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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14. 2023

뭐만 하면 '메이와쿠'라면서요

매주 금요일, 남편은 2시간 늦게 출근한다.

그만큼 귀가도 2시간 늦어지지만, 어차피 내일은 휴일이고, 아침 시간을 2시간 늦게 시작해도 된다는 것은 출근하는 남편 본인도, 백수이면서도 출근자와 생활 패턴이 연동되어 있는 내게도 무척 달콤한 일이다. 반차 아닌데도 반차랑 비슷하게 느껴진달까.


아무튼 그런 오늘.

그동안 밤에도 푹푹 찌는 더위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는데, 어제는 낮에도 좀 선선했고 (33도), 저녁도 그럭저럭 지낼만했기에 정말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게 자고 있는데, 어린아이의, 아니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주차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바람에 눈이 떠졌다. 핸드폰을 더듬어 시계를 봤다. 아직 7시도 안 된 시각. 또 시작이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안다.




그 집 부모와 교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집과 우리 집 건물 사이에는 폭 6미터짜리 주차장이 있고, 1층인 그 집 베란다는 우리 집 침실과, 층은 다르지만 주차장을 끼고 서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몇 번인가 그 집 아이들이 베란다에 나와 노는 걸 본 적이 있다.


작년까지는 딱히 누구 목소리 때문에 잠을 깬 적은 없었다. 종종 주차장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차에 타고 내리면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이라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그러다 올봄 즈음부터였다.

아직 충분히 자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6시 대에 아이가 베란다에 나와 노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소리를 지르면서. 5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아이 성량이 원래 그렇게 큰가? 아니면 건물 사이에 놓인 주차장 때문에 소리가 울려서 그렇게 크게 들리는 것인가?


처음엔 '그럴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뭘 알겠는가. 자기 목소리가 큰 지, 작은 지, 그 목소리 때문에 누가 잠에서 깨어날지, 뭘 알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고 있고, 아이가 비명처럼 자기 엄마를 부르고, 여기 와서 이거 봐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그 엄마의 주의하는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줘서 안 들렸을 수도 있지만, 아이의 꼭두새벽 샤우팅은 몇 개월째 같은 시간, (그리고 오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걸 보아, 엄마가 아이를 컨트롤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아이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냥 놔두는 엄마는 '그럴 수도 있는 것'일까?

조금씩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메이와쿠(迷惑, 민폐)'에 민감하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부모는 '이건 타인에게 메이와쿠니까 하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고, 사회 전체에 '하면 안 되는 것'이 많다. 그런데 일본에 오랜 기간 살다 보면, 그렇게 암묵적 룰이 많은 것 치고는 '이 사람들 그렇게 메이와쿠, 메이와쿠 하는 사람들 맞아?'라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앞 집 아이 엄마도 그 예 중에 하나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가 아닌 '너희'의 '메이와쿠'에는 더 민감하게 굴고, 내부자가 일으킨 '메이와쿠'는 우리가 그럴 리가 없다며, '너희'의 것으로 둔갑시킨다는 것이다.


예전에 잠깐 치바현에 살면서, 케이세이선 (나리타공항에서 도쿄 우에노까지 오는 전철)을 타고 도쿄까지 통근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전철 안에서 '차내 매너 향상에 협력해 주세요'라고 쓰여 있는 포스터를 발견했다. 당시 러시아워 전철 통근을 막 시작하며, 이런저런 사람들 때문에 한창 스트레스를 받던 때였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제목 밑으로 눈길을 옮기자, 일본어는 '차내 매너 향상에 협력해 주세요'라는 타이틀뿐이었고 내용은 전부 영어와 중국어만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무슨 외국인만 문제 일으킨다는 냥.


그리고 얼마 뒤에는 영어와 한국어로 적힌 것도 발견했다.

일본어가 쓰인 것을 발견하는 일은 없었다.


그날 전차에 탄 40분 동안 발견한 여러 사람들을 떠올렸다. 8인용 좌석에 다리 벌리고 앉아 혼자 2인분 차지하고 있던 대머리, 옆사람과 어깨가 닿고 있는데도 어깨 쫘악 펴고 피하려는 기색도 없던 아저씨, 사람이 내리려 하는데 문 앞에 가로막고 서서 온몸에 힘주고 버티는 회사원, 핸드폰을 진동으로 하지 않은 채 뿅뿅 소리 내며 게임하고 있는 할줌마, 그 종류도 다양한 NG행위가 전부 일본인 뿐이었는데, 어째서 자기들은 쏙 빠진 채, 외국인만을 위한 포스터를 만들어 냈는가. 일본어 병기 없는 포스터를 만들 생각을 한 놈, 결재해 준 놈에게 진의를 묻고 싶다. 외국인의 매너 위반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외국인만 그런 건 아니다. 일본인이라서 매너 지키고, 일본인이 아니라 매너를 안 지키는 게 아니니까. 일본 땅에 있는 일본인 전체 인수와 외국인 전체 인수를 생각하면 당연히 전체 수가 큰 일본인의 매너 위반이 훨씬 더 많을 텐데 왜 그들에게는 가르쳐 주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일까?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내 페이스북에는 이런 투고도 남아있다.






작년에 간 아시카가 플라워파크에서는, 일루미네이션 사진 촬영 스폿에 줄을 서지 않고 올라갔던 아저씨가 있었다. 내 뒤에 줄 서 있던 할머니가 '저 사람 외국인이라 매너가 없다. 일본인이면 제대로 매너를 지켜 줄을 설 텐데'라 하는 걸 듣고, 앞으로 나도 줄 서지 말까 싶었다. 할머니 말 듣고 보니 매너가 없어야 진정한 외국인일 것 같아서.


외국인이라서, 외국인이니까.


유학생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일상적으로 외국인을 접하는 동종업계 종사자들에게서조차 종종 들었던 말들. 뭐만 있으면 유학생이 그런 거 아니냐고, 웃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지도하는 아이들에게는 '외국인이니까 봐주겠지' 이런 안일한 생각은 이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로마에 왔으면 치사하고 더러워도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불만을 말하려면 로마법 다 지키고 나서 말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바른말을 하더라도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그러더라도 들어주지 않는 것이 팩트였지만 일본에서 취업하려는 학생들의 사기를 꺾기 뭐 해 채 말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메이와쿠'에 집착하게 된 것은 지리적 영향이 크다고 한다.

섬나라라는 환경 조건 상, 소속집단에서 눈 밖에 날 행위를 하면 배척당하기 때문에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대다수의 의견에 소수자가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시되어왔다고 한다.


그런 일본에서 요즘 눈길을 주고 있는 건 '다양성 (다이버시티)'이다.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오랜 관습과 고정관념은 아직도 쌩쌩한데, 자꾸 말로만 다양성 다양성 해대니 다양성이란 말이 남한산성, 행주산성, 뭐 이런 건가? 싶기까지 한데,


다양성을 중요시하자는 풍조가 불기 시작해서인가, 일본인들 내부에서도 '사람인 이상, 주위에 민폐를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에게 민폐 끼치지 말라고 말하지 말자'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민폐의 정의가 애매하여 아이에게 과도한 억압감을 주고, 어른이 되어서도 룰에만 얽매여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폐니까 하지 마'가 아닌, '이런 행동은 이런 이유로 좋지 않으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폐가 되는 내용과 그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룰을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점' 역시 함께 가르치자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취지는 좋지만, 그 조차도 '우리 일본인은 성정이 착하고 소심하며 선량하기 때문에 민폐를 강조하면 기를 못 펴고 살 것이다'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 같아 이 매너없'을' 외국인의 눈에는 영 뜳뜨름하게 들린다. 아니요, 여러분들 생각보다 여러분들 모두가 그렇게 착하고 소심하고 선량하지는 않아요. 외국인도 모두가 나쁜 건 아니고요.






앞 집 엄마가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그냥 '집안에 있어서 그렇게 크게 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였으면 좋겠다. 알면서도 그놈의 다양성 내지는 애가 말 좀 했다기로서니 그게 무슨 메이와쿠야,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한다면 내 수개월간의 얕은 아침잠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만약 그놈의 다양성 내지는 애가 말 좀 했다기로서니 (이하 생략)가 이유였다면, 언젠가 내가 책내고 신나서 밤중에 술 먹고 고성방가라도 하게 되면, 이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날 구경하고 손가락질해도 좋지만, 아줌마만큼은 집에서 나오지 말아요.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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