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14
해가 많이 짧아졌다. 벌써 5시도 전에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하다. 여름 내내 베란다께를 머물던 햇볕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거실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다. 가을은 항상 언제 왔는지 모르게 찔끔찔끔 다가와서는 사라질 땐 후다닥 전력질주. 주말과 쏙 빼닮았다.
가을이 되고 다육이들은 여름의 고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고 있다. 건조하고 서늘한 바람, 차광막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따사로운 햇볕. 다육이들은 말간 새 잎을 움튀우거나 몸집을 불리는데 여념이 없고 나 역시 다육이 바구니를 이리저리 옮기며 그 어느 때보다 햇볕 셔틀에 힘쓰고 있다. 해의 고도가 낮아지며 볕을 쬐일 수 있는 시간과 방향이 달라진 까닭이다. 옆, 그 옆, 또 그 옆의 옆, 하루에도 몇 번씩 해를 졸졸 따라다니며 다육이들을 실어 나르고 있자면 내 삶이 다육이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도 든다. 왕은 고객 만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잎꽂이 화분 하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난 7월, 녹아버린 퍼플헤이즈를 다시 심는 중에 떨어진 잎들을 뉘어둔 것인데 창가 자리가 비좁다고 커튼에 가린 쪽으로 지익 밀어 두고는 거기 들어있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3주? 이젠 정말 정리해야 할 때가 왔을지도 모른다. 이 화분의 잎꽂이는 딱 두 개만 성공하고, 나머지 수십 개는 그저 말라비틀어져 가는 중이었다.
다육식물을 기르는 일은 식물의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이기도 했다. 에어컨 바람맞았다고 풀썩, 여름볕에 흐물흐물, 갑자기 벌레가 튀어나와 화분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그런 크고 작은 죽음에는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죽은 화분을 정리하는 것만큼은 아직도 영 마음이 불편하다. 수학 20점짜리 충격적인 꼬리표를 받았을 때만 해도 '하하, 나 20점이야. 미쳤나 봐.' 하고 나불거릴 힘이 있지만 진짜 성적표가 나오고 나면 그런 말도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임시에 불과했던 20점이 정식으로 학적부에 기재되는 그 순간.
'이상으로 선고를 마칩니다. 땅땅땅!'
유죄를 선고받는 피고인 같은 기분이 된다. 생을 마감한 그것을 자리에 계속 놓아둔다 한들 바뀌는 건 하나 없지만, 화분에서 떠내는 그 순간이 오면 있는 힘껏 도망쳐 왔던 '땅땅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삼 개월이 지나도록 싹이 나지 않는 화분에게도 창가 목 좋은 자리에 굳이 한 자리 내어주고 만 것은, '어쩌면'하는 희망뿐 아니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고집의 지분이 더 컸다.
이제 정말 틀렸을 것이다. 슬쩍 쳐다보니 이전에 있던 싹 하나는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쪼글쪼글하게 말라붙어 있다. 씁쓸하지만 이거라도 떠서 옮겨 주고 나머지는 이제 놓아주어야겠다 하는데, 아주 작지만 밝은 초록색 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들여다보니 그것은 한둘이 아니었다. 삼 개월 넘게 싹은커녕 뿌리도 나지 않던 것들이 언제 이렇게. 아주 작고 희미한 초록색이었지만 나 여기 살아있다고, 있는 힘껏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 아이 참 쪼끄만 것들이 까시락 지게, 하고 툴툴거리게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다육식물들은 항상 이랬다. 언제 주었는지도 모를 아주 적은 양의 물을 고이 머금고 있다가,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근근한 바람, 아침에만 반짝 들어오는 해를 받고서도 새 살을 틔워간다. 그것이 설사 아주 작은 ’찔끔찔끔'이라고 해도 그 찔끔찔끔을 모아 다음을 만들어 내어 나를 종종 놀라게 한다.
때때로 생각한다. 내가 다육식물들을 바라보며 삶을 생각해 보듯, 저들은 저들과 같은 시간을 쓰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 쓰려던 것은 밀린 가사 때문에 내일로, 날이 흐려서 모레로, 추워서 글피로, 그렇게 찔끔찔끔 미루는 사이 글을 쓰지 않은 채 한 달이 흘렀다. 그렇게 찔끔찔끔 미루며 내 안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다. 내겐 글을 쓴다는 것 역시 '도망의 방법' 중 하나였던 것이 아닐까. 뭔가 다른 내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더불어 이걸 하는 동안은 '그래도 뭔가 하고 있으니 괜찮다'는 안심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다음은? 평생을 이렇게 안심감만 핥으며 살아갈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쉽게 '도망'칠 수 없었다.
'이상으로 선고를 마칩니다. 땅땅땅!'
죽은 다육이가 아닌 살아있는 다육이로부터 내려진 선고를 고이 받아 들고, 비닐봉지에 화분 속의 흙을 우수수 쏟아버리는 대신 새 흙을 꺼내 새 화분을 하나 만들었다. 이전 화분은 우리 집에서 잎꽂이로 자란 녀석들 대부분을 품었던 것이니 그 흙엔 이제 영양분도 얼마 안 남았을 테다. 새 흙, 새 화분으로 그간의 노고를 치하받은 퍼플헤이즈 잎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아주 찔끔찔끔, 자라고 있을 것이다. 너무 작아서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눈에 띄고야 마는 그 성장을, 나도 닮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도망가는데만 찔끔찔끔을 쓰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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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
어.. 그동안 제가 좀 뜸했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게으름과 먹부림, 취미생활, 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한동안 글을 발행하지 못했는데요. 몇몇 분들께 걱정 어린 댓글도 받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ㅠㅠ) 쓱 나타나 쓱 글만 쓰고 지나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요 (^^;)
저는 여전히 브런치의 글쓰기 버튼을 누른 창을 켜둔 채 하루를 보내고 있고요 (글이 완성되는 것과는 별개로요;;;) 주말 저녁엔 언제나처럼 남편과 함께 거하게 한 상 차려 파티를 엽니다. 요즘은 날이 싸늘해 나베요리가 많은데 작년에도 겨우 내내 그러다 바지 단추가 안 잠기게 되었던 기억이.... 아무튼 그렇게, 언제나와 변함없이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뜨뜻미지근한 일상에 젖어 게으름 부리는 사이, 벌써 12월이 되어버렸네요. 12월도 주말처럼, 휙 왔다 휙 사라져 우리는 언제나처럼 또 금방 한 살 더 먹게 되겠지만, 각자 후회 없는 한 해 되시도록 12월 마무리 잘하시고, 춥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겨울 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