흙과 엉겨있었던지라 거의 풀어주지 못하고 그대로 새 화분에 넣고 흙만 보강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이 역시 나중에 (정확히는 오늘) 후회하게 되지만 그 사실을 알리가 없는 3월 말의 나는 무사히 분갈이를 마쳤다는 것이 마냥 기쁠 뿐이었다.


아침 이슬 설정샷


뭔가 어설픈 분갈이이긴 했지만, 토분에 심긴 나의 다육식물들은 검은 비닐포트에 들어있을 때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는, 말 그대로 '우리 집 애들'이 된 것 같다. 이후 바로 물을 주지는 않고, 일주일간은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밝은 실내에 놓고 새 흙에 적응기를 가졌다.


분갈이를 하며 떨어진 핑크베리의 잎들은 전 주인들이 돌아가시고 비어있던 화분 위에 얹어두었다. 이렇게 하면 저절로 새 잎과 뿌리가 난다고 했다. 100%는 아니고, 뿌리만 나온다거나 (오징어라고 한다나), 잎만 나오는 경우도 있고, 최악의 경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한다. 이미 데려올 때부터 떨어져 있던 두 장을 포함, 총 열다섯 장 중 몇 장이나 발아해 줄까? '혹시 오늘은?!' 하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육잎 인큐베이터 앞으로 뽀로로 달려가길 몇 날 며칠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다육잎들은 심드렁하게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평소와 다른 낌새를 발견하게 되는데...


습기 유지를 위해 랩을 씌워보는 실험도 했는데 잎이 거무튀튀해져 관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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