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9
햇볕 잘 드는 베란다 창틀에 화분들을 옮기다 벌어진 일이었다. 창틀에 닿은 진동 때문이었는지, 골든카펫을 잎꽂이한 플라스틱 컵 화분이 픽 고꾸라졌다.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내 눈에는 5도, 10도, 15도, 화분이 슬로모션으로 지면에 가까워졌다. 급히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이 닿기도 전에 화분 안의 흙과 다육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흙에 파묻힌 골든카펫들을 허겁지겁 주우면서도 얼떨떨한 채였다. 흙까지 모두 쓸어 담고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다육이들을 하나하나 꽂아 넣어주면서도 시각 정보가 뇌에 닿아 행동에 옮겨지기까지 최소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에 관해 계속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아직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그 와중에도 사진은 찍고 있었으니 내 안의 탐욕적인 '글감 하이에나'만이 제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못 미더운 집사의 수습에 다육식물들은 조금 지친 듯해 보였지만, 곧 다시 씩씩하게 정착했고 모든 것은 별문제 없이 흘러가는 듯했다.
6월 6일,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요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렇게 기세 좋게 늘어가던 골든카펫이었는데 화분 전체에 '매가리 없음'이 감지되었다. 처음에는 해를 너무 쬐어 잠시 기운이 없는 것일 뿐이라 여겼다. 옆 자리 퍼플헤이즈가 포도알 열리듯, 여기서 팡, 저기서 팡, 동글동글한 잎들이 여기저기서 팡팡 터져 나오고 있던 시기였는데, 옆에서 그렇게 난리를 치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리 그래도 좀 이상하단 기분에 골든카펫 화분만 꺼내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부실하게 키만 자라고 시들어 올라오는 개체들이 눈에 보였다. 상태를 보려고 티슈를 펴고 핀셋으로 하나 둘 끄집어 내 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처참했다. 반 이상을 뽑아내야 했다. 그런데 줄기에 뭔가 하얀 것이 매달려 있다. 흙도 아니고 다육식물의 부산물로도 보이지 않는 하얗고 동그란 반원체. 본능적으로 '그것'이라 느꼈다. 나도 모르게 핀셋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얬던 그것은 연주황빛으로 물들어 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대로 핀셋을 쥐고 화분 곳곳을 뒤적였다.
앉은자리에서 열 마리를 잡았다. 그런데도 잠시 뒤 살펴보면 또 잎 뒤, 줄기 옆에 매달려 있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것들은 카이가라무시(カイガラムシ), 깍지벌레란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고온건조한 환경을 좋아해 다육식물의 화분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해충 중 하나로 5월에서 7월이 발생 피크라고 한다. 즐겨보는 다육 유튜브에서도 깍지벌레 이야기를 자주 했기에 이름은 들어본 적 있었다.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병충해 예방 차원에서 분갈이 때 살충제 과립을 넣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에이, 아저씨는 농장을 하니까 그렇지 우리 같은 가정집에서는, 하고 웃었다. 베란다 발코니는 에어컨 실외기만 덩그러니 놓여있어 이런 류의 벌레가 옮겨 붙을 일도 없고, 화분이 5개도 안 되는데 무슨 살충제씩이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기네요, 살충제 필요한 일이.
원래부터 들어있던 채로 우리 집에 온 것 같다. 데려오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무렵, 잎에 하얀 솜털 같은 게 붙어있어 어디서 붙은 먼지지? 하며 떼어준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깍지벌레가 남긴 '나 왔어♡' 메시지였음을 눈치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한번 더 기회는 있었다. 분갈이할 때. 뿌리가 단단하게 꽉 들어차 있어 뿌리와 흙을 풀어주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새 화분에 넣고 빈 공간만 보강해 줬는데 그때 이전의 흙을 제대로 털어내고 새 흙에 심었었다면.
아니야, 살충제는 무슨 살충제 하고 코웃음 치지 말고 하란대로만 따라 했다면. 무서워서 못 잡던 벌레를 이렇게 울상 지으며 핀셋으로 터뜨려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한번 떠오른 이랬다면 저랬다면은 털어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이도 저도 할 수 없이 결국 머릿속에 이랬다면 저랬다면을 가득 넣은 채, 다음 날 홈센터에 가 두 종류의 살충제를 사 왔다. 아주 전형적인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하지만 이제부터 소 아주 안 기를 거면 모를까, 소는 잃었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또 소가 사라지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고난이 오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막을 수 있는 재해가 일어났다면 적어도 이차 재해는 막고,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시책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되뇌며 새로 신설된 가계부 항목 '다육식물'에 2460엔을 적었다.
이미 생긴 깍지벌레 구제에는 주방세제를 푼 물이나 과립형 살충제를 녹인 물에 다육식물을 뿌리채로 담그는 방법도 있다 하는데, 마음도 급하고 골든카펫은 한뿌리 씩 관리하기도 어려워 스프레이 타입의 베니카X파인을 쓰기로 했다. 바로 효과가 나오는 살충살균제로 가정에서도 사용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분류상로는 농약이기 때문에 사용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환경에서 벌레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저녁에 뿌려주는 게 좋다고 하여, 눈에 보이는 성충은 최대한 잡아낸 뒤 베란다 발코니에 화분을 두고 360도 회전해 가며 뿌렸다.
살포 약제가 축축하게 남아있는데, 다 마르기까지는 6월 초에도 몇 시간 정도 걸렸다. 물이 닿으면 효과가 떨어지니 다 마를 때까지는 물에 닿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고. 아마 베니카뿐 아니라 어떤 살충제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약제는 병용도 가능하다 하여 다음 날에는 오르토란도 뿌렸다.
불행 중 다행은 다른 화분들에게는 깍지벌레가 옮겨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골든카펫이 얼마나 맛있었으면...
이쪽에는 오르토란DX를 흙에 섞어 줄 것이다. 바로 죽이는 약은 아니지만 물을 줄 때마다 약제가 녹아내려 이를 흡수한 식물 체내에 살충 성분이 남게 되고, 그러한 식물의 즙을 벌레가 섭취하면 '크흡, 너, 즙에 무슨 짓을' 하며 퇴치되는 시스템이다. 3호 포트(직경 9센티)의 경우, 편의점 요구르트 스푼으로 반 좀 더 되게 주면 된다 해서 화분 크기에 맞추어 가감해 뿌렸다.
화분에 뿌린 과립형 살충제는 흙과 잘 섞은 뒤, 한번 물을 주어 흙에 녹아들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물을 부으면 과립이 녹으며 퍼질 줄 알고 그냥 물을 뿌렸는데, 저들끼리 뭉치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중에 핀셋으로 찔러 부수긴 했는데 깔끔하게 되지 않았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주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귀찮음을 앞세워 섣불리 응용하려 들면 안 된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깍지벌레 예방을 위해서는 이렇게 사전에 약을 치는 방법도 있지만, 애초에 통풍이 잘되는 환경에서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매일 다육이들이 들어있는 와이어 바스켓을 바람 따라, 해 따라, 그늘 따라 내어놓곤 했는데도 특히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 그들에게는 1% 좀 부족했던 모양이다. 촘촘하게 군생하는 다육식물의 관리는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그리고 7월 4일 현재, 그 무성했던 골든카펫은 이전에 엎었던 녀석들과 깍지벌레로부터 살아남은 것을 새로 꺾어 꽂은 아주 작은 화분 하나만 남았다. 깍지벌레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쪽에만 너무 신경 쓰느라 여름의 아침해를 간과한 것이 패인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열심히 살아가려던 골든카펫은 얼마 전 그만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아직 살아있는 윗머리들만 떼어내어 급하게 화분에 심었는데 지금은 이 친구들의 생명력에 걸어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흥한 것도 언젠가는 망하는 날이 오고, 성한 것은 쇠하기 마련이라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력감이 안타깝다. 무엇보다 이들의 삶을 온전히 내 손에 맡겨져 있음에도 순간의 판단 미스나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골든카펫을 잘 지켜내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또, 다육식물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지만 또 훨씬 섬세한 식물인 것 같다. 하나에만 꽂혀 다른 부분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내일은 쓰레기 버리는 날. 지금은 시든 쭉정이만 남아있는 화분도 정리할 것이다. 빈 화분은 깨끗이 씻어 새로 싹을 틔운 아이들, 아, 남은 골든카펫들이 기운을 좀 차리고 나면 그 친구들을 옮겨 주어도 좋겠다. 비록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뿐인 식물생활, 아쉬움도 미안함도 적지 않지만, 내 손엔 아직도 많은 다육이가 맡겨져 있으니까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허점투성이 외양간도 언젠가 한남더힐이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