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가 되기 위한 눈치싸움
올초, 남편이 회사에서 상을 받으며 상품으로 카탈로그 기프트도 받아왔다. 책자 안에 실린 상품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받는 것이었다. 카탈로그를 산 사람이 대금을 지급한 형태가 되기 때문에 받는 이가 뭘 선택해도 추가금이 들지 않고, 받는 사람 자신의 필요에 따라 직접 고르는 재미를 준다는 이점이 있어 일본에서는 관혼상제 답례용이나 이벤트 상품으로 애용되고 있다.
반년 가까이 거실 한구석을 굴러다니던 것을 주워 올린 건 6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유효기한인 7월 11일 전에 신청해야 하는데, 눈에 닿는 곳에 있어야 상품을 고를 마음이 생길 것 같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받아왔을 때는 아직 시간도 있고, 다 살펴보는 것도 귀찮아 미루어 두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전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도 답례품으로 받은 적이 있다. 그땐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자동 센서 손전등을 골라 현관 신발장 위에 두고 집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환해지게 해 두었는데, 어쩌면 지친 몸으로 문을 따고 들어왔을 때 환하게 나를 반겨주는 뭔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참 쓸데없는 걸 골랐다. 지금은 건전지도 다 나간채, 서랍장 안에 고이 잠들어 있다.
이번에는 더 잘 생각해서 고르기로 했다. 가구, 가전, 키친툴, 패션, 숙박권, 식품까지 다양한 종류의 상품이 망라된 카탈로그였지만 평소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것들만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쏙 빠져있었다. 딱히 굉장히 가지고 싶은 것은 없고 선택지만 많은 이런 경우, 이 안에서 가장 비싼 것을 고르는 이가 승자가 되는 시스템인 것 같아 우린 그걸 찾기로 했다. 같은 책자에 실려있다 해서 모든 상품이 전부 딱 떨어지는 가격은 아닐 것이다. 높낮이가 있겠지.
어쩌면 가전제품이 가장 비싸지 않을까? 마침 무선 청소기가 보였다. 물도 빨아들일 수 있대서 그걸로 할까 했더니 연속동작시간 10분, 충전시간 5시간. 충전만 하다 고장 날 것 같다. 포기하고 키친 페이지를 보았다. 다이아몬드 코팅팬은 어떨까? 근데 쬐끄만한 것밖에 없다. 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 식사권은? 아아, 그건 진짜 아니야. 거기 가려면 옷도 새로 사 입어야 하고 옷값이랑 교통비 합치면 배보다 배꼽이야.
카탈로그를 받아온 직후에 한번, 테이블 위에 놓아둔 후에 한번, 7월이 되고 나서 '아악, 정말 안 고르면 안 돼' 하는 압박감에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이런 식으로 고민만 하다 덮어두기 일쑤였다. 어제는 '저녁 먹고 꼭 신청하자!'라고 결심했는데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시세도 모르면서 가성비를 따져가며 골라야 한다는 압박감에 못 이겼는지 밥을 먹다 체하고 말았다.
아, 차라리 돈으로 주지. '선택이 괴로운 사람'에게는 이건 상이 아니라 마치 벌과도 같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 회사 사람 -카탈로그 기프트를 상품으로 주자고 제안하고 실행한 사람-이 원망스러워졌다.
나도 그렇지만 남편 역시 이런 다수의 선택지 중에 가장 좋을 것 같은 하나를 고르는 일은 젬병이라, 둘이서 한참 머리를 싸매다 결국은 논외라 여겼던 식품류로 정하기로 했다. 그래, 어쩌면 이중에 제일 비쌀지는 모르지만 몇 번 쓰지도 않을 물건을 늘리고 마느니, 차라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동안의 짧고 강렬하며 확실한 행복을 선택하자. 행복의 가치는 반드시 돈으로 환산되는 것은 아니니, 이 안에서 뭐가 제일 비싼 것일까를 고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평소 먹을 일이 없는 브랜드 소고기나 과일류를 들여다보는데 상하기 전에 먹느라 또 벌 받는 기분이 될 것 같아 결국 햄 세트를 신청했다. 보존기간도 길고, 안주로 소비하기도 좋으니 어쩌면 보존기간과 상관없이 주말 사이에 후루룩 뚝딱 다 먹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숙제를 마치고 나니 체기도 사라졌다. 우리의 행복이란 그냥 평범한 것들에 녹아들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일상, 체하지 않는 식후, 고민하지 않는 밤, 내 돈주고도 살 수 있지만 공짜라 더 맛있게 느껴질 본레스 햄, 거기에 곁들일 차가운 맥주 같은 것들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